• 흔히 일부 국내학자들은 김구의 ‘남북회담 제의’를 두고 “백범선생이 남북통일을 위해 처음 제의한 역사적 결단”이라고 주장해왔다. 미-소 공위도 포기한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김구 주석의 민족애’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말인데, 역사 기록도 무시한 좌파의 선전선동을 그대로 복창하는 선전원들이 아닌가. 
    지금까지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협상과 관련된 책이나 논문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배후공작 부분은 모조리 배제하고 김구의 ‘활약상’만 부각시킴으로써 스탈린의 공산화 음모를 은폐 보호해주고 엉뚱한 김구의 영웅담으로 분식시켜온 것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웃지 못 할 희극이다. 

    한마디로 남북협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의 작품이다. 
    소련 혁명기부터 써먹고 동유럽 공산화에 적용해 대성공을 거둔 소위 ‘통일전선’ 전술이다. 스탈린이 미-소 공동위가 실패할 경우(즉, 미국이 말을 안들을 경우) 쓰려던 카드를 드디어 뽑은 것, 이 전술에 경험많은 ‘북한 총독’ 슈티코프가 작전을 지휘했고 김일성이 실행한다..
    그것도 김구가 1월말 유엔위원단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기 4개월 전의 일이다.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열흘 뒤, 1947년 9월26일 미소공위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가 발표한 ‘미소 양군철수’ 제안에 바로 ‘남북협상’이 들어있던 것이다. 
    양국군이 철수하고서 남북한 한국인들끼리 협의(협상)하여 정부를 세우게 하자는 것, 미국과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을 원천봉쇄하려는 선전선동 남한포섭작전이다. 

    그 1주일 후, 1947년 10월 3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회의를 소집하여 남북정치회의를 주장한다. 스탈린의 지령대로 슈티코프가 만들어준 각본에 따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소공위도 끝났으니 이제 외국의 간섭 없이 우리의 힘으로 구국대책을 세웁시다. 조선인민들이 소-미 양군을 동시에 철거시키고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민족분열책동을 파탄시키며 통일적인 민주주의 중앙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정치정세를 토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소위 남북연석회의를 열자는 김일성의 첫 제안이다. 김일성은 11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이듬해 1월까지 반복한다. (정리근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88.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국가정보학회,2007) 

    ◆스탈린의 지령-->슈티코프 지휘-->김일성-성시백 액션

    북한 공산정권 두목으로 김일성을 선택했던 스탈린은 이번에 남한 공산화에 써먹을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을 물색한다. 소련혁명기 레닌이 애용한 ‘쓸모있는 바보’ 활용전술을 원용하여 권력을 확보했던 스탈린, 그가 노린 남한 최대의 표적은 김구와 김규식이다.두 김(金)씨의 출생 이래 활동상과 이력서가 스탈린으로 하여금 주저 없이 ‘적임자’로 점찍게 하였다. (양동안, 앞의 책). 

    평양의 소련 군정은 해방 6개월후 1946년 2월8일 북한의 단독정권(인민위원회)를 수립하면서 동시에 남한의 제정당과 사회단체등에 대한 공작을 대폭 강화한다. 그후 1년동안 미군정의 남한은 박헌영의 남로당을 제외하고도, 한마디로 ‘간첩과 프락치의 좌익 전성시대’로 변했다. 
    그 중심에 김일성의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이 있다. 성시백은 소련군정이 중국공산당 주은래 (周恩來, 1898~1976일)에게 의뢰하여 데려다가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붙여준 공작전문가였다.  김일성이 주은래에게 요청했다는 말도 있다.
    그때 주은래는 성시백 외에도 유명한 작곡가 정율성(鄭律成,1914~1976)도 추천했다고 한다. 성시백이 1946년부터 6.25침략 직전 잡힐 때까지 펼친 암약상은 소련의 전설적인 국제간첩 조르게(Ricard Sorge, 1895~1944))를 능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박병엽, 앞의 책).  
  • ▲ 변장의 달인 '거물간첩' 성시백의 두 얼굴. 김일성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 변장의 달인 '거물간첩' 성시백의 두 얼굴. 김일성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 김일성의 대남공작 총책 성시백(成始伯,1905~1950)

    공교롭게도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평산(平山) 출생 성시백은 해주 출신 김구를 인질삼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무너뜨리려다가, 6·25직전 '반공'검사 해주 오씨 오제도(吳制道)의 손에 붙잡혀 6·25발발 이틀 뒤 총살된다.
    성시백이 공산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 때, 박헌영이 1925년 비밀 창당하는 조선공산당 가입이다. 3년 뒤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 정향명(丁向明)으로 개명, 서안(西安)지구 정보기관에서 활동하며 국민당 정부 장개석(蔣介石)의 직계 호종남(胡宗南) 사령관의 막료로 침투한다. 모택동의 연안(延安)과 장개석의 중경(重慶)을 오가며 남다른 암약을 펼쳐 중공 주은래(周恩來)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정향명은 중국어에 능통하고 변장술이 귀신같아 중국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조차 조선인인줄 몰랐다고 한다.

    1935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당에 가담한 성시백, 아니 정향명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상대로 통일전선 활동에도 집중, 임정 요인들과 폭넓은 인맥을 다진다. 
    특히 1942년 김구가 임시정부를 좌우합작체제로 바꿔, 좌익 김원봉을 군무부장(국방장관)으로 앉히자 그 측근으로 해방 때까지 함께 활동한다. 
    그때 임시정부에서 성시백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군무부 관계 김홍일, 이범석 등과는 ‘형님, 아우’로 부를 만큼 격의없는 관계였다. 
    한 마디로 곤경에 빠져 굶주리는 임정의 민원 해결사! 국민당 정부와 군대의 기밀을 빼내 주은래에 바치는 간첩 성시백은 김구가 중국정부에 요구하는 돈 청탁 문제나 임정 사람들의 밥벌이 등 다리 역할을 도맡아주었고, 신문에 김구의 선전 기사도 써주면서 '독립운동 동지'로 ‘2중간첩’ 10년을 보낸다.
    임정 요인들은 "힘들 때마다 도와주는 젊고 유망한 독립운동가"로 칭송하며 성시백을 의지하게 되면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해방 후의 악연’을 쌓아갔던 것이다.

    성시백의 귀국=1945년 해방되던 해 12월경, 배편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남한 정계와 지인들을 두루 살핀 성시백은 1946년초 평양으로 넘어간다. 중국서 사귄 김두봉 등 북측 임정 요인들을 만난 즉시 북조선공산당의 중견간부가 되었고, 김일성은 성시백을 자신의 직속 대남공작부서인 연락실(북로당 조직부 연락실: 5호실)의 부책임자로 임명한다. 당시 대남공작 최고 실세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월간중앙]1992년 6월호).
    김일성의 관사에 머무는 동안,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직접 밥상 술상을 차려 극진히 대접하고 41세 성시백도 34세 김일성을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한달 뒤 3월부터 성시백은 38선을 넘나들며 대남공작활동을 개시한다. 특히 박헌영과 여운형의 빈번한 밀입북을 주선하고 서신왕래의 심부름을 맡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김일성은 라이벌 박헌영보다 여운형과 손을 잡으려한다. 그해 12월 여운형이 평양에 숨어들어 김일성 집에 머물 때 김일성은 “나의 직속 공작원을 서울에 상주시킬 테니 무엇이든지 요청하면 다 들어 주겠다”고 다짐했음은 앞에서 소개하였다. 그 공작원 성시백은 이미 서울 정착준비가 끝나있을 때였다. 

    ▶변장의 달인=1947년 11월 김일성은 성시백을 불러 “김구와 김규식 등에게 합작의사를 전달하여 남북연석회의 실현에 반드시 참여시키라”고 소련군정의 지령을 지시한다. (김광운 [북한정치사 연구] 선인, 2003)
    “장군님, 염려 놓으십시오. 임정 요인들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성동무, 동무와 나의 성패가 백범에게 걸려 있소. 동무만 믿겠소”
    김일성은 차고 있는 금빛 회중시계를 풀어 성시백에게 걸어주었다. 
    시계뿐이랴, 성시백을 '북로당 남반부 특별 정치위원'으로 임명, 김일성에게만 충성하는 직속
    심복으로서 박헌영의 남로당을 압도하는 '남조선 내 북한정권'의 대표격으로 남파하는 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정향명에서 이미 정백(丁栢)으로 바꿨으며, 변장의 달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일성조차도 노인으로 위장한 성시백을 몰라보고 놀랐다는 '괴물'이다.

    ▶돈을 물쓰 듯=소련 대표부가 자리한 서울 서소문 뒷골목에 아지트를 차린 성시백은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암약을 펼쳤던가. 박헌영의 최측근 비서였다가 박헌영 월북후 남로당 총책을 맡았던 박갑동(朴甲同,1919~)의 증언을 들어보자.
    「...중국 공산당과 김일성의 연합공작단의 총사령 격으로 서울에 잠입한 성시백은 남한에 남로당 이상 규모의 김일성지지 좌익정당을 결성하는 일에 분주하였다. 
    당시 남북한 밀무역이 성행하던 때인지라 성시백은 해주에서 인천으로 오는 배편을 이용, 북조선과 만주에서 쓰던 조선은행권 뭉치를 카바이트 드럼통에 감춰 비번이 반입하였다. 그 엄청난 돈으로 성시백은 사로당(사회로동당)계를 흡수하고, 신문을 잇따라 창간한다.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 및 [광명일보] 등인데, 이 밖에도 여러개 신문에 자금을 지원하며 선전망-정보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의 부동산을 대거 사들일 때. 북한 연락과 남한 공작에 용이한 여관, 목욕탕. 이발소 등을 많이 확보하였다. 김일성과 성시백은 백년대계로 남한의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었다. 동시에 지하당인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도 조직하였으며 계속 늘어나는 밀무역 자금을 물 쓰듯 쓰면서 남한 정계를 주물렀다. 그후 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서울 부산 경기도 등을 비롯한 주요지역에 자신이 포섭한 후보자들을 출마시켰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 
    이러한 사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발행한 [북한대남공작사](1972)에서도 확인된다.

    ▶김구-김규식의 측근들 포섭=그러나 정작 중요한 임무는 김일성의 남북협상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착수한 김구와 김규식의 측근들을 포섭한 일이다. 자신의 하부인 서완석과 강병찬을 통해 김규식의 비서실에서 중요 인물 송모와 권태양을 포섭했다. 김규식이 의장인 ‘민족자주연맹’의 간부 박건웅과 임정계통의 김찬도 그의 핵심들이다. 
    드디어 성시백은 김구의 개인비서 안우생을 포섭했다. 안우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아들이자, 김구의 맏며느리 안미생의 사촌동생이다. 
    김구의 입이자 손발 같은 최측근 엄항섭(嚴恒燮,1898~1962)은 중경시절부터 성시백과 절친이며, 엄항섭의 아들은 남로당원이었다. (유영구, 앞의 책).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동조로 입장을 선회한 후에는 성시백은 남한의 남북협상세력을 ‘통일전선기구’로 묶는 일에 주력했다. 1948년 3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인회가 열리고 4월 3일 정식 결성된다. 이 협의회는 당연하게도 주요 정파 지도자들의 실무 비서들 권태양, 최백근, 안우생 등 여러명이 이끌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시백과 손잡은 공작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며, 이 기구로써 김구와 김규식을 꽁꽁 묶어두려는 목적이었다. (양동안, 앞의 책).

  • ◆김일성, 남한의 ‘중간파 지도층’ 포섭공작 대박...‘친북-종북’의 원조 탄생

    김일성은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을 남파하기 전부터 남한의 유력한 중간파 지도자들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였다. 1946년 1월에 백남운, 3월에 홍명희를 포섭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성대(서울대 전신)의 권위있는 교수 백남운과 인기 작가이자 언론계중진인 홍명희는 남로당 등 좌익정당에 일체 가입하지 않고 김일성의 ‘협조자’가 된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공산당과 무관한 사회지도층으로서 비밀리에 평양을 들락날락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와 수행하는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김구-김규식은 그들을 의심하였을까? 모를 일이다. 아무튼 백남운-홍명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회-대학가-언론계-문화계 등에 숨어 좌지우지하는 ‘친북-종북’ 인사들의 원조 격이 되었던 셈이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북협상에 참가하라고 촉구한 ‘문화인 108인 성명’도 백남운과 홍명희가 연출한 작품이라고 한다. 포섭된 김구-김규식이 참여한 남북협상에 동행했던 그들은 회담후 북한에 남아서 홍명희는 9월 공식화한 김일성정권 부수상이 되고, 백남운은 교육상을 거쳐 최고인민회의(국회) 의장까지 지낸다. 
  • ▲ 언론인이자 인기 소설가 홍명희. 오른쪽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임꺽정'(자료사진)
    ▲ 언론인이자 인기 소설가 홍명희. 오른쪽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임꺽정'(자료사진)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약력=충북 괴산 양반가 출생. 일본 유학시 사회주의 클럽 참여.귀국후 1924년 좌경서클 신사상연구회 가입. 1920년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역임. 신간회 부회장도 했다.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13년간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여 대박을 터뜨린다.
    1945년 해방직후에는 좌익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전국문학가동맹의 전신)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홍명희는 남한에 사는 동안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으므로 ‘중간파’ 지도자로서 공산당인줄 의심받은 적이 거의 없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차남과 딸은 공산당원이고, 장남은 아버지처럼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좌익협력자였다. 공산당 핵심간부 김삼룡은 친척이고 그의 조카 김기환은 일제 때부터 홍명희의 측근 일꾼이다. 중간파 안재홍, 김규식과 잘 어울리며 우익인사들과도 가까웠다. 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1950)의 둘째딸을 홍명희 둘째아들 홍기무와 결혼시켰고, 김구의 측근 조완구는 홍명희의 처삼촌이었다. 

    홍명희는 해방 이듬해 봄 3월 처음 평양을 비밀 방문한다. 김일성을 만나자마자 북한공산당의 협조자’가 되어 소위 민족통일전선에 앞장선다. 8월 두 번째 김일성 방문후 ‘중도노선’ 민주통일당, 민주독립당 등을 만들고 김규식을 도와 ‘민족자주연맹’을 1947년 12월 20일 결성하였다. 김규식이 위원장, 홍명희는 5명의 부위원장 중 1인이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의 우파격 주인공 김규식을 김일성도 포섭에 성공한 것인데, 김일성의 역공작을 모르는 하지 사령관이 김규식에 매달린 꼴이다.  

    이처럼 ‘남한정부수립반대-남북협상지지’ 동원 체제를 확립하자 홍명희는 김구-김규식 등을 만나서 ‘남북의 정당지도자들이 만나 구국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중앙일보, 앞의 책). 성시백의 공작에 포섭된 측근들로부터 남북협상을 해야 한다는 압력를 받고 있었던 김구와 김규식에게 미치는 홍명희의 영향력은 강력했다.(양동안, 앞의 책).
    두 김씨가 그때 홍명희가 북한정권에 포섭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한 확인은 어렵다. 
    홍명희는 1948년 2월 네 번째로 비밀리에 평양을 갔다온 후, 북한 공작원들과 협력하여 남북협상파의 통일전선 기구인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했다. 백남운과 함께였음은 물론이다. 김구와 김규식 등이 ‘변심’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시 압박하는 그물을 친 것이다.
  • ▲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교수 백남운, 오른쪽은 유물론에 입각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저서(자료사진).
    ▲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교수 백남운, 오른쪽은 유물론에 입각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저서(자료사진).
    ◉백남운(白南雲, 1894~1979) 약력=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농업학교를 나와 일본 동경상과대학 졸업. 여기서 마르크스 경제이론 수용.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 우리나라 고대 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조선사회경제사](1933년)를 저술, 학자지위 확보함. 해방후 1945년 조선학술원 설립 원장,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법문학부 재정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46년에는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서는 좌우연립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조선민족의 진로] 책자를 발표했다. 
    홍명희처럼 백남운도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중간파로 분류되고 우익진영과도 친했다.  

    백남운은 김일성에게 제일 먼저 포섭된 남한의 지도자급 정치인이다.
    그는 1946년 1월 25일 경에 평양을 처음으로 비밀 방문했는데, 이는 여운형의 2월이나 홍명희의 3월 밀입북보다 앞선 일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로부터 남한의 학자와 문화인들을 북한으로 빼돌리는 창구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하였고, 돌아와서는 북한이 지원하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 문화인들을 북으로 빼돌린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앞의 책).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근민당)을 함께 만든 백남운은 여운형이 암살되자 위원장이 되어 1947년 10월 중순 아홉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돌아오자마자 10월 18일 근민당, 사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등 중간파 5개 정당 합동으로 ’미-소양군 조기철수와 남북협상‘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백남운은 12월 초에도 평양에 갔으며, 그때 김일성이 ‘남한에서 온 한 혁명가’를 만나서 이승만 김성수 등 반동분자들을 제외한 남조선의 애국적인 모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남북 연석회의의 소집을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이 백남운에게 김구-김규식의 포섭을 직접 지시하였다는 말이다. (정리근, 앞의 책)
    그에 따라 백남운은 두 김씨와 북한정권 간의 연결을 맡았다. 백남운의 밀입북은 확인된 것만 14회에 달한다. 그는 김일성과 김두봉의 서한을 김구와 김규식에 전달하는 ‘배달부’ 노릇을 할때에는 옷도 변장하였고 두 김씨에게 남북협상에 관한 김일성의 뜻을 해설해주었다. (유영구, 앞의 책). 또한 성시백이 결성하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홍명희와 협력, 두 김씨가 중도이탈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앞에 밝힌대로다. (양동안, 앞의 책).
  • ▲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교수 백남운, 오른쪽은 유물론에 입각한 '조선봉건사회경제사'저서(자료사진).
    ◆성시백의 ‘대통령 미끼’...“김구는 자기의 집권을 믿었다” 남로당의 증언

    북한공산당 [로동신문]은 성시백이 김구를 직접 찾아가 남북협상 지지를 설득했고 김일성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했다고 공개하였다.([로동신문], 1997. 5. 26). 
    성시백이 김구를 어떻게 포섭하였는지 서영해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임정의 프랑스 파리 주재원이던 서영해(徐嶺海)도 북한 공작원으로 서울에 남파되어 엄항섭을 통해 경교장의 김구를 방문한다. 물론 성시백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나는 현재 북조선에서 모기관의 요직을 맡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한 서영해는 사명을 설명하였다. “김구 주석께서 유엔에 의한 단독선거를 배격하고 북조선의 김일성 위원장에게 남북총선거를 제의하면 남북을 통한 총선거가 가능합니다. 김일성 위원장은 독립운동 경력이 짧아서 김구 주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지요.”라고 전달했다. 
    김구는“서형의 확실한 신분을 대주오. 지금 이북의 무슨 기관에서 일하고 있소?”라고 물었다. 서영해는“김 주석께서 앞으로 평양에 오시게 되면 다 알 수 있게 됩니다”라고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론을 거듭 역설했다. 김구에게 통일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미끼를 던지기로 결정한 것은 1947년 11월 15일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제안에 따라 합의된 것이라 했다. (이기봉,“남조선 반동거두 김구를 평양에 불러라: 1948년 남북협상 이면비화” [민족정론]1994년 8월호).

    이처럼 김구가 성시백-서영해의 ‘유혹’에 이끌려 남북협상에 따르게 되었다는 견해를 밝힌 김구의 측근이 또 있다. 임정때 국무원 비서장이자 해방후 한독당 상무위원 조경한(趙擎韓,1900~1993)이 엄항섭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공개한 것이다. 
    “하루는 엄항섭이 찾아와 하는 말이 남북협상을 해야겠다고 말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면 장덕수피살사건 여파로 한독당이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 정치적 출로로 남북회담이 요청되고...(중략)...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되면 김구 선생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으니 남북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더니 임정 주불 연락원으로 있었던 서영해라는 사람이 김구 선생을 찾아와서 김일성이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자꾸 종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털어놓아요.” (조규하등, [남북의 대화] 고려원, 1987. 양동안, 앞의 책).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통곡의 언덕에서]를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백범은 남북 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조만식계 북조선민주당 인사들이나 북조선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범은 북한 동포들에게 자기 얼굴을 꼭 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다.
    또한 백범이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비밀서한을 김일성-김두봉에게 발송한 날은 미군청이 장덕수 암살사건 증인으로 나와달라는 소환장이 백범에게 전달된 날이었다...」

    그러니까 김구는 측근 등 사면팔방 남북협상의 설득과 스스로 평양행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장덕수암살의 압박감까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자 결단을 내려 김일성의 요구에 응하였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마침내 2월 10일 김구는 유명한 성명을 발표한다.

    ◆ 김구의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성시백의 작품?

    ‘읍고’(泣告)란 눈물로 고한다는 말, 제목부터 감성에 호소하는 김구의 성명은 자신이 제안한 미소양군 철수와 남북협상을 ‘크렘린의 대변’이라 비판한 한민당을 질타하고 한국인의 심장에 파고드는 비장한 문장으로 쓰여졌다.
    소련이 지령한 2.7폭동이 한창일 때 나온 성명인지라 “암살과 파괴와 파업은 외군의 철수를 지연시킨다”고 한마디 걸치고 나서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보자.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보자”고 외친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중략)....삼천만 동포 형제자매여!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深思:깊이 생각)하라” ([조선일보]1948.2.12).

    무슨 과거를 잊고 무엇에 관대하자는 것인지 설명이 안보인다. 그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38선을 철폐하자”는 감상론의 호소가 눈에 띄는 성명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통일'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을 언급한 구절은 찾기 어렵다.   

    이 성명은 김구의 최측근 엄항섭이 작성하였다는데 그때 성시백과 몇차례 만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검찰청 [좌익수사실록] 제2권) 
    그러나 뒷날 북한에서 출간한 문헌에는 성시백이 직접 성명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종항-안우생 「남북연석회의 회고」[로동신문]1986.4.19. 김종항-안우생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남북련석회의와 백범 김구선생을 회고하여」 [인민들 속에서]-39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6). 
    김구 따라 평양회담에 갔다가 주저앉았던 비서 안우생의 회고이기에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란 소련 공산당의 통일전선 테크닉, 일찍이 소련혁명과 동유럽 공산화에 써먹은 레닌-스탈린의 전유물이다 그 화려한 심리전술을 어느 국가 누가 흉내낼 수 있으랴. 김구의 비장한 연설 “38선 베개 눈물”은 평양 소련군정사령부 전문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성시백에 가져와 김구 측근에게 주어 ‘교육’시키며 보완했다고 보는 것이, 소련 공산주의 연구자라면 어울리는 추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연석회의’ 자체가 김구의 아이디어는커녕 스탈린의 지령이었고 이는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소련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4월 평양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진행된 주요 연설문들은 미리 소련 군정이 써놓은 것들이었음이 모두 밝혀졌다. (레베데프의 증언,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쉬띠꼬프의 일기] 앞의 책).

    북한이 놀랐다. “김구의 전환이 예상보다 빨라서...”

    김일성은 1월 초에 김구와의 합작을 강조하며 지령을 내렸고 1월 중순께 성시백 등 공작원들을 통하여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정당 및 단체 대표들에게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북조선로동당은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1월28일 두 김씨가 유엔위원단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였고, 2월16일엔 ‘남북정치 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토의하자’는 내용의 공동명의의 편지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두 김씨의 태도전환이 예상보다 빨라 놀랍고 반가운” 김일성과 북로당은 다시 홍명희를 평양에 불러 올리고, 성시백의 상관인 북로당 조직부 연락실장 임해(任海,1900~1962. 뒷날 6.25때 모스크바 대사)를 서울로 보내 포섭된 중도파 지도자들과 김구 김규식의 진의를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김광운, 앞의 책).
    김일성은 3월15일 두 김씨에게 답장을 보내고 두 김씨도 또 답장을 보낸다. 이제 의기가 통한  남북 3김씨는 측근과 공작원을 통한 연락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김구는 이때까지도 편지연락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었다. 하지만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 법’이다. 소문이 번지자 놀란 두 김씨는 3월31일 비밀편지 북송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