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소수 민족, 한국선 남편·딸 있는 '다문화인'… '타향살이 8년차' 엄마의 한국 적응기
  • 한국에서 다문화는 당·부당을 떠나 현실이 됐다. 특히 조선족을 포함해 한국 내 중국인 인구는 2020년 현재 약 80만명으로, 한국 체류 전체 외국인 약 220만명의 3분의 1이 넘는다. 그러나 정착이건 단기 체류건, 이들의 한국살이의 애환과 다양한 '다(多)문화' 체험을 '그들'이 아닌 '나'를 주어로 소개한 글은 뜻밖에 적다.

    '두 나라 세 문화(박진하 지음, 기파랑 刊)'는 중국 국적을 유지한 채 한국에 정착한 지 8년째 되는 30대 후반 조선족 여성의 한국살이 적응기다. 중국에선 소수 민족, 한국에선 외국인이자, 한국 국적의 남편과 딸이 있는 다문화인으로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찾아 달려온 여정이 담담하게 1인칭으로 펼쳐진다.

    조선족에게 중국과 한국이란


    저자의 고향은 국민 가곡 '선구자'의 산실인 연변 룡정.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항저우·상하이 등에서 여행안내원과 무역상담 통역으로 일하며 대학을 다니던 저자는 아버지의 '실종'을 계기로 한국에 들어온다.

    한국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합치기 위해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저자는 같은 직장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어여쁜 딸을 낳는다.

    저자의 조부모·외조부모는 일제 강점기에 함경도에서 간도로 건너와 정착한 조선인들이다. 어릴 적 할머니·할아버지와 학교 교육을 통해 조선(북한)을 도와 미국을 무찌르러 조선족 다수가 지원군으로 나갔다고 배웠다.

    이제껏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배운 전쟁이 이곳에선 6·25 남침 전쟁이었고, 조선족은 본의 아니게 침략군이라는 악역을 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도 받는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기분이 안 좋고 반대로 한국에서 중국을 나쁘게 말해도 기분이 안 좋다는 저자. 한국에서 한국 남자와 한국 국적의 딸과 살고 있는 저자에게 중국과 한국 모두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나라라는 솔직한 고백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노 아이덴티티(No Identity)'가 아니라, 중국인도 되고 조선족도 되고 한국 사람이라고 못 할 것도 없는 '다중 아이덴티티(Multi Identity)'라는 저자의 시각이 새롭다. 어중간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두 나라, 세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싶다는 게 저자의 포부다.

    딸을 위해 남긴 '엄마의 좌충우돌 한국 적응기'


    저자는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 당연히 중국어와 '조선말'에 더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데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가는 한국어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 속에 톡톡 튀는 위트가 일품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자라날 딸을 위해 엄마의 좌충우돌 한국 적응기를 남기기로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글쓰기를 하지 않았던 저자에게 '한국어'로 글을 쓰는 건 만만치 않은 도전 과제였다.

    이에 글쓰기 선생님까지 찾아가 조언을 들은 저자는 출산을 4개월 앞두고 부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태교 삼아 틈틈이 낙서 수준으로 기록했던 것들이 그럴싸한 '글'로 정리되자, 저자는 습작들을 모아 몇몇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저자의 글을 눈여겨 본 기파랑에서 연락이 갔다. 계약을 맺은 뒤에도 원고를 '한국말답게' 다듬느라 끙끙대고 있을 때 기파랑 김세중 편집위원이 단어장 아이디어를 주며 큰 도움을 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끝나는 액자식 구성‥ 절절한 '사부곡'


    고수의 손을 거친 책답게 구성과 내용이 알차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족 부모들의 교육열이나, 한국 정착 과정에서 문화 차이로 인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소동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한국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패러글라이딩이나 스킨스쿠버 다이빙 등 짜릿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도처를 여행다니는 재미난 일화들도 가득하다.

    이 책은 저자의 아버지로 시작해 아버지로 끝난다. 저자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돈 벌러 한국에 와 있던 아버지가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을 다 갖고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사연으로 시작한 저자의 이야기는 한국으로 들어와 어렵게 직장을 잡고 남편과 결혼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타향살이 8년차, 어느새 한국에서 사는 '맛'을 알아갈 무렵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는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으로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힘겨운 '한국살이'를 시작한 저자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빠 덕분에' 한국에 오게 됐고, 인생의 반쪽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빠의 손녀딸을 키우며 살게 됐다고 말한다.

    더 이상 혼자서 외로움과 싸우지 않고, 이 땅에서 인륜을 맺고 또 다른 천륜을 만들고 살아가는 중이라는 저자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책의 곳곳을 수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