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다루지 않은 이승만의 제2건국투쟁대한민국의 독립체제는 이때 완성되었다대통령 직선제-한미동맹-자유시장경제 개헌
  • ▲ 인보길 지음, 기파랑 발행. 값 19,000원ⓒ뉴데일리
    ▲ 인보길 지음, 기파랑 발행. 값 19,000원ⓒ뉴데일리

    이 한권의 책

    청년들에게 이 책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1952~1954]입니다.
    이승만 이름만 봐도 외면하게 되지요? 그는 부정선거로 종신집권을 꾀하다가 데모가 일어나자 180여명을 쏘아죽인 독재자이니까요. 게다가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매국노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굳이 알고싶지도 않고 잊고 싶은 추악한 인물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조차 떠 올리기 창피할 것입니다.


    이 책을 펴낸 저도 그랬습니다. 60년전 대학2년때 4월19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무대(현 청와대) 앞까지 갔다가 경찰의 총탄에 친구를 잃었으니까요. 이른바 4.19세대였던 저는 신문사에 입사하여 간부가 될 때까지도 지금 여러분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1995년 우리 신문사는 해방50주년을 맞아 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란 전시회는 놀랄만한 반응을 일으키며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집한 이승만의 엄청난 자료들을 추려서 두권의 책을 발간하였죠. 이승만의 생애와 그의 논설과 연설집입니다. 전시회와 함께 이 책들도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이승만의 역사는 그때까지 우리가 알던 이승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때 이승만을 다시 보기 시작하여, ‘이승만 포럼’이란 모임까지 만들어 지난 10여년간 매달 연구발표회를 진행하였고, 지금 이 책을 써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공부에 바쁜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간단히 책의 내용을 소개 하겠습니다.


    ★서론 –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


    우리가 배운 독립운동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3.1운동 역사에도 이승만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알고보니 이승만은 3.1운동을 일찌감치 기획하고 지령을 내리고 운동을 촉진시켰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몇 명의 증언과 본인의 진술이 상세합니다. 이어 탄생한 임시정부도 그의 구상이고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임시정부 출범부터 소련의 레닌이 지령한 임시정부 공산화 투쟁이 벌어지고 이제 맞선 이승만은 ‘공산당의 당부당’이란 제목으로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비판 논물을 발표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탄핵당하지요.
    박근혜 탄핵보다 90여년 앞선 시기에,, 자유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은 레닌이 만든 고려공산당이 주도하고 이승만 반대세력이 합세한 탄핵공세에 밀려나고 맙니다.
    한반도의 남북 이념투쟁은 이렇게 역사가 100년도 넘습니다. 그래서 현재 대한민국의 좌파는 ‘백년전쟁’이란 영상을 만들어 ‘이승만 죽이기’를 지속적으로 계속하는 것입니다.

    ★제1부 – 부산정치파동: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 책의 ‘위대한 3년’중 첫 해 1952년,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피난수도에서 벌어진 ‘부산정치파동’을 들어 본적이 있나요? 한국민주당 등 정당들이 힘을 합아여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 미국과 공모하였지요. 미국은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 군사작전까지 준비합니다. 당시 헌법의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선거제였지요.
    이 간접선거를 통하여 국회와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이승만은 “미국은 내정간섭 말라”며 신사대주의를 추방하려 하였고,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만들어 국민에게 직접 대통령 선출권을 주려고 대항하였습니다.
    약40일간 계속된 투쟁의 결과는 이승만의 승리였죠. 미국이 “이승만을 대체할 리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한국국회 지지를 철회하자 정당들이 두손을 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5천년 민족사 처음으로 국민이 선출한 직선제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이 직선제는 4.19까지 계속됩니다. 흔히 젊은이들은 이런 역사를 배우지 못한 결과, 대통령 직선제가 마치 80년대 소위 ‘6.10항쟁’으로 처음 실시된 줄 착각하고 있지요.

    ★제2부 – 한미동맹


    다음해 1953년 8월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됩니다. 사실 한미동맹은 일찌감치 이승만이 건국직후부터 미국에 요구했던 것인데,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한 미국은 일방적으로 전면 철군함으로써 소련과 중국의 공산군 침략을 초래하지요. 6.25남침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맥아더를 깨워 호통치지요. “내말 안들어서 전쟁났으니 미국은 빨리 와서 한국을 구하라.”
    유엔 16개국이 참전하여 소멸직전의 한국을 구출하고 휴전이 된 것은 우리 청년들도 아는바와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전개한 전략전술은 미국은 물론 중국, 소련까지 한손에 쥐고 흔드는 신출귀몰의 손자병법 같은 것이었답니다. 이승만은 오로지 이 전쟁을 통하여 반토막난 한반도를 통일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단독북진통일을 고집, “멋대로 한반도를 갈라놓은 미국은 배신자, 자유통일은 미국의 의무”라고 외치며 방공포로를 석방하여 판문점 휴전회담을 중단시키자 “이승만을 죽이라”는 처칠과 아이젠하워와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결과는 또 이승만의 승리, 그토록 동맹을 기피하던 미국을 굴복시켜 조약을 맺고 대규모 원조까지 받아냅니다. “전후복구도 미국의 의무이므로 우리는 구걸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냉전질서의 탄생을 한눈에 알아 본 이승만은 “미국은 한국을 자유민주기지로 육성하라”고 요구하고 무기한 미군주둔을 관철, 한국의 영구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공산국과 일본의 침략을 원전봉쇄하며 점진적 자유통일 노선으로 바꿉니다.
    이승만이 위대하다 함은 이점입니다. 국내 정치계는 투쟁대상이 아니라 가르쳐 이끌어야할 후진적 후배들이고, 국가독립체제 구축이 급선무인지라 그의 눈은 항상 세계정세로 열려 세계속의 한국을 확립하려는 전략전술에 집중되었던 ‘외교의 신’이었습니다.

    ★제3부 – 사사오입 개헌: 자유시장경제 헌법 제정


    1948년 건국당시 헌법의 경제조항들은 전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경제체제였습니다.
    1954년 이를 전면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바꾼 것이 소위 ‘사사오입 개헌’ 파동입니다. 당시 국회뿐만 아니라 언론과 지식인들도 경제 개헌을 반대하였습니다. 북한과 경쟁하려면 북한식 경제체제가 좋다는 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이것도 강행하였습니다. 구한말 29세때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몰래 쓴 명저 [독립정신]에서 그는 자본주의 자유경제와 자유통상, 수츨입국론을 소상하게 펼쳤습니다. 청년 이승만의 경제혁명론을 80세가 되어 실현시킨 것이지요. 왜 ‘사사오입’이란 별칭이 붙었는지는 책에서 확인하기 바랍니다.

    ★마무리 – 자유의 십자가
    ‘위대한 3년’ 동안 해마다 불굴의 신념으로 독주한 국가체제 개혁, 그것은 바로 자유민주 공화국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입니다. 이승만 스스로 말하였듯이 ‘무혈혁명’이었습니다.
    간접선거제를 고집하며 ‘독재자’라 규탄하는 국회의원들을 가르치고 설득하고 미국과 싸우며 관철한 대통령직선제, 한미 동맹, 자유시장경제 개헌은 대한민국 자유와 번영의 기초를 닦은 국가 리모델링 작업이었습니다. 저자가 이를 ‘위대한 3년’이라 칭하는 이유입니다.
    다름 아닌 건국후의 건국투쟁, 전쟁중의 독립전쟁이라고 평가해야 하겠습니다.
    “자유의 십자가‘라 함은 기독교인 이승만이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중에 독립투쟁을 벌여 자신의 자유독립 국가상을 완성시킨 불굴의 개신교 자유정신을 가리킵니다.
    이승만은 말합니다. ”누가 뭐라고 욕해도 좋다. 독재자라 비난해도 좋다. 하나님만 나를 잘못하고 있다고 책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런 기독교적 자유인이었기에 4.19때 부정선거의 실상과 학살사태을 뒤늦게 알게되자 즉각 자진사퇴합니다.

     ”내가 맞을 총탄을 젊은이들이 맞았어. 왜 부정을 해.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그만두며 한사람도 더 다치지 않겠지.“ 부상학생들을 문병한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며 뒷수습을 서두릅니다.

    하야 후 중국 장개석이 보내온 위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나는 위로 받을 이유가 없소. 불의를 보고 궐기하는 젊은 세대를 두었으니 우리나라 장래는 밝고 믿음직하다.“고.
    ”한번 나라를 잃으면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아느냐“며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쿠데타의 시행착오들을 걱정하는 여생을 보냈습니다. 하와이 호놀루루 병상에서 눈을 감을 때 마지막 유언은 신약성경의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

    이승만을 예언자라고 평가하는 선지자적 선각자의 발언을 몇 개만 인용합니다.


    ”침략주의 일본은 머지않아 미국의 알래스카나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다.“.
    (1941년 8월 출간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에서 경고,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 공격)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면 소련이 내려와 점령할 것이다.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신속이 승인하여 대비하여야 한다.“ (1940년대 미국 정부에 요구)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한반도 기득권을 인정하였다는데 사실을 밝혀라.“
    (1945년 2월 얄타회담 직후 폭로. 일본에 집중하던 미국은 뒤늦게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남반부 장악)


    ”공산당은 콜레라와 같다. 한국인의 형상을 하고서 소련이 조국이라니 소련으로 가라.“
    ”미군이 철수하면 즉각 전쟁난다.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자. 안되면 한국을 방위한다는 공식 선언이라도 해 달라.“ (건국후 1949년까지 요구, 이듬해 6.25남침 발발.)


    ”대통령 간접선거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 강대국의 간섭과 공산당 침투를 어찌 막느냐. 사대주의와 사색당파 싸움을 뿌리 뽑아야 한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중국에 공산당 국가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과 자유세계의 평화는 불가능해진다.“
    (1954년 미국 양원합동의회 연설 등 일관된 경고)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목차


    건국 대통령 이승만(화보) 주요저서와 기록들 종합.
    책을 열며  왜 ‘위대한 3년’인가
    서론-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

    01  독립만세운동의 지령 ‘이승만 밀서’
    김성수와 임영신의 증언 / 이승만 “기회 왔다, 궐기하라” / 양남兩南의 3·1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수립 / 필라델피아 독립선언과 시위 / 독립선언서 인쇄하고 낭독한 이종일

    02  임정 대통령 이승만, 레닌과 대결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비판 / 레닌식 쿠데타로 이승만 탄핵 / ‘3·1정신’ 삭제한 소비에트식 개헌 /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3일 만에 ‘반란’
    [자료 1] 최초의 반공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제1부
    직선제 개헌
    부산 정치파동, 1952

    03  건국 전야(前夜)
    ‘초대 총리는 누구?’ 조각당의 비밀• / 이승만 ‘거국 정부’냐, 김성수 ‘한민당 정부’냐 / 동아일보 첫 포문, 이승만에 개각 요구 / 한민당의 배신과 김구의 김일성 협상

    04  건국과 전쟁
    제헌 한 달도 못 돼 내각제 개헌론 / 농지개혁, 미군 철수, 개헌안 부결 / “미국이 내 말 안 들어서 전쟁 났소” / 맥아더 해임과 이승만의 대미 투쟁 / “내가 또 미치광이가 돼야겠군”
    [자료 2] 청년 이승만, ‘국제 필화 사건’에서 감옥행까지

    05  총성 없는 혁명
    피난 국회, 세비 인상에 자녀 병역 기피까지 / 전쟁 중 지방자치 선거 / 미국과 야당의 음모 / “임기중 반드시 직선제 개헌을” / 계엄령 선포… 미국에 ‘선전포고’ / 77세 노인의 ‘전방위 전쟁’

    06  국민이 뽑은 대통령
    7·4 미 독립기념일의 반전 / 대한민국 첫 헌법 개정 / 최초의 직선 대통령 / 미국과 대등한 관계 설정하기

    제2부
    한미동맹, 1953

    07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이승만의 휴전 반대 투쟁 / ‘악마의 해방구’ 거제도포로수용소 / 한미조약 요구하며 ‘단독 북진’ 비상사태 선포 / 세계가 놀란 반공 포로 석방

    08  경무대의 ‘1인 세계대전’
    고독한 투쟁 / “아이크의 결재 문서로 가져오라” / “휴전 반대하지만 방해는 않겠다, 딱 90일 동안만” / 휴전협정 조인, 한국은 서명 거부 / 고래와 새우의 동맹

    09  재건과 부흥
    자립경제 기반 구축 / “새해 1월 1일까지 통일시켜라”
    [자료 3] “공산당과는 협상 못 한다”

    제3부
    자유시장경제 개헌
    사사오입 파동, 1954

    10  경제 개헌안 제출
    휴전 무효 선언, 미국과 또 싸우다 / 통제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11  또다시 나라를 잃을 뻔
    제네바 ‘한반도+인도차이나’ 협상 / “중공군 즉시 철수, 북 자유선거 하라” / 한반도 통일 논의 결렬… “휴전 무효” 선언 / 베트남 패망… 대한민국, 이승만이 지켜 냈다

    12  워싱턴의 한미 대결
    고학생·망명객에서 국빈으로 / “한국은 원조를 구걸하지 않는다” / 마지막 깜짝 쇼 “독도 등대 불 켜라” / 받을 것 다 받고서야 한미동맹 비준서 교환
    [자료 4] 이승만 대통령 미 의회 연설 전문

    13  ‘위대한 3년’ 마지막 혁명
    헌법에 ‘국민투표’와 ‘자유시장경제’ / “통제야 물러가라” / ‘종신 집권’ 허용한 까닭은 / ‘國+家=나라집’ 재건축 성공 / 이승만 터 닦고, 박정희 다지다
    [자료 5] 청년 이승만, 또 하나의 꿈


    마무리- 자유의 십자가

    14  이승만의 경제부흥
    황무지에 건국 또 건국 / 장면, 유엔에 “경제복구 성공” 보고서 / 영성(靈性)의 카리스마

    15  이승만의 원점, 그리고 4·19
    자유의 발견: 성령·루터·웨슬리와의 만남 / “예수를 따라 목숨을 버리겠다” / 4·19는 이승만 최후의 성공작
    [자료 6] 4·19 일주일 전 이승만이 자진 사퇴를 제시한 국무회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