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직전인 1949년, 농지개혁법 확정·단행… 공산주의와 싸움서 승리
  • ▲ 김학성 강원대 로스쿨 명예교수·헌법학회 고문.
    ▲ 김학성 강원대 로스쿨 명예교수·헌법학회 고문.
    토지는 한 국가의 체제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토지가 국유인가 사유인가에 따라 민주국가와 공산국가로 구별되며, 같은 민주 체제에서도 토지 소유권의 제한 정도에 따라 해당 국가 경제질서의 성격에 차이가 있게 된다. 1917년 레닌은 혁명을 통해 토지 소유를 사유에서 국유로 전환하여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를 성립시켰다. 인위적 혁명이었으니 막대한 사람의 피와 죽음이 수반되었다. 

    1945년 8월 한반도는 모든 면에서 진공상태였다. 사람과 땅은 있었지만, 사람과 땅을 누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를 몰랐다. 가장 중요한 건국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지주 중심의 부의 편재를 시정하고, 소작농의 열악한 지위를 개선하여 신분 세습의 폐해를 없애는 것이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였다. 비좁은 국토에서 맨손으로, 맨바닥에서 시작하면서 북한과 이념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70%가 넘는 농민은 공산주의식 급격한 개혁을 외치며 미군정과 대립했다. 이는 1946년 북한이 20일 만에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소유권을 불허했지만, 자기의 경작권을 가지게 된 북한 농민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남한의 많은 농민은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북한식 농지분배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북한식 토지개혁은 자본주의 상징인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은 1949년 농지개혁법을 확정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개혁내용은 연평균 생산량의 30%를 5년간 정부에 내면 자기 농지가 되게 했고, 지주에게는 농지 대금을 현금이 아닌 지가증권으로 지불했다. 개혁의 주체가 되는 농림부 장관에는, 세상이 다 아는 이승만의 정적 조봉암이 임명됐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소극적이었고, 철저하지 못했으며 농가가 자립할 수 없었던, 실패한 농지개혁이라고 이를 폄훼하는 주장이 있지만, 모두 근거 없는 비방에 불과하다.  

    첫째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정부 수립 후 11개월이 지나 농지개혁법이 만들어지자 이승만이 지주 계층과 공모했고, 개혁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한다. 당시 지주 출신이 많았던 한민당은 지연 전략을 취했지만, 이승만은 한민당과 입장을 달리했다.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에 지주에 적대적인 조봉암을 임명해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농지개혁을 늦춘 것은 도리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국회 내 좌익세력이었다. 북한은 남한의 농지개혁은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시행령이 완비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1950년 4월까지 농지분배 예정 통지서를 발부했고, 농민들은 5월부터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자신의 땅이 어디에 있는가 정도는 인식할 수 있었다. 만일 이런 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전쟁 중 농민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농민들은 지켜야 할 땅이 있었고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을 지켰다. 이승만은 6.25 전쟁의 발발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전쟁 전에 농지개혁을 완수하게 된 것은 애국가 가사대로 하나님의 보우하심이다.   

    이승만이 개혁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 사건은,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다. 이승만은 농민 표를 의식했기에 농지개혁에 소극적일 수 없다. 이승만이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 이유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자기의 이념으로도 그랬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도 농지개혁을 서둘러야 했다. 

    둘째, 농지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고 성과가 없다고 한다. 지주들이 미리 농지를 임의 처분했기에 성과가 없었고, 농지의 48%만 분배됐고 52%는 사전 매각되었거나 은폐된 면적이기에 지주가 임의 처분하지 못한 잔여분의 농지를 개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 농지가 사전에 매각된 것은 맞지만, 지주의 ‘임의 처분’이건 정부의 ‘강제 분배’건 자작 농지가 많아졌다면 농지개혁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정부의 손으로 했건 지주들이 했건 중요하지 않다. 이 경우 지주들의 사전 처분이 고가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지주들이 임의 처분한 농지는 판매가격이 매우 낮았다. 지주들은 무상몰수가 두려워서 개혁 이전에 농지를 매각하려 했고, 일시에 많은 농지가 시장에 나와 시장가격이 낮았으며, 소작농의 구매력이 낮아 팔기가 쉽지 않았고, 낮은 가격이라도 빨리 처분하려 했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적었던 것도 지주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농지개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농지상환액이 영세 소작농에게는 과중해 농민 생활이 향상되기는커녕 부채가 늘어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농지개혁에도 자작농이 자립할 수 없었던 것은 나라의 영토가 워낙 좁아 농지에 비해 농민이 많았기 때문이지, 농지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은 아니다. 또 농민들은 영세했지만 일제 강점기 소작농에 비하면 훨씬 그 지위가 개선되었다. 농민들의 농지상환 부담은 미군정이 제시한 금액보다도 낮았고, 일제시대 소작으로 냈던 것과 비교해도 작았다. 5년간 부담액을 내지 못해 자기 농지를 갖지 못한 농민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농민들은 자신이 지은 양곡으로 자녀를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1945 ~ 1955년 사이에 중고등학생이 8.4배 늘었고 대학생이 9.9배 늘었는데, 여기에 연유한다. 

    이승만의 건국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의 성공적 농지개혁 역시 이승만의 모든 흠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위대한 업적이다. 이승만은 법령이 제대로 준비되기 전에 농지개혁을 밀어붙여,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갑신정변으로도 폐지 못한 양반 계층이 사라졌다. 반봉건적 토지 소유제를 타파하고 농민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했다. 이후 이루어진 박정희 대통령의 고도성장도 이승만의 정지작업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국가개혁 최고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