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에 활용된 자료는 역설적이게도 정대협이 30년에 걸쳐 발간한 총 8권의 위안부 증언집이다. 정대협이 선전한 위안부들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학생들은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외면할 수 없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1. 발전사회학 

    2019년 9월 17일, 정년을 1년 남긴 필자는 연세대 강의실에서 수강생들과 열띤 토론을 했다. 이 강의는 대한민국이 발전했다고 인정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보자는 ‘발전사회학’ 강의였다. 지난 10여년 동안 필자는 같은 방식으로 강의를 해왔다.

    늘 그랬듯이 강의의 시작은 ‘대한민국의 발전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뤘다. 식민지 시기를 ‘수탈’의 시대로만 접근하면, 건국 후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비약적 발전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필자의 견해를 먼저 전했다. 

    이 문제제기를 학생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1961년 5.16 이후 이루어진 고도성장은 오로지 박정희 정권의 역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가요?” 이 질문에 학생들은 대부분 아니라고 반응한다. 그리고는 원론적인 그래서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한다. 국민들이 함께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필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나요?” “북한이 못사는 건 북한 주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인가요?” “후진국 국민들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후진국이 된 건가요?” 이 대목에 오면 학생들의 저항이 상당히 수그러든다.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앞 단계인 이승만 정권의 역할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없을까요?” 다시 학생들이 펄쩍 뛴다. 친일파가 세운 나라인데, 6.25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는데, 전쟁 후엔 원조경제가 전부였는데, 부정부패가 만연했는데 등의 이유를 거론하며 절대 아니라고 반응한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의로 바로 뛰어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아직 학생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럼 여러분은 박정희도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도 아니라고 하니, 결국 그 앞 단계인 일본이 식민지배하던 시기에 발전의 씨앗이 뿌려진 거라고 보는 건가요?” 요 대목에서 학생들 대부분은 황당하다는 반응 일색이다. 

    그러나 필자는 질문을 계속한다. “발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발전의 역사적 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박정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라니 그렇다면 식민지 시기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설마 여러분은 나라를 넘긴 구한말이 대한민국 발전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나요?” 

    “구한말에서 35년 식민지배로 착취당하고, 미군정 3년 패스하고, 이승만 12년도 부정하고 갑자기 박정희 18년으로 연결이 되어 발전이 이루어졌다고요?” “그도 저도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발전은 뿌리 없이 갑자기 나타난 박정희라는 인물의 개인적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보아야 하는 겁니까?”

    학생들의 묵묵부답이 이어진다. 그렇다.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전달된 현대사 교육에는 이런 질문들이 전혀 던져지지 않았다. 이러한 질문들에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학생들 뇌에는 식민지 시기와 이승만 시기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설 공간이 마련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논쟁이 끝나는 건 아니다. 논쟁은 다음 단계에서 더욱 격화된다. 

    2. 『반일종족주의』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설명 또한 엄청난 장애물과 마주친다. “식민지 시기는 수탈과 근대화가 공존하는 시기”라는 필자의 주장은 시작부터 저항에 부딪힌다. 학생들은 수탈이 당연하지, 무슨 근대화라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일축한다. “서구를 공부해서 만든 일본의 근대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이식되는 계기가 식민지였다”는 필자의 설명은, 그래서 일본에 감사해야 하냐는 학생들의 비아냥으로 이어진다. 

    “정치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차별을 받은 것이 맞지만, 동시에 사회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전통사회의 굴레를 일본이 벗겨 준 거 아니냐?”는 필자의 반문에 학생들은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곧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넘어간다. “일본을 위한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근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냐?”는 필자의 대응은 결과론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학교, 공장, 감옥과 같이 시간을 관리하는 ‘감시와 처벌’ 시스템이 다름 아닌 근대”라는 푸코(Michel Foucault)를 동원하며 필자는 “일본이 조선을 근대로 훈육했다”고 설명을 이어간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 경험과도 비교하면서 “식민지는 전(全) 지구적으로 근대가 확산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고 부연한다. 

    학생들은 그렇다면 식민지의 독립투쟁이 ‘반(反)근대투쟁’이냐고 반문한다. 이에 필자는 “식민지의 독립투쟁은 정치적 독립을 위한 것이지, 사회문화적으로 근대로부터 독립해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투쟁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식민지 주민을 대변할 국회의원이 없고 군대에도 가지 못하면서 세금만 부담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독립이 필요한 건 맞다. 그러나 반상(班常), 서얼(庶孽)과 천출(賤出), 그리고 남녀(男女)라는 신분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시대가 식민지와 함께 왔는데 그것을 다시 전통으로 되돌리자는 건 불합리한 일 아니냐?”고 다시 필자가 맞받아친다. 

    학생들은 그렇게 차원을 나누어 분석적으로 접근하면 식민지라는 차별의 총체적 성격을 희석시키는 문제가 생긴다고 대응한다.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 차원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등장한다. “쌀을 뺏앗아가고, 토지를 수탈하고, 징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반일종족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최근 연구성과를 소개”하면 처음에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영훈, 김낙년, 정안기, 이우연, 주익종 등의 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또 그들의 논문과 책을 직접 읽히면 학생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그 타당성을 받아들인다. 이들의 논리와 자료가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조선이 단일한 시장으로 묶이면서 발생한 인적·물적 교환의 결과 쌀이 수출되고, 토지가 거래되고, 계약에 따라 노동자가 해외로 진출했음”을 학생들이 비로소 깨닫게 된다.

    3. 『빨간 수요일』

    그럼에도 절대 넘어서지 못하는 벽이 하나 남아있다. 다름 아닌 ‘위안부’ 문제다. 이 문제는 특히 오늘날 페미니즘 담론에 익숙한 여학생들의 저항이 특히 거세다. 온갖 자료를 동원해 “위안부들 하나하나의 사정이 강제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보기엔 무리”라는 설명을 아무리 해도, 그들은 끝내 ‘구조적 강제’라는 개념을 방패로 버틴다. 

    그러나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듯이, 구조적 강제가 없었던 시대 또한 없다. “과거 식민지 조선이건 오늘날 발전한 대한민국이건, 후진국이건 선진국이건, 전통사회건 근대사회건, 구조적 강제가 없는 현실 사회가 존재하는가?” 그래서 이 말은 “아무런 설명도 못하는 하나 마나 한 말일 뿐”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바로 이 허상과의 대립과 논쟁이 만들어 낸 사건이 2019년 9월 17일 연세대 사건이다.

    만약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 쓴 책 『빨간 수요일』 이 필자의 강의 당시 출판되어 텍스트로 삼을 수 있었다면 문제의 사건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반일종족주의’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의 문헌과 판결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비판하면서도, 정대협이 출판한 자료를 핵심적인 근거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대협의 수요집회를 지지하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그만큼 효과적일 수 있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책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는 이 책을 철저히 증거 위주로 썼다. 저자의 말대로 그래야 덜 다치기 때문이다. 집필에 활용된 자료는 역설적이게도 정대협이 1993년부터 2014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나름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총 8권의 위안부 증언집이다. 정대협이 선전한 위안부들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학생들은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식민지 당시의 공식 문헌과 사료, 특히 위안소를 운영한 일본군 문서는 물론 미군의 기록 그리고 당시의 신문 기사 등도 함께 폭넓게 검토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들 객관적 사료를 통해 드러나는 당시 위안부 현상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접근한다. 그러한 종합적 판단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증언의 경우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민간의 매춘업소에서 일한 위안부’로 보아야 한다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53쪽)

    1) 일본군 위안소가 없는 곳 즉 일본, 조선, 대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2) 중일전쟁이 발생하는 1937년 이전부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3) 주민등록상 1930년 이후 출생했거나 17세 이하의 나이에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4) 군인과 민간인을 동시에 상대하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이 기준을 적용해 저자는 정대협에서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6권 그리고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2권에 등장하는 증언들을 교차 분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상당수가 위 사항에 해당된다”고 밝힌다. 즉 “일본군의 관리·감독 하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여성보다 일반 매춘업소에 종사한 여성이 더 많다”고 지적한다. (53쪽)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의 치밀한 분석의 결론은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소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위안부피해자법’이 정의한 ‘일본군에 의한 강제동원’된 사례는 단 1명도 없다”는 충격적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54쪽)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가 가장 끈질기게 분석한 사례는 1993년 정대협이 출판한 증언집 1권에 등장하는 이용수 및 김학순 사례다. 이 둘은 정대협이 주도한 위안부 운동을 각각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들이 199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온갖 매체에 증언한 기록을 하나하나 추적하며 분석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들의 초기 증언에서는 ‘가난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 증언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분석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정대협의 주장과 활동에 공감하는 학생들의 정서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아프게 꼬집는다. 

    “나는 위안부 생활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1990년부터 시작된 정대협의 ‘위안부 커밍아웃 운동’이 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 만행 고발’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된 구술증언은 언론으로, 책으로, 영상 등의 매체를 이용하여 위안부 운동을 알리는 홍보물로 널리널리 퍼져 나갔다. 정대협 증언집에는 여자로서 숨겨야 할 치욕스런 순간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장면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218쪽)

    “심지어 그들의 커밍아웃을 유혹하는 ‘보상금’ 앞에서 갈등하는 장면들도 고스란히 적혀 있다. ‘신고하면 보상금 줘요’라는 공무원들의 말에 가족과 이웃 친지들이 알까봐 노심초사하면서도 꽁꽁 숨겨왔던 위안부 이력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온 건 가족과 이웃 친지의 ‘외면’이고 ‘단절’이었다. 돈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보낸 그들이 또 돈 때문에 가족과 친지를 잃는 두 번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218쪽) 

    “정대협과 여성가족부가 진정으로 위안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면 구술 증언을 받고 보호·지원하는 자료로 삼는 데 그쳤어야 했다. 하지만 정대협은 그들의 치욕스런 과거를 책으로 출판하여 시중에 판매하였고, 여성가족부는 그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려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했다. 신문방송은 또 그들의 부끄러운 장면을 퍼뜨리기에 바빴다. 정작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을 읽어 보면 그들은 일본군의 피해자가 아니라 힘없는 나라,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희생자라는 사실만이 오롯이 부각될 뿐이다.” (219-220쪽)

    이 책에는 또한 2021년 1월 8일 및 그로부터 3개월 후인 4월 21일 서로 다른 구성의 위안부들이 일본을 상대로 한국 법원에 배상금을 청구한 같은 성격의 두 사건에 대한 대립적 판결에 관한 분석도 실려 있다. 서로 모순되는 두 1심 판결문의 내용은 물론, 각각의 판결문에 내장된 판사들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無知)도 낱낱이 파헤쳤다.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모르니 ‘일본 국가가 위안부를 차출했다’는 황당한 전제를 기정사실로 판결문이 출발한다. 그로부터 판결의 최종 주문(主文)까지로 이어지는 과정에 등장하는 논리의 비약과 사실의 부정합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저자는 판사들의 지적 수준에 절망한다. 나아가서 저자는 1996년 UN 인권위원회 이름으로 제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또한 역사를 모르긴 마찬가지라고 혀를 찬다. 

    국민을 속이고 세계를 속이는 성역화 운동이 된 ‘위안부 기림의 날’ 행사, ‘평화라는 이름의 소녀상’이 청소년에 제공하는 폭력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위안부피해자법’의 문제에 관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이어간다. 결국에는 윤미향을 중심으로 30년 동안 지속된 수요집회라는 위안부 왜곡의 현장이야말로 새빨간 거짓이 판치는 ‘빨간 수요일’이라 단언한다. 마지막에는 세종대 호사카 유지와의 소송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엉터리 위안부 기술도 하나하나 들추면서 친절히 알려준다.

    4. 『나의 전쟁 범죄』

    1983년 일본에서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라는 공산당원이 『나의 전쟁 범죄』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저자인 요시다가 일제 시절 조선 여인을 강제연행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증언집이다. 이 책은 출판과 함께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과 활동가들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9년에는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 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도 출판됐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일본에서는 이 책이 출판된 지 대략 10년이 지난 1992년 1월부터 이 책에 나오는 증언을 근거로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대대적으로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990년 11월 활동을 시작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다.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요시다는 ‘일본의 양심’으로 떠올랐고, 그 와중에 사죄하러 한국을 방문하는 이벤트도 마련했다. 정대협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귀인(貴人)이 나타난 셈이다. 1992년 8월 12일 방한한 요시다를 인터뷰한 경향신문은 “나는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강제송출한 노예사냥꾼이었다”고 폭로했으며, “만일 일본 정부가 끝까지 이를 부인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당시 이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규탄하는 여론이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 들끓게 되었고, 또한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여론의 흐름을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일본에서는 1993년 8월 내각 관방장관 고노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고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어서 1995년에는 호주 언론인 힉스(George Hicks)가 요시다의 증언을 주요 근거로 삼아 『위안부』 (The Comfort Women) 란 영어책을 출판했다. ‘2차대전에서 매춘을 강요한 잔인한 일본 정권’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 이란 선정적 부제도 달았다.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가 된 책이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마침내 1996년 1월 UN의 인권위원회가 ‘강제연행’과 ‘위안부 성노예’ 설을 뒷받침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에 관한 역사는 물론 현지어도 전혀 모르는 스리랑카 출신의 법률가 쿠마라스와미는 일본과 한국에서 요시다를 지지하는 그룹 특히 한국 정대협의 도움을 받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들의 증언을 모아서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보고서를 썼다.

    1991년 시작된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프로파간다’는 드디어 1996년 UN 보고서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관해 세계 여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발표된 그녀의 보고서는 1995년에 나온 힉스의 책에 일방적으로 의존한 것이었다. 영어로 된 위안부 문헌이 그것밖에 없을 때였다. 그리고 앞서 밝혔지만 힉스의 책은 요시다의 증언에 주로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힉스의 책을 매개로 결국에는 요시다의 증언을 반복한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고서가 나오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도 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현지어를 몰라 원(原)사료를 전혀 읽을 수 없던 쿠마라스와미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 두 사람을 면담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및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다. 

    하타는 면담에서 다음과 같은 3가지 핵심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 (a)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일본 측의 유일한 증인인 요시다 세이지는 ‘직업적 거짓말쟁이’다. (b)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는 위안부 증언 중 객관적인 증거로 뒷받침되는 증언은 없다. (c) 위안부의 고용 관계는 일본군이 아닌 위안소 경영 업자와 체결되었다. 

    그런데 1996년 1월 발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하타의 이 같은 지적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타는 『문예춘추』 文芸春秋 1996년 5월호에 “왜곡된 나의 논지” (歪められた私の論旨) 라는 글을 발표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지금도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한 좌담회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2006년 10월 개최된 “아시아여성기금과 우리들”이란 일본의 위안부 전문가들 좌담에는 다음과 같은 토론 기록이 남아 있다.

    요코타 요조 (横田洋三): 우선, 1996년에 유엔 인권위원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특별 보고자인 쿠마라스와미 씨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쿠마라스와미 씨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문제, 특히 현 시대의 문제에 집중했기에, 위안부 문제는 자신의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NGO로부터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도 있다”라는 압력이 가해져, 결국 보고서의 부록 형태로 추가된 것입니다. 

    오누마 야스아키 (大沼保昭): 안타깝게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학문적으로는 수준이 낮은 보고서입니다. 사실이란 면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의견에 의거하고 있으며, 법적인 의논(議論)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위안부 부분은 낙제점이 주어질 수준이며, 맥두걸 보고서는 이보다 훨씬 수준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와다 하루키 (和田春樹): 보고서 내용의 대부분이 특히 힉스의 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누마 야스아키 (大沼保昭): 저런 책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성의가 없으며, 학문적으로는 낙제에 해당됩니다. (출처: https://www.awf.or.jp/3/persons-14.html#p14-3) 

    토론자들은 모두 UN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사회에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인식을 퍼뜨린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세계의 여론은 요시다의 증언으로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었다. 페미니즘에 기초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의 포로였던 쿠마라스와미는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의 요시다 간에 구축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거짓과의 싸움이 요구되는 상황은 그렇게 온 세상을 뒤덮었다.

    5. 『위안부 문제의 진실』

    다른 한편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찾는 노력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진전되고 있었다. 요시다의 증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요시다가 증언한 일을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1989년 8월 17일 제주신문은 요시다가 강제연행을 했다는 제주도 성산포의 단추공장을 찾아가 나이든 주민들의 증언을 확인한 결과, 그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일본의 날조이고 몰염치한 상술에 분개’한다는 부제를 단 기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는 반일감정에 묻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일본에서도 같은 의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전문조사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파헤치는 친한파 언론인이자 학자다. 그 역시 당시를 산 사람들의 경험이 요시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음에 주목했다. 

    니시오카의 집요한 문제제기에 힘입어 일본에서는 마침내 아사히신문이 요시다의 책 출판 시점으로부터 무려 30 여년이 지난 2014년 4월 진실규명을 위한 자체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의 확인을 거치며 요시다의 증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결국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 5일 요시다의 증언이 날조임을 사고(社告)로 밝혔고, 16개의 관련 기사를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아사히신문 회장은 사과했고, 편집국장은 파면됐다. 심지어 2017년에는 요시다 세이지의 장남이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반성하는 책도 출판했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니시오카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아사히신문과 싸워 온 과정을 정리해 2007년 6월 『알기쉬운 위안부 문제』 라는 책을 일본에서 출판했다. 요시다의 거짓 증언이 책으로 나온 지 무려 20여 년 후다. 이 책은 ‘누가, 언제, 어떻게 문제를 확산시켰는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띠를 두르고 있다. 또한 ‘현 상황에 입각한 신(新) 내각 관방장관 담화 시론을 제안한다’는 파격적 대안도 담고 있다. 

  • ▲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던 이 책은 마침내 2021년 번역되어 한글로 출판됐다. 번역본은 『한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별책부록에서 따로 이 문제와 관련된 일본 측의 주요 문헌 자료를 모두 한글로 정리했다. 

    별책부록 『자료집』에는 2015년 발표된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보도에 대한 독립검증위원회 보고서,” 2014년 발표된 “일본 정부의 고노담화 검증보고서,” 1996년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유엔에 제출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즉시 철회한 “일본 정부의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한 반론서” 등이 실려 있다. 모두 위안부에 관한 왜곡을 밝히는 핵심 자료들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아사히신문의 의도적 왜곡 보도는 이미 1991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한국에서 정대협이 출범한 바로 그 즈음이다. 1991년 12월 6일 일본 법원을 통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김학순이 소장에 ‘어머니가 팔아 기생이 되었다’라고 기재한 것을 아사히신문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여자정신대로 강제연행했다’고 바꿔서 보도했다. 

    이 왜곡을 찾아낸 사람이 바로 니시오카다. 김학순의 이 재판은 10여 년을 끌다가 2004년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드러난 아사히신문의 만행을 한국의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사법부도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비난 보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한국의 위안부 담론은 이렇게 거짓의 산을 쌓았고, 진실은 그 아래 깊숙이 묻히게 되었다.

    6. 다시 발전사회학

    일본과 한국의 좌파 언론과 활동가들이 이렇게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한국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밝히면 오히려 ‘일본 극우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상대로 필자는 한국 좌파의 수장 문재인 대통령의 반일선동 ‘No Japan’ 구호가 최고조에 이르던 시점에 ‘역사의 진실’을 강의실에서 말하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검사의 기소였다. 형사 법정에서 ‘허위사실로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한 책임’을 지라는 공권력을 상대로 ‘허위사실이 아니며 설사 허위사실이라 하더라도 학문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다투고 있는 상황이 즐거울 리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빨간 수요일』이라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통해 『나의 전쟁 범죄』가 쌓아 놓은 거짓의 산이 무너지고 마침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 밝혀져서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반일종족주의』가 산산조각 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결국에는 진실이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필자는 2020년 8월 정년을 맞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는 이미 정년을 1년 넘긴 상태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 벌써 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2년의 세월이 만들어 준 혜택도 없지 않다. 만약 지금 필자가 다시 발전사회학 강의를 한다면, 이제는 학생들에게 읽힐 좋은 텍스트가 많아져서 고맙고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