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주의 원칙을 지켜야 나라를 살릴 수 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대한언론인회에서 발행하는 ‘대한언론’ 2월 9일자 특별기고를 통해 현 시국을 ‘한국 민주주의와 정체성의 위기 국면’이라며 이같이 처방했다.

    송 교수는 기고를 통해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 사회주의의 3대 혈맥으로 이뤄져있다”고 분석하고 “현 상황은 민주화 혈맥과 연계한 사회주의 혈맥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고 정권타도에 혈안이 돼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또 "사회주의 혈맥에서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국가이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성공’은 그들이 가장 경악하면서 질시하고 가장 외면하고 싶으면서 두려워하는 대상"이라며 "사회주의 혈맥은 친북을 넘어 종복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송 교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선 산업화 혈맥이 ‘혈맥’을 공고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험주의 점진주의 실용주의 도덕주의의 보수 원칙을 지켜 나라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송복 명예교수의 특별기고 전문이다.

    우리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우리 ‘혈통의 맥’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한민족’이라는 말이 이 ‘혈통의 맥’을 상징하고, 그것도 거의 순혈에 가까운 맥(脈)과 한 번도 단절이 없었던 면면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측면에서다.

    사회학적으로는 지금 우리는 세 개의 ‘혈통의 맥’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혈맥’이라고 줄여서 쓰는 이 혈통의 맥은 순전히 생물학적 용어이지만, 사회학적으로도 생물학적 차이만큼 사고와 행동이 확연히 차이 지어진 사람들을 가리킬 때 똑 같이 쓰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사고방식과 행위유형을 달리할 때 “저 사람은 우리와 혈통이 다르다” 혹은 “혈맥이 다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영어에서도 린이지(lineage)라 해서 생물이든 사회든 그 계보를 나눌 때 혈맥이라는 말과 다름없이 쓰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현재 우리는 갖고 있는 3개의 ‘혈맥’은 ‘산업화 혈맥’ ‘민주화 혈맥’ 그리고 ‘사회주의 혈맥’이다. 역사적으로는 사회주의 혈맥이 가장 오래 되고, 그 다음이 민주화 혈맥, 그리고 산업화 혈맥의 순이다. 시기상으로는 사회주의 혈맥은 1920년대에 시작되고, 민주화 혈맥은 1950년대, 그리고 산업화 혈맥은 1960년대 이후에 와서 형성된다. 이 3개의 혈맥은 그 혈맥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시점과 시대적 상황의 차이만큼 그들이 갖는 사회적 기대와 가치가 다르고, 사회적 요구와 주장이 대립되고, 그리고 사고방식 행위유형에 크나 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세대가 여러 번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고, 그 바뀜이 비교할 수없이 가파르게 진행돼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사회가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사회변동을 수없이 치르면서도 달라짐이 없다. 권위주의시대라고 하는 80년대 이전과 소위 민주화시대라고 하는90년대 이후를 한번 비교해 보라. 그 90년대와 세계화시대라고 하는 2000년대를 또 한 번 비교해 보라. 우리 사회가 현재 갖고 있는 이 세 혈맥의 차이는 마치 역사와 사회변동에 아랑곳없이 계속되는 생물학적 ‘차이의 지속’을 상정해도 좋을 만큼 확연하지 않은가. 오히려 혈맥 간 차이는 더 커지고 투쟁은 더 격렬해지지 않는가.

    한국 민주주의와 그 정체성은 이 3개의 혈맥을 면밀히 짚어 봄으로써 그 혼돈과 위기, 그 안정과 지속을 내다볼 수 있다. 더구나 ‘보수’와 ‘진보’로 잘못 유형화되고 있는 현재의 정치세력 간 구분도 이 세 개를 분석함으로써만이 그 같은 유형화가 얼마나 허구이며 왜곡된 것인가도 알 수 있다.

    첫째로 ‘산업화 혈맥’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산업화를 성공시킴으로써 자동적으로 국가발전의 주역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 가난했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무역대국으로 만들었다는 엄청난 자부심과 함께, 명실공히 지난 40년간 한국사회의 주류적 지위를 형성해 온 세력들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생겨난 140개 신생국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이다. 더구나 지난 48년 8월 15일 이후의 60년사는 북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건국혁명’의 역사라고 깊이 인식하고 있다. 이들 세력을 굳이 ‘산업화혈맥’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훼손될 수없는 ‘가치의 대상’으로 확신된다는 점에서다. 그들을 보수라고 하고 또 우파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째로 ‘민주화 혈맥’은 50년대는 자유당 정권에, 60년 이후 80년대 후반까지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항해서 민주주의를 절규하고 성취하려고 했던 세력들이다. 5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은 선거를 제대로 치르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었고, 60년대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대통령을 국민이 손수 선출하는‘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항집단들이 ‘혈맥’처럼 서로 피가 흐르고 의기가 합쳐져서 소위 말하는 ‘민주화 혈맥’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민주화 혈맥의 특징은‘산업화 혈맥’과 달리, 오랜 투쟁경력과 강인한 투쟁성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나, 정권 장악 후의 정책실현 과정에서 다 같이 주도적이 못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모두‘하이브리드 정권’(hybrid regime)이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은 ‘반(半)민주화 혈맥’ ‘반(半)산업화 혈맥’의 혼합정권이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반민주화 혈맥’ ‘반사회주의 혈맥’의 혼합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정권 내에서 독립적이지도 못했고 주도적이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해서도 어정쩡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부정부패가 판치는 ‘실패의 나라’이기도 했고, 산업화도 민주화도 함께 달성한 ‘성공의 나라’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역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마치 일본의‘국화와칼’처럼 한편으로는 이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나 역시’라는 반대성향이 늘 있었다. 따라서 민주화 혈맥은 일부만 보수 우파였고, 나머지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향하면서, 사실상 지금은 명맥이 꺼져가는 상태다. 그 명맥의 단절 내지 소멸은 지난 10년 내내 피치를 올리다, 마침내 한국 정치사상 보기 드문 압승을 상대 정당에 안겨줌으로써 민주화 혈맥도 지금 거의 최후를 맞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혈맥’은 일제시대인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실천운동이 그 시기에 이미 전국적으로 전파되었고, 이 실천운동의 전위조직인 공산당이 결성된 것도 1925년이었다. 일제가 이 사회주의 전위조직을 검거한 후 밝힌 이들의 출신지별 신원을 보면(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발표 1931년) 전라도와 경상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검거자 525명 중 전라도가 141명으로 27%, 경상도가 113명으로 22%로 거의 50%에 달하고, 나머지는 평안도 31명 경성 29명 충청도 27명, 그보다 좀 많은 숫자로는 함경도 77명이 고작이었다. 그 이후 2차 검거에서도 호남과 영남의 숫자는 줄어들기는 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들의 사상적 전통과 맥이라는 것이다. 영남의 경우 6·25 당시 북한군의 유일한 비점령 지구로서, 전쟁을 통해 남로당을 포함 사회주의자가 거의 소탕되고, 거기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수혜와 정치적 수권을 통해 사회주의 혈맥이 형성되는 입지가 거의 완전 상실됐다. 그에 비해 호남은영남과는 정반대로 북한군 점령지역으로서 사상적 연계의 영역이 넓혀졌고, 또 영남과는 달리 경제적 정치적 수혜와 수권에서 소외되고, 아울러 피해가 컸던 광주사태까지 겹침으로써 어느 지역보다 일제시대 이래의 사회주의전통과 그 맥이 강하게 이어지고 작동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대학사회에서도 사회주의의 맥은 늘 뻗어 있었고, 사회주의 열정은 간단없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이 그 문학적 가치와 수준에 아랑곳없이 그렇게 많이 읽히고,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이 학자로서의 양심과 양식에 너무나 동떨어졌어도 그 시대의 독자를 휘어잡았던 이유를 역시 이에서 보아야 한다. 아직도 잔존해 있는 NL계니 PD계니 하는 것, 대학의 한총련이라는 것, 이는 모두 80년대 이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일제시대의 그것에 닿는다. 초·중·고교의 교사노동자 그룹인 전교조, 386운동권,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격렬히 반대하는 범민련과 미군철수의 범대위, 양심수 석방의 공대위 그리고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만들어진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광화문 촛불시위 주도의 국민연대, 이들은 모두 이념대결의 전위대들로 그 뿌리는 당사자들이 알게 모르게 명시적 묵시적으로 모두 일제시대의 그 사회주의의 맥에 박혀 있다.

    더구나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는 6·15학원 6·15TV 도서출판 6·15, 그 위에 한국민권연구소 등 수 많은 부설단체를 가지고노무현 정부 때는 행자부에서 공익사업 단체로 지정되어서 국민 세금으로 지급되는 6,000만원의 정부지원금도 받았다. 작년 10월 검찰이 이들을 수사해서 발표한 것을 보면 이들은 모두 주사파들로, “우리는 장군님의 전사/ 미제가 제 아무리 날뛴다 하여도/ 우리의 귓전에는 만세소리 들린다”라는 김일성 김정일부자 찬양노래와 충성서약서를 제작하고, “김정일 장군님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정풍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 또한 그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그들 행동의 외연은일제시대의 그 사상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들의 내포는 그 사상적 지침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 같은 사회주의사상 전통이 한 ‘혈맥’으로 굳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혈맥과 연계하면서다. 자의든 타의든 민주화 세력은 그들 운동의 우군으로 이들 사회주의 세력과 한 덩어리가 됐고, 이들 사회주의 세력은 민주화 세력에 기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 세력 확장의 도구로 민주화 세력을 이용했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선 누가 민주화 세력이고 누가 사회주의 세력인지구분이 갈 수 없도록 그들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김대중 ‘하이브리드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분리돼 그들만으로 충분한‘혈맥’을 형성하고 한 ‘혈맥’으로서 존재가치를 드러냈다.

    민주화 혈맥이 완전히 쇠퇴한 지금이 사회주의 혈맥은 70~80년대 기운찼던 민주화 혈맥의 그 위치로 부상해서 민주화 혈맥을 제치고 산업화 혈맥과 격렬히 싸우고 있다. 쇠고기 파동이후 야당인 민주당이 조계사에 숨어있던 촛불시위의 주도자들(사회주의혈맥의 전위대나 다름없는 실천연대)을 찾아가서 국회 등원에 대한 이해를읍소한 것이 민주당 내에서 민주화 혈맥과 사회주의 혈맥의 위치가 이미 전도되었음을 명백히 증명해 주는 사례다.

    얼마 전 한 민주당 의원이 말한 ‘매국노’ 발언도 이 같은 위치전도의 한 표시라 할 수 있다. 북한동포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북으로 고무풍선을 띄워 보내는 탈북연대 등을 가리켜 ‘매국노’라고 한 것을 우리 국민이면 누구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북쪽 동포인권운동에 정말 ‘매국노’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에게‘매국노’는 일제에 빌붙어서 나라를 판 사람들이다. 인권운동가가 그 매국노와 같은 위치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인가.인식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같은 용어를 쉽게 쓸 수 있는가. 이 또한 사회주의 혈맥이 이미 그들 당내에 위치를 굳혔다는 증좌일 수밖에 없다.

    일제시대 이래의 오랜 사상적 전통과, 줄기차게 민주화운동을 벌인 민주화 혈맥이라는 존재와, 그리고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이 세 개의 중첩적 보상 위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 혈맥은 이제 지난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하이브리드 정권’을 거치면서 다져지고 드세어진 힘을 바탕으로 이명박 정권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다. 물론 산업화 혈맥을 타도하기 위해서다.

    지난 1년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돌아보라, 그것은 얼마나 많은 ‘해방구’가 등장 했느냐 에서 알 수 있다. 촛불시위 때 광화문이 몇 개월 동안이나 해방구가 되었던 것,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방송이 해방구가 되고, 드디어는 의사당이 해방구가 되지 않았는가. 심지어 국무총리 산하의 한 위원회가 대법원 확정 판결도 거부해버리는,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어정쩡했던 민주화 혈맥과 달리 그들은 처음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정체성을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대통령으로 보지 않고 분단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을 산업화 대통령으로 생각지 않고 독재자로 폄하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국가이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성공’은 그들이 가장 경악하면서 질시하고 가장 외면하고 싶으면서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질시하고 두려워하는 것만큼 이들 사회주의 혈맥은 친북을 넘어 종복으로 나아갈 것이고, 반미와 한미 FTA, 세계화의 저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고 대한민국 흠집 내기와 훼손시킬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것이고 어떻게 하든 이명박 정부를 ‘실패한 정부’로 만드는데 갖은 획책을 강구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해방구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민주화 혈맥이 시들고 사회주의 혈맥이 한층 공고화된 지금, 그 위기국면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공고화된 사회주의 혈맥과 대치되는 상황은 그야말로 보수 대 좌파의 대결이다. 보수 대 진보 혹은 보수 대 혁신은 가치를 공유하는 정파들끼리만 사용하는 말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와 실정법체계, 대한민국이 토대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같이 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정책적 지향을 말할 때 보수 대 진보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 프랑스의 공화파와 사회당,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력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력 간에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보수 대 좌파의 대결이다. 사회주의혈맥이 야당인 민주당과 민노당의 주류가 되어 있는 한 오늘의 정치상황은보수 대 좌파의 대결이다. 이 대결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키고 정체성을 어떻게 강화해 나갈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산업화 혈맥이 ‘혈맥’을 공고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화 혈맥이 원래 보수주의가 갖는 보수주의 원칙으로 철저히 귀환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생성할 때부터네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경험주의다. 경험은 머리속에서 냉철한 이성으로 생각해낸 지성·지식과는 다르다. 경험주의는 실제로 경험해서 얻어낸 사실과 지식,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쌓은 지혜와 경륜을 가장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방식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시기다. “지자선모 불여당시(智者善謀不如當時)”라는 표어가 경험주의 핵심이다. 아무리 좋은 지식으로 좋은 계책을 짜내도 시기를 맞추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의미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경쟁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다. 금산분리완화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미디어법은 이 시기에 가장 맞는, 가장 요구되는 법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대에 맞게 고쳐야 보수주의자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된다.

    점진주의다. 보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차이는 전자는 점진적, 후자는 급진적이라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는 절대로 서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의 표어는 slow and steady다. 느리게 서서히 하면서 확실히 하고 그리고 시기에 꼭 맞추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의 경험법칙은‘서둘면 진다’이다. 역사적으로 보수주의가 주류이고, 보수주의자에게 이긴 사회주의자는 없다. 설혹 먼저 이겨도 나중에는 진다. 느릿느릿하면서 확실히 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갖가지 좌파정책의 못을 하루아침에 다 뽑으려 해서는 안 된다.

    국회도 의장 직권으로 의안을 상정해서, 또 다수의 힘으로 해서 그 많은 법안을 단번에 다 통과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점진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소수라고 힘이 적은 것이 아니다. 소수일수록 사회주의 좌파는 사생결단하는 강성 강기가 있다. 그 강성 강기를 점진적 전략으로 힘을 서서히 빼내야 한다. 그것이 보수주의자들의 경험이다. 실용주의다. 투입(input)보다 산출(output)이 많은 것이 실용주의다. 아무리 계책이 좋아도 산출이 적으면 실현성이 없다.

    설혹 비용이 많이 들어도 생산성이 높으면 실질이 있다. 실용주의는 실질성이고 생산성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실용주의는 아니다. 편안함과 편리함이라는 가시적인 생활효과가 있어야 한다. 역시 이것만이 실용주의는 아니다. 그런 가시적인 물질주의를 넘어 고객의 정신적 심리적 만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화다. 문화는 꿈과 낭만과 즐거움이다. 실용주의는 이들 모두이다. 물질과 정신에 함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4대강 정비는 실용주의다. 그러나 운하는 실용적이 되기 어렵다. 4대강은 이미 있는 자연이고 그 정비는‘친자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주의다. 우리에게 가장 잘못된 인식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탐욕적이고, 사회주의자는 청렴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의 그릇된 선동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회주의 국가에든 가 보라. 부패하지 않는 지도자가 있는가. 대다수 보수주의자들을 보라. 탐욕적인 사람이 있는가. 보수주의자의 가장 큰 덕목은 정직과 성실이다. 그리고 정직과 성실에서 오는 도덕성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제도다. 그 이윤을 극대화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에 비하면 훨씬 투명하고 바르다.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도 대다수는 투명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성실하다. 소수 몇몇 사람 때문에 모두가 그런 것으로 착각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자기 보전책이 부족해서이다. 다른 나라 보수주의자처럼 우리 보수주의자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늘 유념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로 보수주의자 산업화 혈맥은 좌파 사회주의 혈맥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그 하나는 체제유지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다.

    아무리 대한민국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이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할 수는 없다. 곳곳에 해방구를 만들어도 그 해방구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내부의 적이다.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과는 다르다. 외부의 적은 내부에 힘이 있는 한 물리칠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은 내부에 아무리 힘이 있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없애면 또 생겨난다. 생길 때마다 없애려고 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소위 말하는 체제유지비용 내지 사회통제비용(social control cost)의 급격한 증가다. 따라서 체제전복 체제파괴의 위협이 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용납하는 것이 더 체제유지적이 된다.

    다음 하나는 체제지속의 경고를 높이기 위해서다. 내부의 적이든 외부의적이든 적은 나를 경고한다. 적이 있으므로 나는 늘 경계한다. 적이 있으므로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그리고나를 성장시키고 경쟁력을 키운다. 마르코스주의가 있어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만큼 자신을 경계하고 경쟁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북한이 있어 대한민국은 위대한 ‘건국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의 끊이지 않는 위협이 있어서 대한민국은 성취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공업 건설과 산업화 성공은 북의 김일성과 남의 민주화 세력의 도발 도전이 있어 더욱 가능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의 글에 “적존멸화적거초과(敵存滅禍敵去招過)”라는 말이 있다. 적이 있음으로써 망하는 화를 없앨 수 있고, 적이 사라짐으로써 망하는 과오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세월이 가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사회주의 혈맥이여, 민주화 혈맥이여, 시들지 말고 계속 생생하라. 그래야 보수주의자가 경계를 낮추지 않고, 그래야 또한 대한민국은 영원히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