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유학시절부터 공들인 '신앙 형제' 맥아더가 하나님 앞의 약속을 지켜 대한민국을 구했다
  • ▲ 1951년 9월 15일 인천 바다를 걸어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이 바다 남쪽 당진에 우리 고향집이 있다. ⓒ연합뉴스
    ▲ 1951년 9월 15일 인천 바다를 걸어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이 바다 남쪽 당진에 우리 고향집이 있다. ⓒ연합뉴스
    "9월이 오는 소리~~~사랑이 가는 소리~~~사랑이 오는 소리~~~."

    패티 김의 감미로운 흐느낌에 눈을 들어 보니 어느 새 9월의 하늘이 활짝 열렸다.

    아, 9월은 우리 가족사에 ‘구원의 달’…. 멀리 71년전 고향땅 6.25때 악몽이 새롭다.

    그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9.15)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10년으로 끝났으리라.

    나뿐이랴. 대한민국도 자유세계가 던져준 생명줄을 잡아 다시 태어난 나라이다.

    ◆ 10세 소년, '김일성 만세'를 부르다

    조그만 시골학교 4학년 반장은 그날 아침에도 담임선생이 교실에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 ‘차렷. 경례’를 올린다.

    선생은 대답도 없이 칠판 가득차게 ‘김일성 장군 만세’를 썼다.

    "반장 나와. 만세 삼창 불러."

    어리둥절한 나는 교단에 나가 만세를 선창, 급우들이 따라 세 번 불렀다.

    선생은 다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를 써놓고 만세를 부르라고 명령하였다.

    20대 새파란 담임선생은 그날로 우리학교 교장이 되었다.

    다른 교사들이 ‘얌전한 젊은이가 숨어있던 공산당인줄 몰랐다’며 벌벌 떨었다.

    교장은 ‘붉은 소년단’을 조직, 단장에 나를 지명했다. 1학년부터 말 잘 듣던 제자니까.

    "남조선 해방 예술제를 준비하자."

    교장이 시키는 대로 우리는 독창, 연극, 합창 등을 열흘쯤 연습한 뒤 강당에서 막을 열었다.

    개막 연설은 소년단장 몫이다. 교장이 써준 연설문을 달달 외운 나는 동원된 청중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한다.

    "위대한 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시작된 웅변의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한 줄이다.

    "미제국주의 앞잡이 매국노 이승만 독재자를 태평양 깊은 물에 장사지냅시다."

    목청껏 외치고 테이블을 꽝! 마을 사람들은 ’옳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스타 탄생! 공산주의가 뭔지 김일성이 누군지 알 턱 없는 만10세 소년은 우쭐해졌다.

    공연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면내 주민을 교대로 동원하며 불규칙적으로 이어졌다.

    ◆ 북한군 '따발총'을 움켜잡고 호통 치던 어머니

    농번기에다 미군기 B-29 공습을 피한다며 야간에만 공연했던지라 소년은 밤늦게 머슴 등에 업혀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진다.

    이게 무슨 소리? 소란한 서슬에 잠에서 깬 눈앞에 무서운 광경이 벌어진다.

    "에미네야, 반동놈 어디 숨겼네? 똑바로 불지 않으면 니 외아들부터 죽을 줄 알라우."

    북한 인민군 두 놈이 나타나 어머니 가슴에 따발총을 대고 내 이불에도 총구를 겨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는 부모도 자식도 없느냐?"

    가냘픈 체구의 어머니 목소리가 그리 큰 줄 몰랐다.

    따발총을 밀치며 내몸을 몸으로 덮는 어머니의 호통은 흐느낌으로 변한다.

    그 시각, 동네 이장인 아버지는 공산당 집회에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고 ’반동 자아비판서‘를 쓰고 나서는 다른 ’반동‘ 인민재판을 기록해야 했다. 그 동네 ’빨갱이‘ 중에 글을 아는 자가 없었다. 밤마다 되풀이되는 인민재판, 북한군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밤중에 쳐들어와 집안을 뒤지고 어머니와 나의 가슴을 총부리로 쿡쿡 찔렀다.

    그들이 찾는 ’반동‘은 경찰지서장 외삼촌이다. 국군따라 철수한 외삼촌 행방을 어찌 알랴.

    당시 서울서 우리 집에 피난 온 몇몇 가족들이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던 기억이 난다.

    ◆ 추석 전날 밤 불발된 학살자 명단

    야간공연 두 달쯤 되었을까, 공연이 끝나자 교장이 내 팔을 밖으로 이끌었다.

    "모든 원고를 아무도 모르게 불태워라."

    이 한마디 속삭인 그는 행방을 감추었다.

    동시에 우리 고향을 점령한 북한군도 하루아침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 즈음 멀리서 들리는 대포소리…. 바로 인천 상륙작전 함포사격이었음을 며칠 뒤 나타난 외삼촌에게서 들었다.

    추석 전날 휘영청 밝은 달밤에 미군 트럭 행렬을 인도하는 군용 찌프에서 내려 달려오는 국군은 헌병 철모를 번뜩이는 외삼촌이다.

    "누님, 하루만 늦었어도 큰 일 날 뻔 했어요. 이거 보세요. 나쁜 놈들…."
     
    군청 공산당본부에서 수거했다는 학살자 명단이다. 우리동네 명단엔 아버지와 가족5명이 맨꼭대기에 올라있고, 학살 D데이는 바로 그날 밤이 아닌가.

    식은 땀을 흘리는 우리 앞에 새까만 흑인병사들이 레이션 박스들을 마당에 내려놓았다.

    "자, 추석 선물."

    외삼촌이 꺼내주는 초콜릿은 난생처음 맛보는 황홀경, 미국의 발견이다.

    그렇게 인천 상륙에 이어 9.28 서울 수복으로 대한민국은 다시 살아났다.

    이승만이 유학시절부터 공들인 40년간의 '신앙 형제' 맥아더가 하나님 앞의 약속을 지켜 대한민국을 구해냈던 것이다.

    오늘의 새로운 이승만-맥아더 동맹은 어디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