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남북군사합의서 따른 관행 의도적으로 무시…韓정부·언론 비판도 없어
  • ▲ 북한 노동당 중앙청사 1층 로비의 포토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함께 찍은 사진을 노동신문이 9월 19일 3면에 소개했다. 북한측이 찍은 사진에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로 노동당 마크와 한반도 지도가 보인다. 2주전 남측 고위급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에는 포토존에 한반도 지도가 없었다. @ 뉴데일리DB
    ▲ 북한 노동당 중앙청사 1층 로비의 포토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함께 찍은 사진을 노동신문이 9월 19일 3면에 소개했다. 북한측이 찍은 사진에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로 노동당 마크와 한반도 지도가 보인다. 2주전 남측 고위급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에는 포토존에 한반도 지도가 없었다. @ 뉴데일리DB
    리선권 北조국통일위원장이 지난 10월 한국 기업 총수와 통일부 장관 등에게 막말을 한 사실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언론들은 리선권을 비판했다. 태영호 前영국 대사관 공사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데 한국 언론이 조용하다”고 주장했다.

    태영호 前공사는 지난 7일 서울 모처에서 가진 강연에서 “리선권의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막말을 놓고 한국 사회와 정치권이 북한을 연일 비난하는데 이는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리선권이 막말을 했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지도 위에 겹친 북한 노동당 문장

    그가 지적한 문제는 지난 9월 19일 北‘노동신문’ 2면에 실린 사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찍은 사진은 노동당 청사 홀을 배경으로 했다. 여기에 보면 두 사람 뒤로 한반도 지도 위에 노동당 문장(紋章)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소개하는 대로 사진을 찍었을 터. 한국 공동취재단이 찍은 사진에는 한반도와 노동당 문장이 가려져 있어 국내에서는 문제가 안 된 것 같다고 태영호 前공사는 지적했다.

    태 前공사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사진을 찍을 때 보인 노란색 한반도 그림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평양을 찾았을 때는 없었다고 한다. 한국 특사단이 다녀간 뒤 2주 사이에 이를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남북 정상이 사진을 찍은 배경을 두고 “남한 사람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지만 북한 측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뒤의 한반도 그림 위에 노동당 문장을 겹치게 만든 것은 선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는 행사 때마다 당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대규모 거리 집회를 했다”며 “북한 또한 나치처럼 수천 명의 청년들이 커다란 노동당 깃발을 세워 들고 군중집회를 자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태 前공사는 “나치나 북한 같은 독재국가에서 집권당의 깃발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우리 당에 반항하지 말라’, ‘우리야말로 유일한 통치자’라는 경고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며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정권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집권 정당의 상징을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깃발 들고 군중집회 하는 것 봤냐”

  • ▲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9월 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로 이동하는 길옆에 북한 인공기가 나붓기고 있다. @ 뉴시스
    ▲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9월 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로 이동하는 길옆에 북한 인공기가 나붓기고 있다. @ 뉴시스

    강연을 듣던 젊은이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태 前공사는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당이 자기 당 깃발을 들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노동당 문장 아래 한국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이 서서 사진을 찍어 주민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북한 주민들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라고 설명하며 “이 대목을 간과하는 남한 언론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태 前공사는 “통일을 하겠다는 한국이 북한의 속성을 너무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그는 김정은이 올해 초 한국 특사단을 만수대 의사당(한국의 국회에 해당)이 아니라 북한 최고 수뇌부인 평양 노동당 중앙청사로 불러들인 것 또한 숨은 뜻이 있다고 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가 다스리는 체제다. 때문에 외빈이 방문하면 만수대 의사당에서 영접을 한다. 과거 김정일이 故김대중 前대통령, 故노무현 前대통령을 맞이했던 곳도 만수대 의사당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한국 특사단과 문재인 대통령을 노동당 중앙청사로 불러 그 상징 앞에서 사진을 찍도록 유도했다. 북한 주민들 눈에는 이것이 한국 대통령이 북한의 ‘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설명이다. 

    이런 점을 따져보면 리선권의 ‘냉면 막말’이나 ‘시계 막말’은 오히려 덜한 문제라는 게 태 前공사의 주장이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의 의전 또한 김정일 때와 달리 한국을 의도적으로 깔아뭉갠 것이라고 풀이했다. 

    북한이 무시한 남북 합의서... 한국만 지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남북 양측은 ‘특수상황’으로 규정하고 서로 국가로 인식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때문에 1991년 이후 남과 북은 일반적인 회담 때는 물론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 때도 양측이 국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평양에서의 환영 행사 때도 한반도기를 내걸지언정 인공기를 내걸지 않았다. 최근 청와대가 9.19 남북공동선언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면서 “북한은 우리와 특수 관계지 국가가 아니다”라며 “국회 비준은 필요없다”고 주장한 것도 사실 남북기본합의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 남북기본합의서를 김정은이 무시했다. 한국은 지난 4월 17일 판문점 정상회담 때 태극기를 내걸지 않았다. 반면 지난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곳곳에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동원한 군중들 손에도 인공기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태극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김정은이 남북 간의 약속을 내팽개친 단서라는 게 태 前공사의 주장이다.

    태 前공사는 “북한의 남북기본합의서 위반, 노동당 문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 촬영 등에 대해 한국 정부가 당연히 따졌어야 하고, 한국 언론도 이 문제를 지적해야 했음에도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며 한국 정부와 언론이 북한의 실상에 무지하다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