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김용발 전 기자가 말하는 故김성환 화백… 6.25 '종군화가' 활동, 국가사회공헌자묘역으로 이장
  • ▲ '고바우 영감'을 그린 故 김성환 화백. ⓒ연합뉴스
    ▲ '고바우 영감'을 그린 故 김성환 화백. ⓒ연합뉴스
    "나는 매일 고바우를 보면서 남 몰래 웃는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위안의 웃음이요, 자책의 비웃음이며 더러는 저항의 웃음이기도 하다."

    언론인(전 조선일보 주필)이자 소설가인 선우휘는 생전에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이렇게 평했다. 고바우의 풍부한 유머와 신랄한 풍자, 통쾌한 비판이 '격변기'를 지나던 우리 국민의 애환을 달래고 대변했다는 말이다.

    '고바우 영감'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민군을 피해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던 한 '소년 만화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당시 참담한 세상을 변화시킬 만화를 구상하던 김성환 화백은 습작으로 그린 캐릭터 200여 개 중에서 뾰족하게 솟은 머리칼 한 올에 안경을 쓴 고바우 영감을 주인공으로 골랐다. '고바우'는 높은 바위처럼 어떠한 탄압에도 흔들림 없이 할 말은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말이라고 한다.
  • ▲ 김용발 전 조선일보 기자의 자택에 전시된 김성환 화백의 작품들. ⓒ이기륭 기자
    ▲ 김용발 전 조선일보 기자의 자택에 전시된 김성환 화백의 작품들. ⓒ이기륭 기자
    1950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사병만화'와 서울에서 창간된 주간 '만화신보'에 처음 등장한 '고바우 영감'은 1955년 2월1일 동아일보 연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를 거쳐 45년간 총 1만4139회 연재하는 신기록을 남겼다. '고바우 영감'은 단일 만화로는 국내 최장수 시사만화로 인정돼 2001년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

    미국 만화 '블론디(Blondie)'는 1930년부터 지금까지 신문에 연재되나, 칙 영(Chic Young)·딘 영(Dean Young) 부자가 이어 그린다는 점에서 45년간 혼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한 김 화백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김 화백이 조선일보로 둥지를 옮긴 1980년부터 지난해 작고할 때까지 40년간 그의 곁을 지켜온 김용발(75) 전 조선일보 기자는 "신군부 시절에는 군의 검열이 엄격해 2~3일에 한 번 꼴로 게재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꿋꿋이 연재를 이어왔다는 점에서 의지력과 자존심이 대단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선배가 80년에 조선일보로 건너왔는데, 작업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편집국에 자리잡고 있어 마주칠 기회가 많았죠. 약주를 많이 좋아하셔서 서로 술잔을 기울이다 금세 친해졌어요."
  • ▲ 김용발 전 조선일보 기자. ⓒ이기륭 기자
    ▲ 김용발 전 조선일보 기자. ⓒ이기륭 기자
    김 전 기자는 "사람들은 김 선배를 그저 만화가로만 알지만, 사실 그는 독특한 화풍을 지닌 뛰어난 화가였다"며 "매일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도 풍경화·인물화·초충도(草蟲圖)·민화·십장생도(十長生圖) 등 다양한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전 기자의 집에는 생전 김 화백이 선물로 준 갖가지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제일 아끼는 작품은 한 폭의 그림에 수십 명의 인물과 수십 마리의 동물, 수십 그루의 나무가 등장하는 '농촌마을'이라는 그림이다.

    한 농부가 삽을 들고 소를 몰며 다리를 건너고, 다리 옆 개울가에서는 부인들이 빨래에 열중한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그 옆에서는 소녀들이 줄넘기를 한다. 외양간의 소와, 마당에서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닭도 보인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 6개월이 걸렸대요. 그림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이런 그림은 절대 그릴 수 없다고 봐요. 김 선배의 그림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전문가들은 호당 500만원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달리는 기차의 화물칸 위에 수백 명의 피난민이 빼곡히 탄 '1.4후퇴'라는 그림이 25년 전 1억원에 팔렸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 ▲ 김성환 화백이 그린 '농촌마을'을 소개하고 있는 김용발 전 기자. ⓒ이기륭 기자
    ▲ 김성환 화백이 그린 '농촌마을'을 소개하고 있는 김용발 전 기자. ⓒ이기륭 기자
    김 전 기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김 선배의 또 다른 이력 중 하나는 그가 6·25전쟁 때 '종군화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김 화백은 1949년 6월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경복중학교 5학년(지금의 고교 2학년) 재학 시절 18세의 어린 나이에 만화가가 된 그는 '만화뉴스' '화랑' '만화신문' 등에 만화를 게재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9·28수복 후엔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면서 계몽 포스터와 주간 만화지를 제작했다. 1951년에는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육군화보' 편집을 맡으면서 '만화신보'까지 제작했다.

    당시 그는 전쟁의 참상을 110점이나 그렸는데, 이들 그림은 2007년 '조선전쟁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일본 교토국제만화박물관에 전시됐다. 국내에서는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동일한 작품들이 전시된 적이 있다. 김 화백의 6·25전쟁 그림 가운데 26점은 수원시 인계동 예술공원에서 상설전시 중이다. 동명의 도록(圖錄)은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만 출판됐다.

    "개성역을 폭격하는 제트기와 식량을 구하러 시골로 향하는 시민들, 군복에 소총을 든 청년, 이름 모를 주검들, 공산군 탱크의 진입 등 소름끼치도록 잔인했던 사실들이 그대로 담겼어요. 이런 작품들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준다면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겁니다."
  • ▲ 김용발 전 기자가 보유 중인 '조선전쟁 스케치' 도록. ⓒ이기륭 기자
    ▲ 김용발 전 기자가 보유 중인 '조선전쟁 스케치' 도록. ⓒ이기륭 기자
    김 화백은 6·25전쟁 당시 육군 정훈국 소속 종군기자이자 화가로 활동하며 각종 삐라와 포스터를 그려 국군의 사기를 고무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일평생 자신을 위해 남에게 부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던 김 화백은 이러한 공적을 외부에 알리지 않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 전 기자와 박기병 대한언론인회장 등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김 화백은 2014년 국가유공자로 서훈됐다.

    "알고 보니 김 선배는 경복중학교 5학년 때 이미 종군기록이 인정돼 1953년 3월26일 보병 제185부대장 이형근 준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사실도 있더라고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박기병 회장이 국방부 대변인에게 연락하고, 저와 허금자 여사는 부랴부랴 보훈처에 서류를 제출해 불과 한 달 만에 국가유공가가 되셨어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죠."

    지난해 말 김 화백이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것도 김 전 기자와 권영섭 한국원로만화가협회장, 김 화백의 유족 등이 합심해 훈장 추서를 정부에 요청한 결과였다. 지난해 9월8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김 화백은 당초 용인공원묘지에 안장했으나 뒤늦게 문화훈장 중 최고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면서 지난 7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으로 이장했다. 이 묘역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민복기 전 대법원장, 남덕우 전 국무총리, 노신영 전 국무총리, 손기정 마라토너 등 국가사회에 공헌한 각계인사 40여 명이 안장됐다.

    "남은 소원은 선배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보전할 수 있는 단독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이에요. 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조선전쟁 스케치' 전작을 다시 한번 국내에서 전시했으면 좋겠어요. 이들 그림이 과거의 실상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지만, 선배에게 늦게나마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 같아요."

    개성 출신인 김 화백은 경복고와 경희대 국문학과를 나와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4컷짜리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국내 만화 연재기록을 보유 중이다. 동아대상(1973), 소파상(1974), 서울언론인클럽 신문만화상(1988), 언론학회 언론상(1990), 한국만화문화상(1997년), 보관문화훈장(2002년) 금관문화훈장(2019년) 등을 수상했다. 고인이 전액 출연한 기금으로 2001년 '고바우 만화상'이 제정됐다. '고바우 영감'은 원화의 학술적 가치가 인정돼 2013년 근대 만화 최초로 '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 ▲ 김용발 전 기자가 보유 중인 '조선전쟁 스케치' 도록. ⓒ이기륭 기자
    ▲ 김용발 전 기자가 보유 중인 '조선전쟁 스케치' 도록.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