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이듬해 모스크바 초청돼 레닌과 면담… 금화와 홍범도 이름 새겨진 권총 선물받아
  • ▲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대통령 특사단(단장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14일 카자흐스탄 홍 장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갖고 있다.ⓒ국가보훈처
    ▲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대통령 특사단(단장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14일 카자흐스탄 홍 장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갖고 있다.ⓒ국가보훈처
    문재인정부가 올해 광복절을 기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됐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돌려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그의 유해는 오는 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정식으로 안장될 예정이다. 대전 현충원에는북한군 공격으로 전사한 제2연평해전·천안함·연평도 포격 등 '서해 용사' 55인 등이 안장돼 있다.

    그러나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홍범도 장군과 관련해서는 냉철한 평가가 요구된다. 그가 도리어 한국 독립군을 몰살에 이르게 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문제가 지적되면서다. 때문에 홍범도 장군이 현충원 안장과 대한민국장 추서 자격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제기된다.

    홍범도, 한국 독립군 대학살 '자유시 참변' 가담

    홍범도 장군에 관한 객관적 평가가 요구되는 것은 그가 소련 공산당이 당시 일제의 사주를 받아 한국 독립군을 유인·학살한 '자유시 참변' 사건에 일부 가담했다는 정황 때문이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적군(赤軍)이 한국 독립군을 포위해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한인 독립군은 한인사회당 이동휘의 선전·유도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은 4500여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하려 했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련으로부터 천문학적 자금을 지원받은 뒤 한인 무장독립군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년11월~1921년)로 있는 동안 소련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다.

    또 국사편찬위원회에 실린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편에 따르면, 이동휘당을 적군에 편입시키는 것이 레닌정권의 현실적인 한인정책이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국 독립군은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혼재된 상태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적군 산하로 편입돼야 한다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 등으로 분열돼 반목현상이 심화했다. 

    이중 사할린 출신 부대에서 소련군 편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소련군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 등을 앞세워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는 사할린 부대 편에 섰다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편으로 돌아서서 사할린 부대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르쿠츠크파 배후에는 소련 정부가 있었다.
  • ▲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훈장 추서식에서 연설하고 있다.ⓒ뉴시스(사진=청와대 제공)
    ▲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훈장 추서식에서 연설하고 있다.ⓒ뉴시스(사진=청와대 제공)
    자유시 참변 이후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실상 막 내려

    자유시 참변에서 희생된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김홍일, 문조사, 1972)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가했던 의군부 대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은 당시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아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국내로 되돌아왔고, 이 덕택에 참변을 면했다. 그러나 김좌진 역시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항일 무장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체포당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이로써 한국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1920년 이후 봉오동·청산리대첩과 같은 항일 무장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홍범도는 그 뒤로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제르 권총 등을 선물로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세윤, 역사공간, 2007). 

    자유시 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는 한인 대표로 참석했고, 여기서 레닌과 단독면담도 가졌다. 학계에서는 "레닌의 선물은 사실상 소련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나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군복은 1923년에 벗었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됐으며,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생을 마감했다.

    "홍범도, 독립운동 했지만… 자유시 참변은 '반민족 행위'"

    이 같은 홍범도의 행적 때문에 그의 공산주의 활동이나 자유시 참변 책임 등 문제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전공)는 16일 통화에서 홍범도 장군이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게 된 것과 관련 "그는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홍범도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한 바 있다.

    강 교수는 "홍범도는 독립운동은 분명 하기는 했는데,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 문재인정부 성향 사람들은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홍범도 나이가 만 53세였다"며 "홍범도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반민족행위를 했고 자유시 참변에 책임져야 할 사람인 데다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이나 임시정부 발행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 등 당초 독립운동가였던 사람들에게도 말년의 행보로 '반민족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이는데, 그럼 홍범도를 비롯해 공산주의자들은 왜 '반민족행위자'라고 안 하나.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하나만 봐서도 용서받기 힘든 사람"이라고 강조한 강 교수는 "자유시 참변은 민족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다. 홍범도를 국립묘지에 모실 것이라면 최남선도 국립묘지에 안장을 하든지 일관성이라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