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혁당 사형수 김질락이 본 신영복

    신영복이 군 입대할 무렵 포섭...육사교관인 신영복에게 공산주의 학습

    배진영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1월15일 죽었다.
    통일혁명당 사건의 핵심 중 하나로  20년간 복역했던 신영복은
    1980년대 후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88년 출옥 후에는 성공회대 교수로 있으면서
    저술 및 강연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면서
    좌파세력으로부터 ‘시대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신영복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언론보도들은 그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그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책이 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김질락이 처형되기 전에 남긴 옥중수기다.
    여기에는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가 잘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어느날 이진영은 좋은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김형, 신영복이라고 하는 사람 아십니까?”
    “모르는데, 뭐하는 사람이요?”
    “<청맥>에도 왔다 간 일이 있습니다. 아마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김형께서
    기억이 잘 나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신영복은 서울상대 출신으로 천잽니다.
    현재 숙대 강사로 있는데 나이 스물 넷에 대학 강사가 되었어요.
    사상적으로 상당히 진보되어 있는데 앞으로 내가 교양할 생각입니다.” (중략)

    “그런 좋은 사람이라면 어디 내가 한번 만나 봅시다.
    다음 수요일 밤 7시경에 우리 사무실로 데리고 오시오.
    사전에 이형이 먼저 의사를 소통해 가지고.”

    수요일이 왔다. 1미터62센티가 될까 말까 한 비교적 작은 키에 몸집이 가냘픈 신영복이
    이진영을 따라 <청맥>지 사무실로 들어섰다. 회사 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의 사무실은
    두 개의 형광들이 밝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이리로 앉으시오.”
    “네.”
    “신영복씨라 하셨지요? 나 김질락입니다. 이진영씨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김선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이산보고서’라는 원고 때문에
    여기 몇 번 왔다 갔다 한 일이 있습니다.”(중략)

    “미스터 신은 지금 숙대에 나가신다지요.”
    “네.”
    “뭘 가르치십니까?”
    “경제원론입니다.”
    “몇 학년을 가르치십니까?1주일에 몇 시간이나요?”
    “1,2학년을 가르치는데 몇 시간 되지 않습니다.”(중략)

    “여기 이 형한테 잘 들었습니다만, 미스터 신은 머리 좋을 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쓰신다던데...”
    “뭐 잘 쓰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4·19 때 상과대학에서 선언문을 쓴 일이 있고,
    대학신문에 익명으로 수필 같은 것 쓴 일이 좀 있지요. 글을 함부로 쓸 수야 있습니까?”

    “아니 선언문 같은 것 쓰고도 아무 일 없었소?”
    “그래서 무척 조심했습니다. 다 걸리지 않게 쓰는 방법이 있지요.
    외견상으로 볼 때 누가 봐도 저는 순수한 자유주의자죠.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재미나는 말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지요.
    예컨대 원시사회에는 인간이 뛰어다니며 자연을 착취하며 살았고,
    좀 더 편하게 살자니 농사를 지었다. 농사 짓는 것보다는 남이 지어 놓은 농사나 재물을 빼앗는 게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부족 간에 싸움이 생기고, 이긴 자는 지배자가 되고 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그리스 문화만 하더라도 노예의 희생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그러니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는 데서 인간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지능이 발달했다.
    이런 식으로 인류역사가 계급투쟁사임을 인식시키는 거죠.
    이런 방법이 훨씬 안전하고 사회주의를 모르는 친구들에게는 잘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미스터 신은 과연 천재군요. 참 훌륭한 교육방법이오. 앞으로 미스터 신에게 좀 배워야겠소.
    미스터 신은 경제학을 전공하니까 저보다는 더 잘 아실 거라고 믿는데, 우리나라의 경제전망은
    어떻습니까?”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엉망입니다. 지난 번 로스토 교수가 왔을 때 제가 사회를 맡아보았습니다만, 한국경제는 로스토 교수의 말과는 달리 외국자본에 이중적으로 예속되어 있습니다. 외국자본과 국내 매판자본의 시장독점 현상이 날로 노골화해 가고 있습니다.”

    “미스터 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의 한국경제는 미국의 신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레닌의 말과 같이 금융적으로 완전히 예속된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독립성을 상실한 식민지나 다름없습니다.(중략) 나는 결코 인혁당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혁명의 방법론을 갖고 있습니다. 미스터 신은 나하고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으시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인혁당에 관련됐던 사람들을 몇 사람 알고 있는데,
    그들은 도무지 돼먹지 못했더군요. 너무 교조주의적이라고 할까.
    요즘 세상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곧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단기간의 훈련만 마치면 육사 교관으로 임명됩니다. 제가 훈련받고 와서 육사 교관으로 임명되고 난 뒤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육사 교관으로 임명되는 시기가 언제쯤 되겠습니까?”
    “금년 9월이면 밖으로 나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럼 이진영씨에게 연락해서 육사에 가신 후부터 만나 얘기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결합되었다. (중략)
  •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회합은 초기에는 매주 한 번씩으로 정하였으나 구체적인 회합의 시일과 시간은
    육사 교관인 신영복의 편의에 따라 신축성 있게 수시로 변경되었다. (중략)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왔다. (중략)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에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교양을 강론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혁명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도록
    경제분야는 신영복, 사회문화분야는 이진영, 그리고 나는 정치분야를 담당하여
    보다 광범위한 교양자료를 수집하며 연구 검토하기로 했다.
    나는 그들의 의식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 했다.(중략)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에 경제복지회와
    서울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하고,
    양보다는 질을 더 중요시해야 하며 당원은 항상 합법적인 인물들이 둘러싸여
    자신을 은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간 은폐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신영복에 비해 이진영은 조직에 있어 신중하다기보다는 무능한 편으로
    그가 벌써부터 쟁취해 놓았다는 동국대 조직은 별 진전이 없었고, (중략)

    나는 신영복과 이진영에게 지시하여 포섭대상자를 물색하고 이미 포섭대상자로 지목된 인물을
    다룰 경우에는 성별이나 신앙에 구애될 필요는 없으며, 무엇보다 단계적인 교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중략)

    이진영과 신영복의 교양사업이 어느 정도 진전되고 그들 스스로 조직에 착수하게 됨에 따라
    나는 이른바 간부회의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중략)

    회의가 시작되고 66년도의 사업에 대한 총화가 점검되기 시작했다.
    첫째로 조직에 있어서 학생조직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고대, 연대, 중대, 동대, 이대, 숙대 등
    서울 시내 각 주요 대학에는 이미 조직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을 만큼 민족주의 단계의 교양이
    끝난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고, 직업별로는 언론계, 학계, 방송국, 국회 등에 포섭대상자가 물색되고 있었다. 군대에는 육사, 공사, 해사, 해병대,공수단 등에 조직의 전초병이 수색전을 펴고 있었다. 사회 종교 단체로는 CCC, 불교청년회, 경우회, 동학연구회, 새문화연구회, 60년대 학사회, 청맥회 등에 조직구성원들이 투하되고 있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