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마세요"...시 '물망초'에 깃들인 사연이성의 이사장 " 납북피해자 가족, 73년간 죄인처럼 지냈다"
  • ▲ 이성의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뉴데일리tv
    ▲ 이성의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뉴데일리tv
    물망초

                   이성의

    여리여리한 작은 꽃잎들이 모여
    한 식구를 이루었구나!
    모였다 흩어지는게
    세상의 이치라고는 하나
    누가 우리의 성스러움을 흩어놓았는가

    그 작디작은 꽃잎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억센 줄기를 타고 올라와 피었네
    물가에 쓸리고 밀린 언덕 위에
    생명을 유지하려 안간힘 썼기에
    그렇게 굵게 거칠어졌나보다

    물망초
    물 건너 한 없이 기다리는 님을
    억센 줄기에 넉을 맡긴 채
    흩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나를 잊지 말라고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흩어지지 않으려
    더욱더 껴안으며 달라붙는구나

    멀리서 들려오는
    사랑스런 님의 음성을 들으며
    끝까지 사랑한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그대에게 들려드리오

    나를 잊지 마세요!
    나는 잊지 못하오!
    지금 방금 들으신 시는 '물망초'입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시 낭송자 이성의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북에 강제 납치됐습니다.
    '물망초'는 북에 계신 아버지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쓴 시입니다.
    검사였던 이성의 이사장의 아버지는 전쟁 동안 경계가 심해지자, "집에 며칠간 못 들어오겠다"라는 말은 남긴 채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성의 이사장의 큰 오빠와 어머니는 백방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이 남긴 쪽지를 전달받았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성의 이사장 가족들은 매일 면회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면회 신청을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이성의 이사장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를 매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형무소 안이 어느 날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성의 이사장은 북한 군대가 수감자들을 북으로 끌고 갔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북한 군대는 6.25 전쟁 동안 약 10만 명의 민간인을 납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북한은 한국 전쟁이 끝난 후인 1950년 중반부터 1970년 사이 대한민국 국민을 집중적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에 따르면 북한은 2016년까지 총 3,835명을 납치했습니다.
    북한 납치로 풍비박산 난 가정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성의 이사장은 평생 아버지와 강제 이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차별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습니다. 

    이후 납북자가족모임과 통일부 등이 힘을 합쳐 납북자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북한의 반인권 범죄가 버젓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은 지금 이 순간까지 강제납치 사실을 발뺌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정부는 북한 눈치를 보느라 국군포로· 납북자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북한에 했습니다.
    이에 국군포로·납북자 피해 가족들은 '전쟁 중 헤어진 사람' 또는 '전쟁 후 헤어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정부 관계자들을 지켜만 봐야하는 어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더욱이 좌편향 인사들은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6.25전쟁 당시 북한이 대한민국 사람들을 강제납치해간 사실을 적지 않았습니다 .
    이에 젊은 세대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반인권 범죄 실태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뉴데일리>는 이성의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을 만나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이 자행한 강제 실종 범죄 관련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기간동안 납북된 경위를 설명해 주세요.

    "저희 어머니와 오빠가 을지로에 살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매일 면회 신청하러 갔습니다.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어느 날 갔는데 형무소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마 9.28 수복 때 수감자들을 다 끌고 올라간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2010년 납북자 특별법 제정 당시, 납북자 신고를 다시 받았습니다.
    다시 받았을 때, 통일부가 납북자 결정자 통지서를 발급해 줬습니다."

    -아버지 없는 삶은 어땠나요?

    "아버지 없는 삶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생계가 어려웠습니다.
    또 다른 예로 동네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아이들이 퇴근하는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하고 갔을 때, 왜 나는 아버지가 없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납북자 피해 가족으로써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

    "10만 납북자 가족들은 지난 73년 동안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죄인 아닌 죄인처럼 숨어 지낸 적도 있습니다.
    납북자로 인해서 남북 관계 걸림돌이 된다는 누명을 쓰고, 여태까지 살아왔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납북 피해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해 주세요.
    또 73년 동안 힘들게 살아왔던 납북자 가족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애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해주세요.

    -젊은 세대를 비롯해 많은 민간인들이 이러한 북한 강제 실종 피해를 잘 모르고 있고, 또 잊혀 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잘못도 있습니다.
    교과서에 민간인이 잡혀갔다는 말이 한 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더 모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역사 교육하고, 역사 교과서에 사실을 기록해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북한 정권에 하고 싶은 말은요?

    "반인권 범죄집단이라는 것을 인식하세요!
    하루 속히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납북자들을 송환시켜라!"

    -납북자 송환 문제 관련 남북 협상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요?

    "납북자라는 말도 떳떳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북한에 이런저런 잘못을 했으니, 이런 책임을 지고, 이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질 것 따지면서 우리 정부가 북한과 맞짱을 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