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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랑회 / 연구발표회: 한국여성들의 독립운동>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1909~1945>
이덕희 /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국가보훈처의 자료에 의하면, 1962년부터 2014년까지
미주지역에서 153명의 독립유공자가 포상되었다.
포상의 훈격으로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으로 7격이 있다.
153명 포상자 중 여성은 단 10명으로, 2명이 애국장, 3명 애족장, 4명 건국포장 (4명), 그리고 1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10명의 여성 중 박신애 (애족장), 심영신 (애족장),
이(권)희경 (건국포장), 전수산 (건국포장) 등 하와이 여성은
4명뿐이다. (괄호 안은 남편의 성姓)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하와이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직접 참가할 수 없었던 한인들이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적 기여와 외교 및 선전활동의 전개이다. 고정휴,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pp. 20-21.1910년 하와이 한인 인구가 미주 대륙 한인 인구보다 약 10배 많았고, 하와이 여성의 수가 미주 대륙 전체 한인 인구보다 훨씬 많았음을 고려하면 (표 1. 참조), 하와이 한인여성 4명만이 포상을 받았다는 것은 초기 이민 여성의 활동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했음을 일러준다.<표 1. 하와이와 미주 본토의 한인 인구, 1910년~1930년>하와이 미주 본토1910: 4,533 (남 3,931; 여 602) 462 (13개 주)1920: 4,940 (남 3,488; 여 1,452) 1,165 (29개 주: 캘리포니아 755)1930: 6,461 (남 3,999; 여 2,462) 1,860
이 논문의 목적은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명단 작성이다. 뒤늦게나마 해방 70주년을 맞아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 논문은 3 장으로 나누어 작성하였다.
제1장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하와이 여성 단체활동에 관한 3개 논문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들의 활동, 1903-1945>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의 국권회복운동 1909-1945> <하와이 한인과 일본인 여성단체 활동비교, 1885-1945>중 특히 첫 2개 논문을 수정·보완하면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단체를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지속해온 활동을 요약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각 단체의 회원, 임원 명단을 첨가하였다. 제2장은 제1장에 밝힌 많은 이름을 여성단체 임원과 일반회원 2 부류로 나누어 최초로 하와이 여성 독립유공자 후보 명단을 작성하였다. 제3장에는 14명 개인에 관한 간단한 자료를 포함하여, 활동한 여성들의 인적 배경을 알리고자 하였다.명단 작성을 위하여 《국민보》,《태평양 잡지》, 《태평양 주보》와 각 단체의 남아있는 회의록을 참조하였다. 《태평양 잡지》와 《태평양 주보》도 결본이 있지만, 《국민보》는 1914년 8월 1일부터 1936년 12월 20일 까지 약 20년간 결본임을 밝힌다.I. 하와이 여성 단체1910년에 하와이에 정착하여 있던 약 600명의 여성들이 한국에서 문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인들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 공부도 하였고 세례도 받았다. 그 중에는 이미 기독교 선교에 앞장을 선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남편을 따라 이민에 동참하는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여성들이었는데, 이들이 이민을 주장하여 오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민 여성들은 도착하면서 곧 남편과 함께 맞벌이 노동을 하였고, 처음 몇 년간의 정착 기간을 지낸 후 1908년을 전후하여 여성들만의 단체를 조직하였다.1910년에서 1924년까지 약 800여명의 두고 온 부인들과 자녀들 또 새 신부들이 도착하여 부녀자 인구가 증가하였다. 가정을 이룬 이들은 자녀들의 출생, 교육과 더불어 농장을 떠나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국이 자주권을 잃었던 이 시기에 이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진한 조국애로 불탔고, 그래서 더더욱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열성을 다했다. 가정을 이루었던 이들 여성들이 조직한 여러 단체의 활동을 살펴본다. -
I-1. 신명부인회1909년 6월 8일자《신한국보》기사에서 (p. 4) 1909년 이전에 한인 여성들의 조직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1909년 2월 19일에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공동회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공개적인 모임을 말함)를 가졌다. 그리고 송병준, 이완용, 일황(日皇) 등에게 전보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기금을 모집하였다. 총 $333.90 (2015년 구매가격 약 $7,700에 해당)을 모금했는데, 기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이 명단에 신명부인회라는 여성단체 이름과, 홍해나, 림메불, 황마리아, 김재순씨 부인 등 여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신명부인회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며 또 정확하게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이전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으나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신한국보』는 1909년 2월 12일자인데, 6월 8일 이전에는 신명부인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지 않다.) 1908년 전후라고 추측할 수 있다. 1908년 5월 2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명 부인들이 한글교육과 교회 일을 보조한다는 목적으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는데, 인구수가 훨씬 컸던 하와이의 신명부인회가 좀 더 일찍 조직되었고 이 대한부인회의 본보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다른 섬에 여러 지부도 있었던 신명부인회의 조직체계도 단체의 연륜과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909년 12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총 4개월 동안 하와이 한인들이 합심하여 안중근의사 재판경비를 위한 의연금 모집을 진행하였을 때 1,595명이 참여하여 $2,916.85 (2015년 구매가격 약 $67,000에 해당)가 모아졌다.이 안중근 기금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에서 신명부인회가 여러 섬에 지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여러 지부의 신명부인회 회원임을 밝힌 여성의 명단과 일반 여성의 명단을 아래와 같이 작성할 수 있다. 이민 초기 여성들이 본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누구의 부인이라고 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1910년의 신명부인회 회원 중 누구의 부인으로 기록된 경우가 있다. 기록된 남편의 부인 이름을 밝히지 못한 것은 그대로 남편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0년도 중반부터는 여성 대부분이 본인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남편의 성을 사용한 여성도 있다. 본인의 성을 아는 경우에는 본인의 성 옆 ( )안에 남편의 성을 밝혔다.신명부인회 회원 (43명)김관선, 김메레, 김살로메, 김성옥, 김위레스, 김한근, 노맹월, 박에스터,신응문, 유로득, 이관선, 이신실, 이애나, 이진실, 임마리아, 임메리, 조매리, 조윤이, 최마리아, 최정순, 한영우,고분이 모친, 김국경 부인, 김재근 모친, 김재근 부인, 김치경 부인,노맹월 모친, 민승현 부인, 민한옥 부인, 박한용 부인, 백경수 부인,서창순 부인, 안앨나 모친, 오응택 부인, 유성수 부인, 이기영 부인,이경신 부인, 이복기 모친, 이성언 부인, 이 부인, 장원여 부인, 조 부인,함삼여 부인일반 여성 (20명)박메리, 안앨나,김도삼 부인, 김응섭 부인, 김창근 부인, 김창수 부인, 김치운 부인,김친규 모친, 박경오 부인, 박응서 부인, 박자홍 부인, 박씨 부인,송공선 부인, 서달근 부인, 안치길 부인, 안성실 부인, 유진학 부인,이기원 부인, 최정호 부인, 최성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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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2. 부인교육회1909년 4월 27일자『신한국보』에 따르면 4월 16일에 10명의 부인들이 자유교회에 모여 부인의 교육을 목적으로 ‘부인교육회’를 조직하고 신학과 가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자유교회의 선교사(전도사) 신홍균이 이들의 모임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고 보도하였다 (p. 3). 자유교회는 감리교회 전도사 신홍균 (전에 신판석 또는 신반석으로 알려짐)이 감리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고 1909년 3월 23일에 호놀룰루 시내 퀸스 골목 (현 Queen's Hospital의 일부)에 세운 교회이다.신학공부란 성경공부를 뜻하는 것인데, 부인들이 여성교육이라는 취지로 모임을 시작하면서 성경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신문 기사는 부인교육회를 조직한 10명의 부인들이 자유교회 교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한인의 약 30%가 기독교인이었고, 호놀룰루 시내에 거주하는 400여명의 한인 중 기독교인들은 감리교회와 성공회교회에 출석하였다. 성공회교회는 자유교회에서 1마일 (1.6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감리교회는 1 블록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 10명의 부인들이 기존의 감리교회나 성공회교회 교인이었다면, 왜 새로 조직된 자유교회에서 부인교육회 모임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김원용이 기술한 것처럼 신홍균 전도사가 친일파로 알려진 와드맨 감리사로부터 독립하여 이름 그대로 ‘자유’교회를 조직한 것이라면, 10명의 부인들은 신홍균의 독립성에 찬성하여 그의 새 교회와 관계를 갖고자 한 것이거나, 아니면 기존의 교회 교인들 보다는 조금 더 ‘독립심’이 강한 자유교회 교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6월 22일자 『신한국보』는 첫 면 상단 반쪽 전체에 부인교육회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이 세상에 인류로 생겨나서 남녀를 물론하고 상제(하나님)의 자녀 되기는 일반이라. 고유한 권한이 풍부하여 성질총명이 추호도 차별이 없거늘 사업상 능력에 어찌 우열이 있으리요 (중략)여자는 국민의 주모라 (중략) 여자의 자녀를 기르는 공적이 어찌 장부가 세상을 건지는 사업에 사양하리요. 여자 교육은 금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다(중략)황후폐하께서 여권이 오래 타락함을 민휼하시며 국세가 따라 위박함을 통찰하사 특별히 전국에 책조를 환강하시고 여자의 교육을 장려하시니(중략)금일 한국의 여권을 확장함이 어찌 여자사회의 혁명을 주장할 따름이리요(중략)공민의 큰 부분을 차지한 1천만 여자의 속박을 끌러 먼저 국가의 원기를 기르면 이족의 침략을 항거하여 비경에 함락한 국민을 가히 광제할지니(중략)대개 하와이 한인의 진도는 다른 날 한국의 국권을 광복함이 두 어깨에 담부한 책임이라(중략)이제 동지를 결련하여 부인교육회를 조직하니 이는 특별히 남자사회의 세력을다투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여자의 교육을 보통하여 문명의 본원을 발전함이니 (하략) (현대어로 바꿈; 필자 강조)
위의 설립목적에서 볼 수 있듯이 하와이에서의 여성교육운동은 단순히 여성개화운동이 아니었고 조국의 국권을 광복한다는 구국운동의 입장에서 강조되었고 기독교 복음화와 연계되었다. 부인교육회는 안중근 의사 재판경비를 위하여 $10을 기부하였다. 부인교육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계발에 노력하면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에 단체로 참여하였다.
불행하게도, 부인교육회 회원 명단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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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3. 대한부인회1913년 9월 3일자《국민보》(p. 4)에 의하면, 1913년에는 신명부인회와 부인교육회 이외에 적어도 2개 단체가 더 있었고, 다른 섬에도 이들 단체의 지부가 있었다. 하와이의 한인 여성들은 이민 직후부터 사회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3년 4월 19일에 이들 4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결성하였다. 김원용, 앞의 책 , p. 232. 김원용이 대한부인회를 하와이 한인여성들의 첫 조직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오류이다.그 목적은1)자녀의 국어 교육 장려, 2)가정 일용사물의 일화 (일본제품) 배척,3)교회와 사회단체 후원과 4)재난 동포 구제 노력이었다.첫 회장은 황마리아였다. 다섯 달 후인 9월 2일에 회칙(장정)이 완성되어 회의를 열었고 두 가지 활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우선, 실업을 경영하여 재정을 만들어 놓고, 전도를 부지런히 하여 사회를 개량한다는 것이다. 실업 방침으로는 재봉소를 설립하여 남녀의 의복을 지어 팔기로 하였다. 전도사업은 매 주일 1-2명 내지 2-3인이 병인들을 심방하며 또 믿지 않는 동포들을 권유하기로 하였다. 우선 그 자리에서 기금을 모집하였는데 수전위원은 황마리아였다. 전도는 9월 9일 일요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였고 위원은 조부인매륜 (조매륜)과 최부인엘리자베트(최엘리자베트: 남편 최진태가 사망하면서 본인의 성 박을 사용하여 박엘리자베트가 되었다.)이다.
특기할 것은 대한부인회의 활동을 회비만으로 충당하려는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실업을 경영하여 재정을 충당하며 활동을 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태평양잡지》1913년 11월 1일호에 실린 “호항한인부인회”라는 제목의 글에 회원이 70명에 달하였다고 했는데, 명단은 찾을 수 없다. 《국민보》 1913년 11월 5일 기사는 4 단체가 통합하여 설립된 대한부인회의 “모든 일이 더욱 자미스럽고 진취”된다고 밝히면서 매주일 모이는데 회원들이 많이 모여 회의장소가 협소할 정도라고 하였다. 회의장소가 어디였는지 또 몇 명이 모였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11월 3일에는 총무를 여러 지방으로 보내 지부를 결성하도록 결정하였고, 또한 그 자리에서 국민회 사무실 건축을 위한 기금모집을 하여 $20을 모금하였다.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인 국민회를 지원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1914년 1월 12일에 카우아이 섬 콜로아(Koloa)지방 지부 설치를 시작으로 오아후 섬 와히아와(Wahiawa), 하와이섬 코나(Kona) 지부도 설치되었다. 와히아와 지부 회원들은 1914년 2월 2일 국민회 창립 6주년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광무군인들의 제복 30벌을 만들었는데실질적으로 재봉일로 돈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1914년 4월에 대한부인회 사무실을 국민회 사무실 옆으로 이사하고 곧 이어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국민보》를 위한 기금모집에 대한부인회 회원들이 후원하였다.호놀룰루의 70여명 회원 중 특별히《국민보》를 후원한 회원은 아래와 같다.강성기, 김경범, 김길남, 김관선, 김루신다, 김순명, 김유실, 김재욱, 문찬성, 박엘리자벳트, 박유네스, 박원신, 박정순, 손덕유, 송겸심, 신영진, 안해나,윤힐란, 이부실, 이창식, 이(권)혜경, 정은수, 지해나, 차정림, 최사홍,최응범, 최장손, 최하리, 한상호, 황경애, 황마리아 (11명)김성백 모친, 김차삼 부인, 양기전 부인, 유한응 부인, 정두복 모친 (5명) -
1914년 4월 19일에는 1주년 기념식을 한인중앙학교 (교장 이승만)에서 성대히 거행하였고6월 17일에는 새 임원을 선출하였다.새 임원은 류창선 (회장), 안윤심 (부회장), 강창숙 (서기), 김유심[실] (회계), 안하[해]나 (학무), 차(리)정림 (사찰) 이었다. 1914년 5월에는 평양에서 선교사업을 하는 노불목사를 통하여 서간도의 재난동포 구제금으로 $300을 보냈다.또 1918년 6월 14일에 있었던 통상회 (정기적으로 열린 회의)에서 $250을 한국에 보내 땅을 사서 전도비의 기본금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즉 그 땅에서 얻은 추수수입으로 한국내의 지방민 전도사업에 충당하도록 한 것이다.이렇게 대한부인회의 1년 동안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70여명 회원의 대한부인회라는 여성 단체가 기독교선교와 애국운동을 활발히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국민보》 1914년 8월 27일자와 30일자에는 국민회 호놀룰루 지방회 모임에서 최근에 도착한 안득은 (김영진 부인)과 류창선 (이관묵 부인) 두 여성이 한 연설내용을 요약하여 발표하였다.
안득은은 국민회 활동을 치하하고, 아편 복용을 규탄하고, 동포들의 정신적 단합을 강조하였으며,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안득은은 부인들의 의복개량에 관하여 반대의견을 표하였다.
하와이의 한인 여성들이 더운 기후에 알맞게 한복을 개량하여, 치마와 저고리 소매의 길이를 짧게 하여 입었는데, 이에 대하여 안씨는 민족 고유의 복식을 개량하는 것은 조국을 깨는 (망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청중석에 있던 이승만 박사가 나서서, 이 문제는 나중에 더 논의하기로 하자고 하였다.
그는 의복과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면서, 그렇다면, 남자들도 다 양복을 벗고 도포를 입어야 하느냐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는 기사도 덧 붙였다.
1948년 대통령 취임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복을 입었고, 후에도 공식석상에 한복을 자주 착용하였다.류창선의 연설은 “우리 하나 하나는 의식, 명예, 책임 등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미국과 하와이 한인 정형을 비교할 때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낫고, 중심적 발달은 하와이가 낫다. 이렇게 삶의 목적이 다른 우리 개개인이 이지만, 미국과 하와이 한인들이 동심협력한 후에야 우리 전체의 희망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이렇게 1910년을 전후하여 한인 여성들의 조직 활동이 활발하여 졌고, 여성들뿐만 아니라 범 한인사회 모임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민생활의 기반이 잡혀짐과 동시에 1910년부터 여성들의 수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망국의 한은 더더욱 많은 이들을 기독교신앙 부흥을 통한 애국계몽운동과 민족교육에 활발히 참여하도록 하였다. 김공도 (고덕화 부인)와 김옥순 (황성국 부인)은 1913년 말과 1914년 초에 도착하였는데, 이 둘은 한글학교에서 가르쳤다.I-4. 대한소녀리그하와이 한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19년 3월 9일이었다.
두 달 후인 1919년 5월 28일자 스타블르틴(Honolulu Star Bulletin)에 대한 소녀 리그(Korean Girls' League) 회장 최순이(Soonie Choy, 19세, 학생) 이름으로 미주 본토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명한 여성단체들과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부인 등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다.이 편지는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전 세계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소녀리그의 서기는 신매리(Mary Shin) 이었는데 당시 16세의 여학생이었다. 이 단체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모임이었다. 더 이상 이 단체에 관한 기사가 없다가, 두 달 후인 7월 14일에 Korean School Girls 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내용의 편지를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중인 미국 대표들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스타블르틴 지에 실렸다.아마도 대한소녀리그의 학생들이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병탄된 조국의 상황을 세계 여성단체와 미국 대표들에게 호소하면서, “한국의 염원 (광복)을 말살하는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동시에 세계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 것인가(What effect will the denial of Korea's national hopes by Japan have upon Asia and upon the possibility of a world democracy?)”라고 물었다는 기사였다.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미주 한인의 새 싹인 여학생들이 외교적 창구를 활용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
I-5. 대한부인구제회독립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대표 41명이 3월 15일에 호놀룰루 국민회 총회관에 모여 조국독립운동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기로 하고 새로이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였다.영자 신문 애드버타이저 지가 보도한 대로, 원래의 명칭을 대한 적십자 Korean Red Cross Society로 조직하려 하였으나, 한국이 자주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하여 대한부인구제회라 하였다. 특기할 것은, 애드버타이저 지가 보도한 것처럼, 이 모임이 단순히 이들 여성 41명의 회의가 아니라 한인들 300여명이 모인 범교포적 회의였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 참가한 41명의 여성단체 대표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손마리아, 황마리아, 김유실, 박정금, 안정송, 김복남, 손경신,김보배, 최사용, 백인숙, 안득은, 김복순, 김정한, 정혜련, 김루시,김마주리, 임마리아, 김살로메, 정마타, 손마타, 김해나, 심영신,김차순, 곽명숙, 박금우, 김엘시, 김으로쓰, 홍수사나, 한에스터,리영애, 최자신, 김숙안, 박엘시, 리마지, 김순화, 김교선, 윤광히,조병선, 유정순, 리월선, 엄수산이 모임의 결과로 3월 31일에 대한부인구제회 발기인 회장, 손마리아; 부회장 겸 외교원, 김마주리, 총무, 김보배; 서기, 김유실, 김복순; 재무, 송마다[타]; 학무, 백인숙; 법무, 정혜린; 구제 안득은; 사찰, 정마터[타] 의 이름으로 <취지서> 가 발표되었는데 「취지서」,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이하 『우남 이승만 문서』) 제12권, 중앙일보사/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pp. 393-394. 위의 인용한 애드버타이저 지에 회장 Mrs. Mary Song 과 총무 Mrs. W. K Ahn (안정송)이 피선되었다고 한 것은 오기이다.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우리대한 부녀들아 때가 왔도다. 이때는 조상나라를 독립지위에 올려 앉혀 놓는 때요, 동족들이 피를 흘려 장래 큰 희망과 영광을 누리려하는 이땐줄 깨닫는가 못하는가. 활동하라, 이때는 한집안 횃대 밑에서 반에반쪽 사람 노릇하지 말고 사상을 한번 변하여 20세기 확무대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받은 한 사람의 권리를 넉넉히 누릴지어다...
목적은 나라 위하여 피 흘리고 죽고 갇히고 고생하는 동족을 구제할 것이며...” -
이 취지서에 10명 회장단과 78명 회원 명단이 실려 있어 조직 당시에 88명의 회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단에는 79명으로 로희창 부인, 디[지]영희가 반복됨) 회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굵은 글씨는 임원)
구명수, 김경란, 김교선, 김구레쓰, 김남순,김루시, 김마주리,김막달나, 김매리, 김메불, 김무숙, 김보배, 김복남, 김삼덕, 김선봉, 김성이, 김수복,
김숙안, 김순양, 김순하, 김아지, 김앤의, 김엘리사벳, 김유실, 김일남, 김임순, 김정한, 김차 득, 김창순, 김캐로린, 김해나, 류정순, 량덕선, 리래드라, 리리랜스, 리마구렛, 리석기, 리신 석, 리에스터, 리애니, 리점순, 리진실, 리천순, 리플로라, 리필언, 림금이,림덕순, 림마리아, 박엘리사벳, 배천례, 백인숙, 박정금, 변석경,서동조, 손경신, 손마리아, 송마다[타], 손봉화, 손영주, 송필순,신성금, 신숙경, 안득은, 양정신, 엄수산나, 유로득, 유순례, 유흥수,오애마, 장마리아,
장엘리하, 전로세, 정마터[타], 정혜린, 조병선,조수산나, 조헬란, 진신실, 디[지]영희, 차순남, 최사흥, 최소근,최요한나, 최재도, 한에스터, 홍매리, 홍수사나, 김계남 빙모 (88명)그런데 이 88명의 창단 회원 명단에는 대표자로 모였던 41명 모두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취지서의 명단이 정확할 것이지만, 왜 대한부인회에서 활약한 여러 명, 예를 들어 황마리아, 이(안정송) 등이 부인구제회 창단 명단에서 빠졌는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다.대한부인구제회 장정이 1919년 11월에 작성되었는데, 구제회를 조직하는 동기가 한국에서 기미년 독립운동의 소식을 듣고 “우리 여자들도 하늘이 준 국민 고유의 의무와 권리를 다 함이 천직인 줄로 자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장정」, 1919, p. 1.조직 명칭은 대한부인구제회라 하나 만일 필요한 경우에는 대한민국 적십자회로 변경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p. 4).조직으로는 대표회와 사무를 총괄하는 총부 (중앙부)를 두었는데, 대표회는 각 지방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대표의 연령은 22세 이상이며. 신분은 묻지 않으나 국한문을 능히 쓰고 읽을 줄 알며, 또한 국문과 영어만 쓰고 읽을 줄 알아도 합당하다고 하였다. 대표가 자기 지방의 일반회원의 부탁을 져버리거나 소임을 감당치 못할 때에는 그 지방 회장이 사직을 권고하거나 파면을 할 수 있다고 책임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pp. 4-5). 통합 목적은:1) 본국에서 난리 (독립운동)로 참상을 당한 사람과, [독립]전쟁에서 부상하는 동족을 구원한다.2) 부녀들의 절개와 례모와 근면하기를 서로 권장하여 대한부인의 참된 모습을 보전하고자 한다.이 독립선언서 포스터는 세계 유일하게 독립선언서와 33인 명단과 상해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대한임국 임시헌장 선포문, 임시정부 정강을 한글과 한자로 기록한 역사적인 포스터이다. 국민보사에서 조판하였을 것이며, 컬러 인쇄가 가능한 애드버타이저 지 회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이 포스터는 1919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제작되었고, 하와이 한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미주 본토 한인들에게도 우송, 판매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판매 수익금이 $2,000이었는데, 3.1 운동 중 사상을 당한 애국지사 가족에게 $1,500을 보냈다. Lyu, 위의 글, p. 59. 이 글에는 이익금 중 $800을 상해 임시정부에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부인구제회는 1920년 11월에는 상해 임정을 통해 만주에 있던 대한독립군에 $500을 보냈고, 1921년에는 서북간도의 참상을 당한 동포들에게도 상해 임정을 통하여 또 $500을 보냈다.또한, 부인구제회는 조국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청년회(YMCA)와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를 통하여 구제금을 보냈다.한편, 하와이에서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대한부인회가 하여온 것과 같이 《국민보》를 연간 $15씩 지원하였다. -
1921년 임원:손마리아 (총회장), 박금우 (총무), 김복순 (서기), 민맬[매]리 (재무),박엘리사벳 (구제) 백인숙 (법무), 송경신 (학부), 김엘리사벳 (사찰)부인구제회는 여러 가지 기금 모집 행사를 통하여 독립자금과 재난 보조금을 만들어 필요한 곳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호놀룰루에서 행해지는 행진과 축제 등에 언제나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로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들고 참가하였다. 여러 장의 사진이 남아 있다.현존하는 대한부인구제회 대표회의록은 1927년 (민국 9년) 제8차부터 1961년 38차 대표회의이며, 『우남 이승만 문서』제 12권에 영인되어 있다 (pp. 400-545). 1927년부터 1930년까지의 대표회의록에 의하면, 부인구제회 지방회(지부)가 오아후 섬 호놀룰루, 와이알루아 (Waialua)와 와히아와 (Wahiawa)에 있었고, 하와이 섬에는 힐로(Hilo) 그리고 마우이 섬에는 하나 (Hana)와 파이아(Paia) 지역에 있었다.
1929년 임원:김노듸(중앙부장), 최혜림(부부장), 안득은(총무), 김신실(서기), 리점순(재무), 김엘리사벳(법무). 김복순 (학무), 심영신 (구제원)1930년부터는 임원 이외에 각 지부 대표들이 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힐로: 최덕아, 파이아: 박정금, 리성학, 하나: 박세숙, 호놀룰루: 김차순,1930년 12월 말 동지식산주식회사 주주총회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하려고 모인 호항 (호놀룰루)회의에서 임원 간에 의견 충돌과 몸싸움이 있은 후로 대한부인구제회가 국민회계열과 동지회계열로 분열되었다.갈라진 두 조직이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였는데, 1931년 동지회계열 부인구제회는 오아후 섬에 호놀룰루와 와히아와, 마우이 섬 파이아, 하와이 섬 힐로와 코나(Kona) 지역에 지부가 있었다.1931년 동지회계열 임원과 지방 대표:김노듸 (회장), 김해나 (부회장), 조매륜 (총무), 김봉순 (서기), 문마리아 (재무), 정마타(의사부원), 박엘리사벳(의사부원), 김국주 (의사부원),힐로 대표: 최애다, 정마타, 파이아 대표: 리영옥, 신호시, 와히아와 대표: 리함나, 전의숙, 코나 대표: 안득은, 박엘리사벳, 호놀룰루: 김유실, 천연희1935년 동지회계열 임원과 지방 대표:김유실 (중앙부장), 조매륜 (부중앙부장), 김봉순 (총무), 정사원 (서기), 김노듸(재무 겸 외교원), 안득은 (구제원), 유광희 (학무), 김주시 (법무),호놀룰루: 김엘리사벳, 마우이: 정시원, 윤쌔라,와히아와: 천연희, 민함나, 김애로, 힐로 대표: 안득은, 백인숙1936년 동지회계열 지방 대표:호놀룰루: 리모옥, 김순연, 마우이 대표: 리영옥, 한(김)엘리사벳,힐로: 천연희, 박엘리사벳, 와히아와 대표: 김애로, 김봉수1937년 동지회계열 지방 대표:호놀룰루: 리모옥, 천연희, 정마타, 마우이: 리영옥, 조해나,와히아와: 김봉순, 조마리아, 힐로: 백인숙, 박엘리사벳1937년 국민회계열 임원:박금우 (중앙부장), 심영신 (부부장), 박정금 (총무), 최혜림, 이헬렌, 리정림1937년 초부터 두 계열의 부인구제회가 합동하려고 노력하였다. 1월 30일에 국민회 총회관에 약 150명의 두 계열의 회원 모두가 함께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3월 29일에는 양 계열의 대표들이 모여 대표회를 조직하였다.참석한 대표:호놀룰루: 김복순, 리정림, 와히아와: 박신애,힐로 (대리): 김영애, 라나이 (대리): 승정한대표회 임원:심영신 (회장), 박신애 (찬의), 승정한 (서기),투표조사위원: 박신애, 김복순, 문부조사위원: 김복순, 리정림건의서조사위원: 승정한, 비존품조사위원: 김영애, 김복순중앙부부장: 박금우, 부부장: 김차순 -
두 계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합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1949년 1월 28일에 국민회계열 대한부인구제회는 정식으로 이름을 국민부인회 (흔희 부인 국민회로 부름)로 바꾸고1963년 말 《국민보》가 폐간될 때까지도 활동하였다. 동지회계열 대한부인구제회는 1973년까지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1938년 동지회계열 지방 대표:호놀룰루: 백인숙, 정순이, 최경애, 조해나, 마우이 대표: 리영옥, 윤쌔라와히아와 대표: 민함나, 배신실, 힐로 대표: 정사원, 이복수1938년 국민회계열 지방 대표:호놀룰루: 승정한, 김복순, 와히아와: 박시내[신애], 힐로: 리성학,라나이: 김영애와히아와 지부 임원: 리인옥 (회장), 고선신 (부회장), 리수사나 (총무),차경순 (서기), 문임금 (재무), 리에바 (법무),최복남 (학무), 강인덕 (구제원), 김화인 (외교),박신애 (대표원)1939년 동지회계열 임원과 지방 대표:조해나 (회장), 주끗순 (부회장) 최경애 (총무), 김주수 (재무), 김앨시 (서기), 류광희 (학무), 양정신 (법무), 윤애인 (구제원 겸 사찰)호놀룰루: 백인숙, 최경애, 한에스터, 와히아와: 김애로, 조마리아마우이: 조해나, 정사원, 힐로: 민함나, 정순이1940년 동지회계열지방 대표:호놀룰루: 김순연, 정순이, 와히아와: 김봉순, 리묘옥,마우이: 조해나, 류옥순, 힐로: 최경애, 리영옥두 부인구제회는 계속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기금모집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계속 보조하였다. 국민회계열은 《국민보》를, 동지회계열은 《태평양주보》를 지원하였다. 기금모집 활동으로 떡, 김치, 대구나 무말랭이 무침 등을 만들어 팔았고, 달걀도 파는 등, 돈이 남을 수 있는 장사는 모두 하였다. 어느 때고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장사라는 것도 상점에 앉아 들어오는 고객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등에 애기를 업고 따가운 햇살을 무릅쓰고 거리와 동리를 헤맨 행상”이었다. 어느 때고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부인구제회가 1930년도부터는 기금모집 활동 중의 하나로 연극공연도 하였다.
1937년 2월 27일 공연은 “3․1절 공연”으로 국민회 총회관 증수 기금모집을 위한 공연이었다.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중앙중학교(Centeral Intermediate School)에서 3시간 동안「어머니의 사랑」과 「김상옥의 실기」라는 두 편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등장 인물은 박금우, 박정금, 김정한, 김보배, 정순덕, 정덕순, 양남수, 박매리, 이성학, 곽명숙, 이끗순, 김복순, 추복동, 박덕실이었다. 연극 교사겸 연극 설명사는 홍창기였고, 원조위원은 양유찬, 김원용, 조금문이었다. 한 장에 1원($1)인 연극표 판매위원은 심영신, 박매리, 김흘른(헬렌?), 황혜수, 장현신, 김보배, 문또라, 이에스터, 김차순, 김복순, 박봉집, 임성우, 박신애였다.연극공연은 호놀룰루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섬 여러 지방 부인구제회 회원들도 공연을 하였다. 연극공연은 기금보집의 한 방편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고독에 사무친 교민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했다.이렇게 여성들이 대한부인구제회를 통하여 애국사업에 바친 재정이 미화 $200,000이 넘었다. 이 액수는 2015년도 구매가격으로 약 $450만에 해당되는데, 앞으로 검증되어야 할 액수이다.1940년 10월 20일 하와이에서 주요단체 6개의 대표 24명이 미국의 국방활동을 전적으로 후원할 목적으로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하였다.이에 부인구제회 대표 8명이 참가하였다. 국민회계열의 곽명숙, 김차순, 김매들린, 심영신과 동지회계열의 김순연, 김(손)노듸, 이유실, 정순이 이었다.1941년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海外韓族大會에 북미 2개 단체와 하와이 7개 단체의 대표 15명이 모여,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외교운동, 미 국방공작 원조, 재정방침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 역사적인 대회에 부인구제회의 심영신(국민회)과 민함나(동지회)가 참가하였다.이들 여성 대표의 참가는 그들의 활동이 독립활동 경비보조를 위해 헌신하면서 또 실질적으로 대표회의에 참여하여 독립활동의 정책 수립 등에 적극적으로 같이 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물심양면의 활동이었고 헌신이었다.부인구제회는 1942년 4월에 한인휘장 (Korean badge)을 주문하여 일반에게 판매하였다.
“미·한 양국기를 교차한데다가 "미국승리에 한국도 같이한다(Korea for Victory with U.S) 는 뜻의 빅토리 빼지(victory badge)였다. 몇 개를 만들어 얼마에 팔았는지 또 얼마의 수익금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래서 조국의 독립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부인구제회 회원들의 염원이 담긴 빼지였다.
1941년 동지회계열 임원:민함나 (중앙부장), 서복수 (부회장), 김복서 (총무), 전영복 (재무). 최덕아 (서기), 조매륜 (법무), 김재희 (학무), 안득은 (구제원), 김복서 (의사원)1942년 의무금 (회비) 납부자:국민회계열:힐로: 김동남, 김은경, 림거문, 김돈이, 정순이, 조매리, 서수복, 문은숙호놀룰루: 이점백, 신계춘, 황봉순, 김구용, 손마리아, 김애신동지회계열:호놀루루: 김재희, 공어진, 전도연, 민싸라, 김윤홍, 리새별, 장엘리라,채소금,마우이: 리귀남, 남경수,1943년 회비 납부자 (호놀룰루 합동):강녀수, 김복순, 김봉순, 김(홍)어진, 김유실, 리묘옥, 리정봉, 리(권)혜경, 문구임, 박묵겁, 박보광, 박심복, 민함나, 신[리]매리, 안득은, 양경숙양정신, 윤덕아, 윤애인 조경애,조힐란, 장살놈[살로메], 전수산나, 전영복, 정순이, 정신실, 조매륜, 조해나, 진수경, 천엘리사벳, 최경애, 황수남1944년 동지회계열 지방 대표:호놀룰루: 리유실, 리영옥, 한에스터, 최헌숙, 김순이와이아와: 조마리아, 조례마, 힐로: 남순남1944년 국민회계열 중앙부 임원:심영신 (부장), 김차순 (부부장), 박정금 (총무), 우도경 (서기), 안금네 (재무 겸 외교원), 강창신 (법무), 김보배 (학무), 박은신 (사교원)호놀룰루 지방: 회장 박보광, 서기 승정한지방대표:호놀룰루: 박정금, 김보배, 와히아와: 박시애, 리에바, 힐로: 차정림,라나이: 승정한 (서기), 재정조사원: 승정한, 차정림,건의서조사원: 리에바, 박시애,1945년 동지회계열 임원과 지방 대표:김노듸 (중앙부장), 전영옥 (부회장), 김순이 (재무), 김유실 (서기),이사원: 김순남, 송순이, 한에스터, 김복서, 조매륜호놀룰루: 조소남, 양덕순, 리영옥, 김유실, 리모옥와히아와: 김애로, 조마타, 힐로: 남순남1945년 국민회계열 임원:박정금 (중앙부장), 승정한 (부회장 겸 서기)호놀룰루: 박보광 (회장), 승정한 (서기) -
I-6. 영남부인회1928년 9월 28일에 호놀룰루에서 경상도에서 온 부인들이 출생 지방에 대한 감정으로 영남부인회 조직 동기에 관하여는 이원순, 『세기를 넘어서』, 신태양사, 1989, pp. 174-175 참조.영남부인회 (후에 영남부인 실업동맹회로 개칭하였으나, 영남부인회로 알려졌음)를 조직하였다. 여성단체 중 유일하게 출신지역 중심으로 모인 단체로 친목회 성격이 강하였다. 발기 회원은 김보배, 박금우. 곽명숙, 이혜경, 박정숙, 이양순 이었는데 모두가 부인구제회 회원이었다. 목적은:1. 저금을 장려하며, 국산[품]을 수입하여 실업 발전에 노력하며,2. 동포간의 사교와 친목을 증진하며,3. 회원간의 상부상조를 장려하여 안녕을 보장한다.회원 수가 많을 때에는 150여명이라고 하는데, 명단은 확인할 수 없다. 1941년 회장은 박금우였고 1954년 회장은 서복수, 1957년에서 59년까지 회장은 리양순이었다. 회원들은 계속하여 부인구제회 지도자로 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영남부인회 자체로도 독립의연금을 계속 지원하였다. 영남부인회는 어느 단체보다 의연금 모금실적이 월등하여 “우리나라 독립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이원순이 평하였다.1963년 말 《국민보》가 폐간될 때까지도 활동하였다.I-7. 대한인애국부인회1941년 2월 23일에 조직된 단체이며, 목적은 애국정신를 발휘하고 조국광복사업을 전력함이었다. 장정에 의하면 임원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총무 (1인), 서기 (1인), 법무 (1인), 재무 (1인), 사교원 (3인), 재정조사위원 (2인) 이었다. 1944년에 회장은 김(고)공도, 서기 1은 홍숙자, 서기 2는 최분이였다. 1945년에도 같은 회장단이 계속하였다. 회원이 150명이었다고 하나, 명단은 확인할 수 없으며, 회원 거의가 부인구제회 회원들이었다. 이 단체의 활동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장정이 남아 있다. -
II. 독립유공자 명단여성단체는 독립자금뿐만 아니라 조국의 기독교 복음화를 위한 전도비용, 재난 피해자를 위한 의연금을 국내로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하와이 한글 신문의 중요성을 인지하여《국민보》와 《태평양주보》등을 위한 후원도 계속하였다. 채권구입, 구호금, 의연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떡, 김치, 대구무침, 무말랭이 무침 등을 판매하고 연극공연을 통해 꾸준히 모금 활동을 계속하였다. 더구나 하와이에서 범교포적으로 이루어진 채권구입, 구호금, 의연금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수금하였다. 각 지역마다 수금원(징수위원)들이 열심히 걷었는데, 그들의 손 때 묻은 카드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하와이 여성단체의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이 이승만과 박용만 등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며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여성단체 활동은 한두 명 남성 지도자에 의하여 전개된 것이 아니고, 여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회원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누구보다 먼저 조국의 3.1일 독립운동 부상자들을 도운 것이 하와이의 여성단체였고, 만주의 독립군을 도운 것도 하와이 여성단체였다. 더구나 25년 동안 하와이에서 활동한 후 1939년에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하여 외교활동을 추진한 이승만을 재정적으로 도운 단체는 동지회보다는 동지회계열 부인구제회였다.여성들이 단체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훈련은 교회라는 조직체에서 받았다. 1903년부터 농장에 세워진 여러 감리교회, 1905년에 호놀룰루에 세워진 성공회 교회, 1909년에 호놀룰루에 설립된 자유교회, 그리고 1918년에 세워진 한인기독교회는 이들 교인들에게 조직체의 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다. 교회를 통하여 훈련된 여성들은 하와이에서 발간되는 한글 신문과 여성단체가 주관한 여러 강연회를 통하여 조국의 정세를 알 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단체는 신앙운동, 여성개화운동, 그리고 조국의 국권회복 운동을 복합적으로 이끌어갔다.한편, 여성들이 단체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 자신이 가진 경제적인 힘이었다. 남편들이 벌어오는 돈을 (벌어오는 남편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절약하여 애국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그들 스스로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민 여성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사탕수수농장에서 독신 노동자들의 음식을 만들거나 옷을 빨아주고 수선해 주는 일을 하여 돈을 벌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경험은 그들이 농장을 떠나서 세탁소, 양복점, 등을 운영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조금 모아진 돈에 곗돈을 보태 집을 구입하여 하숙집을 운영하는 등 여성들은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한인여성들의 독립자금, 수재의연금 등 모금활동은 부수적으로 한국문화를 하와이에 소개·보급하면서 하와이 다문화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운동 후원금 모금으로 시작된 김치, 대구무침, 등 장사는 한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폴투갈, 일본, 필립핀 사람들도 포함하였다. 1930년대에 한인 2세 조 킴 (Joe Kim) 의 김치공장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하와이 전체 인구의 2% 밖에 되지 않은 소수민족의 음식문화가 하와이 다문화 속에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일러준다. 또한 몇몇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한국 문화 특히 무용 등을 가르쳐서 다문화행사에 참여하여 한국문화를 홍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하와이 여성단체 회원들의 독립운동은 특정 시기에 단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가정을 꾸려가며, 자녀교육에 정성을 부으며, 사업을 이끌고, 교회출석에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루어낸 것이었다. 이들 모두가 독립유공자이다.
이들 독립유공자를 단체임원과 일반회원으로 구분하여 2 명단을 작성하였다.
각 134명과 156명의 명단인데, 출처 자료의 오타도 있을 것이고, 남편 성을 사용한 경우와 영문 이름을 사용한 여성들의 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을 것임을 밝힌다. 영문 이름의 한글 표기가 변하는데, 최근의 표기를 사용하였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 되는대로 이 명단이 증가될 것이다.1) 하와이 여성단체 임원과 지방대표원강인덕, 강창숙, 강창신, 고선신, 곽마리아, 곽명숙, 김공도, 김교선, 김구용,김국주, 김(손)노듸, 김루시, 김마주리, 김매들린, 김보배, 김복남, 김복덕,김복서, 김복순, 김봉순, 김살로메, 김숙안, 김순남, 김순연, 김순이, 김순화, 김영애, 김애로, 김앨시, 김옥순, 김유실, 김으로쓰, 김정한, 김재희 김주수, 김주시, 김해나, 김화인, 남순남, 류광희, 류옥순, 류창선, 리마지, 리성학,리수사나, 리영애, 리영옥, 리에바, 리인옥, 리월선, 리점순, 리함나,문마리아, 문임금, 민맬[매]리, 민함나, 박금우, 박보광, 박세숙,박엘리자벳(최엘리자벹과 동일인일 것임), 박엘시, 박은신, 박정금, 박정숙, 박신애, 배신실, 백인숙, 서복수, 손(송?)경신, 손마리아, 손마타, 송마타,송순이, 승정한, 신(이)매리, 신호시, 심영신, 안금네, 안득은, 안윤심, 안해나, 양덕순, 양정신, 엄수산, 우도경, 유정순, 윤광히, 윤애인, 윤쌔라, 이복수, 이양순, 이유실, 이(권)혜경, 이(안)정송, 이헬렌, 임마리아, 임(김)차순, 전영복,전영옥, 전의숙, 전효례, 정마타, 정사원, 정순이, 이(정)영옥, 정혜린(련?),조금순, 조례마, 조마리아, 조마타, 조매륜, 조병선, 조소남, 조해나, 주끗순, 차경순, 차(리)정림, 천연희, 최경애, 최덕아, 최복남, 최분이, 최사용, 최순이, 최애다, 최엘리자베트 (박엘리자베트와 동일인일 것임), 최자신, 최헌숙, 최혜림, 한에스터, 한(김)엘리사벳, 홍수사나, 홍숙자, 황마리아 (134명 또는 135명)2) 1909년 공동회 기금 동참자, 1910년 안중근 기금 동참자, 1914년 《국민보 》후원자, 1919년 부인구제회 회원, 1937년 3.1절 공연 연극 관계자, 1942년~1943년 부인구제회 회비 납부자 (위의 임원과 지방대표원은 제외)강녀수, 강성기, 공어진, 구명수, 김경범, 김길남, 김경란, 김관선, 김구레쓰, 김남순, 김돈이, 김동남, 김루신다, 김막달나, 김매리, 김메레, 김메불,김무숙, 김봉순, 김삼덕, 김선봉, 김성옥, 김성이, 김수복, 김숙안, 김순명,김순양, 김순하, 김아지, 김(홍)어진, 김애신, 김앤의, 김엘리사벳, 김옥순,김은경, 김윤홍, 김위레스, 김일남, 김임순, 김정한, 김재욱, 김차득, 김창순, 김한근, 김흘른(헬렌?), 김캐로린, 남경수, 노맹월, 량덕선, 류정순, 리귀남, 리래드라, 리리랜스, 리마구렛, 리새별, 리석기, 리신석, 리에스터, 리애니,리점순, 리정봉, 리진실, 리천순, 리플로라, 리필언, 림금이, 림거문, 림덕순, 림마리아, 문구임, 문은숙, 문찬성, 민싸라, 문또라, 박덕실, 박묵겁, 박매리, 박봉집, 박심복, 박에스터, 박유네스, 박원신, 박정순, 배천례, 변석경,서동조, 서수복, 손덕유, 손봉화, 손영주, 송겸심, 송필순, 신계춘, 신성금,신숙경, 신영진, 신응문, 안앨나, 양경숙, 양남수, 오애마, 유로득, 유순례,유흥수, 윤덕아, 윤힐란, 이관선, 이부실, 이성학, 이신실, 이애나, 이에스터, 이진실, 이점백, 이창식, 이끗순, 임메리, 임성우, 장마리아, 장살놈[살로메], 장엘리라(하?), 장현신, 전도연, 전로세, 전수산, 정덕순, 정순덕, 정신실,정은수, 정순이, 조경애, 조매리, 조병선, 조수산나, 조윤이, 조헬란, 지해나, 진수경, 진신실, 디[지]영희, 차순남, 천엘리사벳, 채소금, 최마리아, 최사홍,최응범, 최장손, 최하리, 추복동, 홍매리, 한상호, 황경애, 황수남, 황혜수김국경 부인(조제마), 민한옥 부인(이무실) (156명)최고분이 모친, 김계남 빙모 김도삼 부인, 김성백 모친,김응섭 부인, 김재근 모친, 김재근 부인, 김재순 부인, 김차삼 부인,김창근 부인, 김치경 부인, 김치운 부인, 김친규 모친, 노맹월 모친,민승현 부인,박경오 부인, 박응서 부인, 박자홍 부인, 박씨 부인,박한용 부인, 백경수 부인, 서창순 부인, 송공선 부인, 서달근 부인,안앨나 모친, 안성실 부인, 안치길 부인, 양기전 부인, 오응택 부인,유성수 부인, 유진학 부인, 유한응 부인, 이경신 부인, 이기영 부인,이기원 부인, 이복기 모친, 이성언 부인, 이 부인, 장원여 부인, 정두복 모친, 최성렬 부인, 최정호 부인, 함삼여 부인 (43명)
III. 독립유공자 14명 인적 사항이미 포상을 받은 박신애 (애족장), 심영신 (애족장), 이(권)희(혜)경 (건국포장), 전수산 (건국포장) 제외하고, 14명의 간단한 인적 사항을 기록한다.1) 김노듸 (1898-1972)1905년 5월 8일에 부모형제와 함께 이민 왔다.김노듸는 오벌린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표자대회에서 6명의 여성 대의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하였다. 한인대회 의장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로 연단에 올라, 한국 여성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하여 연설하였다. 자신의 할머니 세대 이전에 “여성들은 한국 남성들로부터 일종의 열등한 창조물로 간주됐으나 최근 몇 년 동안에 한국 남성들이 문명국의 여성이 남성과 균등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라고 지적한 후에 “우리 한국 여성들도 한국의 남성들과 같이 협조하여 일하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는 일을 돕고자 하고 있습니다.” 라고 선언하였다. 김노듸는 또한 1920년 5월 23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국친우회 대회에서 한국 여성과 소녀들이 조국이 독립과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는 것에 대하여 연설하였다.김노듸는 오벌린대학교를 졸업한 후 호놀룰루로 돌아와 1922년 9월부터 한인기독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 교장으로 은퇴하였다. 부인구제회 임원으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1953년 11월에 부터 대한민국의 외자구매청장으로 임명되어 1955년 2월까지 외자를 구입하고 관리하였다.생존 가족: 외손녀: Anne Namba, 의상 디자이너 -
2) 김주수 (1905-1981; Mabel Choo Soo Kwon)1923년 6월에 권성재의 사진신부로 도착하였다. 사진신부 중 마지막으로 도착한 그룹에 속하였는데, 당시 흰말 띠가 많이 왔다는 일화가 있다.동지회 회원, 부인구제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생존 가족: 아들 William Dong Gin Kwon (1935년 생)딸 Diana Myung Sun Kuwai (1947년 생)3) 김(문)또라 (1877-1971)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남산현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였다. 기독교를 믿지 않은 시댁을 떠나 1903년에 8살 난 딸을 데리고 전도부인의 직함으로 호홀룰루에 도착했다. 현 그리스도감리교회 창립교인이었다. 문홍석과 결혼한 후 문또라로 알려졌다. 교회활동에 주력하면서 부인구제회 회원으로도 열심이었다. 1932년에는 만주에 선교사를 보내는 일도 하였다.생존가족: 외손녀 Elsa Carl Lee4) 박금우마산 출신 박금우는 1912년 말~1913년 초에 정시준의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마산의 창신학교 (남녀공학 당시)를 다녔고, 현 제일문창교회 교인이었으리라 추정한다. 곧 마우이 섬 파이아농장 한인감리교회의 한글학교에서 가르쳤다. 마산, 진주 등의 여러 명 사진신부를 소개하였고, 그들의 하와이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국민회 회원이었고, 부인구제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정시준과 이혼하고, 이정건과 재혼하였다.생존 가족: 며느리 Margaret Chung (1921년 생)5) 박엘리사벳1912년에 4명의 딸과 함께 1904년에 혼자 온 남편 최진태 (목사)와 합류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마우이 섬에서 목회하던 최진태가 1913년에 사망한 후, 호놀룰루로 와서 1914년 이승만이 시작한 한인중앙학교 여학생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였다. 대한부인회를 조직하고 임원으로 활동하였다.1919년 이승만의 소개로 안현경 (국민회 회장)과 재혼하였고, 부인구제회 임원, 동지회 회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생존 가족: 증손녀 Stephanie Han (캘리포니아)6) 신(이)매리 (1903-1983)자유교회 목사 신홍균의 딸이다. 한 살 때인 1903년 4월 30일에 황해도 평산으로부터 부모와 함께 이민 왔다. 대한소녀리그 서기였다.1922년에 이원순(李元淳)과 결혼하였고, 부인구제회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말부터 이원순은 한인기독학원 교무로, 이매리는 사감으로 봉사하였다. 대한민국 민주공화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고 (1967-1971), 대한적십자 부총재로도 활약하였다.7) 이(홍)숙자 (1900-1977)이숙자 (여권 이름은 이복순)은 1917년에 홍철수의 사진신부로 도착하였다. 정신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착하면서 정두옥의 양복점에서 재단일을 배웠고, 1923년에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육군 면허를 얻어 군복 제작과 수선을 맡았다. 1957년에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조그만 호텔을 운영하였다. 국민회 회원, 부인구제회 회원, 대한애국부인회 임원이었었고, 열렬한 박용만 지지자였다.생존 가족: 손자 Dr. Robert Hong8) 이(정)영옥 (1901-1991?)경상도 함안에서 정봉운의 사진신부로 1918년 5월에 도착하여 마우이로 갔다. 이영옥보다 27살 많은 남편은 물대주기 (irrigation worker)로 일반 노동자들이 월급 $15을 받을 때 월급 $30에 연말 보너스로 $200~500을 받았다. 대부분 남편 될 사람들이 $50의 배삯을 보내주어서 신부들이 왔는데, 정봉운은 결혼 전에 이영옥에게 $100, $850 또 $200을 보내주었다. 이영옥은 이 돈으로 남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아마도 사진신부 중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영옥 뿐이다.여섯 째 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은 53세였고 이영옥은 29세였다. 동지회 회원, 부인구제회, 영남부인회 임원으로 활약하였다.그의 자서전적 기록이 1989년에 The Passage of A Picture Bride 로 출간되었다. (WonKil Yoon, Loma Linda University Press, Loma Linda, Calif.)생존 가족: 손주들9) 이(안)정송 (1895-1989)이정송(李貞松)은 1895년 8월 3일에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1910년에 평양의 6년제 정의소학교를, 1913년에는 서울의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곧 진남포 삼숭여학교 고등과에서 1년 (1913-1914)을 가르치고, 1914년-1915년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1915년-1916년 수원의 삼일여학교에서 가르쳤다.하와이의 사업가 안원규의 청혼으로 1919년 1월 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안정송은 1926년부터 약 10년동안 제일한인감리교회의 한글학교에서 가르쳤고, 그의 단체활동 경력은 호놀룰루 한인 사회의 역사의 단편을 보여준다. 대한부인회와 부인구제회의 임원 이외에, 호놀룰루 연합자선회 모금운동의 한인대표 (1921-1923), 호놀룰루 한인 YWCA 이사/이사장/자모회 회장 (1921-1942)을 역임, 한인 대표로 호놀룰루 미술관에서 미군 위문공연을 주관 (1941), 하와이정부 사회연합회의 한인대표로 미국적십자사를 위한 자선 모금공연으로 $1,000을 재미한인연합회 명의로 기부 (1944)하였다. 1945년에 재미한인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국을 방문하였다.생존 가족: 손녀 Karen Ahn, 현 하와이 고등법원 판사10) 임(김)차순 (1904-1996)1917년에 문원서의 사진신부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문원서 사망 후 1924년에 김영수와 재혼하였고, 김차순으로 알려졌다. 평생을 부인구제회 임원, 영남부인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김차순은 또한 한미문화협회(Korean American Cultural Association) 1939년 11월에 로스앤젤스에서 조직된 한미문화협회의 목적은 교육, 문학, 과학 등의 서적을 영어로 번역하여 동양문화를 미국의 각 대학이나 교육기관에 전하여 홍보하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4일에 하와이대학교 도서관에 한국관을 설립하였다. Korean American Cultural Association, Inc. The Culture of Korea, 1946, pp. 317-318.의 하와이 지부가 1944년 8월에 결성되었을 때 남편과 함께 평생회원이 되어 한국문화를 알리는 것에도 일조하였다.생존 가족: Hee Sun Moon (1943년 생)11) 지(노)영희 (1881-1973)1903년에 온 남편 노희겸(노희창)과 합류하기 위해 1912년 11월에 도착하였다. 동지회 회원, 부인구제회 회원, 임원 등으로 활약하였다.생존 가족: 딸 Agnes Rho Chun (1925년 생)12) 천연희 (1896-1997)천연희는 1915년에 29세 연상의 길찬록의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도착하면서부터《국민보》와 《태평양잡지》를 구독하였다. 1924년에 길찬록과 이혼하고 곧 박대성과 재혼하였다. 1939년 박대성과 이혼 후 1941년에 Robert Given 과 세 번째 결혼하였다.천연희는 1923년부터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의 한글학교에서 가르쳤고,부인구제회 회원/임원, 동지회 회원이었다. 동지식산회사 주식을 구입하여 동지촌 설립에 기여하였고, 또 동지촌이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보조금도 냈다. 한인기독학원 찬성금(찬조금) 모금에도 참여하였다.자서전적 이야기를 담은 23개의 캐셋 테이프와 자필 7권의 공책을 남겼는데, 이것은 천연희의 개인 생활뿐만 아니라, 하와이 한인 사회 전반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생존 가족: 딸 Mary Khil Zarbaugh (1919년 생)13) 황마리아 (1865-1937)황마리아는 첩과 사는 남편을 버리고 1905년에 큰아들 (19살)과 며느리, 큰 딸 (15살),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민을 왔다. 마우이 섬으로 가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다. 황마리아에 관하여는 김혜원 (황마리의 딸)과 강원신 (황마리아의 며느리) 인터뷰 내용 참조. Sonia Shinn Sunoo, Korean Picture Brides, A Collection of Oral Histories, 2002.1913년에 대한부인회 첫 회장이었고, 부인구제회 임원으로 활약하였다.딸 강(김)혜원(애국장)과 며느리 강원신(애족장)은 캘리포니아에서 포상을 받았다.하와이에는 생존 가족이 없다.14) 황혜수 (1892-1984)평북 의주 출생 황혜수는 서울에서 장로교 여학교를 졸업하고 선천의 표성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다가 1911년 미국으로 유학 왔다. 1919년 알라바마 주 Atehns College의 사회사업 학과를 졸업하고, 1919년 12월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곧 한인 YWCA을 조직하였다. 곧 어머니클럽을 조직하여 길거리 표지판 읽기, 병원 진료받기, 자녀들의 옷 만들기, 영양음식 만들기 등을 가르치며 이민 여성의 현지화, 미국화를 시작하였다. 1927년부터는 2세들의 <형제클럽>을 조직하여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소개·전파하였다. 1938년에는 3세들의 <해당화클럽>을 조직하여 한국문화 전수에 주력하였다. 황혜수는 한인 YWCA을 이끌어 가면서 부인구제회 회원으로도 활약하였다. 황혜수가 1941년 YWCA에서 은퇴하면서, 한인 YWCA 조직도 끝을 맺었다. 각 민족의 YWCA 가 필요 없게 된 시기이기도 하였다.생존 가족: 조카 딸 Peggy Nam, 하와이대학교 힐로, 무용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