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지원 끊길까봐 '타의로' 광복군 합류… 국군창설 기여도 미약… 美 훈련서도 배제돼
  • ▲ 美·김구 ‘한반도 침투작전’ 회의 - 1945년 8월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침투 작전 회의 후, 김구 주석과 미 전략정보국 도너번 장군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두 사람 가운데 이범석(흰옷) 광복군 제2지대장. ⓒ국사편찬위원회
    ▲ 美·김구 ‘한반도 침투작전’ 회의 - 1945년 8월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침투 작전 회의 후, 김구 주석과 미 전략정보국 도너번 장군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두 사람 가운데 이범석(흰옷) 광복군 제2지대장. ⓒ국사편찬위원회
    약산 김원봉의 역사적 평가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국군과 한·미 동맹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묘사해 논란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5가지 근거를 조선일보 등 언론이 제기했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중국 장제스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중국 호북성 한구에서 창설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다. 김원봉 본인이 조선의용대의 대장이 됐다. 그러나 중일전쟁 와중에 1940년 분열되는 위기를 겪는다. 김원봉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최창익이 김원봉과 국민당의 허가없이 병력을 이끌고 무단으로 이탈해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와 연계하여 활동했다.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른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이후 활동 궤적은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한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적 인식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① 자진해서 광복군 합류? 재정지원 끊길까봐 뒤늦게 합류

    김원봉은 자의에 의해 광복군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1942년 여름,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 전까지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줄곧 비판하며 거리를 둬 왔다. 1930년대 말 중국 장제스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와의 항일 합작을 종용받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임정으로 단일화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마음을 바꿨다. 게다가 1941년 6월 조선의용대 병력 대다수를 차지했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넘어갔다. 김원봉이 남은 병력 약 100명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타의에 의한 선택이었다.

    ② 독립운동 역량 집결? 광복군 편입 후에도 주류와 못섞여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그러나 편입된 뒤에도 광복군 주류와 섞이지 못했다. 병력도 줄어들어 해방 직전 50여명이었던 제1지대의 규모는, 200여 명이었던 제2지대, 300여명이던 제3지대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미국은 조선의용대 출신을 신뢰하지도 않았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③ 한미동맹의 토대? 美의 한반도 침투훈련 때도 배제돼 

    미국 OSS(전략정보국)는 1945년 5월 한반도 침투 특수훈련을 실시한다. 이 때 대상자들은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서 선발됐다. 미군은 작전 논의 과정에서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범석 제2지대장과 머리를 맞댔다. 김원봉이 속한 1지대는 배제됐다.

    ④ 국군 창설의 뿌리? 국군 창설은 광복군 2지대-3지대 중심으로 이뤄져

    또한 제1지대 출신에는 국군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광복군도 제2지대와 제3지대 출신들이 국군 창설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역사적 정설이다. 특히 제2지대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단결해 환국 후 우파 청년운동을 벌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적극 참여했다. 이범석이 대한민국 초대 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대거 입교해 훗날 국군의 중추가 됐다. 

    문 대통령은 6일 추념사에서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 발언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지만, 서두에 김원봉을 거론하며 연결 지은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광복군에 뒤늦게 가담해 별 역할도 없었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부각시키는 것을 지청천과 이범석 등 광복군 핵심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⑤ 노덕술에 뺨 맞아서 월북? 자발적으로 월북했을 것 

    이 밖에도 여권에선 김원봉이 1948년 월북한 이유에 대해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10일 "약산 김원봉의 경우 영화 암살을 통해서도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고, 친일고문경찰 노덕술에게 뺨 맞고 북한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면서 김원봉 선생에 대한 평가들이 달라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대변인도 지난 6일 동일한 주장을 폈다. 

    그러나 김원봉과 노덕술 관련 일화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논란이 있다. 해당 일화가 처음 등장한 건 1987년 <월간경향>에 수록된 '증언록' 기사를 통해서인데, 일각에선 증언의 진위를 의심하고 있다. 

    심용환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지난 7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여러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노덕술한테 직접 고문을 받았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며 "다만 여러 회고를 보고 상황을 봤을 때 친일파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다는 것 정도만 우리가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김원봉이 자발적으로 월북했다는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도 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인 1953년 주한 유엔 유격군이 작성한 첩보 보고서에는 "김원봉이 스스로를 좌파로 인식했고, 북한 초대 수반으로 인척인 김두봉과의 관계 때문에 월북했다"고 적혀 있다. 김원봉은 월북 이후 국가검열상에 올랐고, 6.25전쟁 직후에는 '남반부 해방 지역 인민위원회 중앙선거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