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YS도 부르면 달려왔던 문화계 여걸(女傑) 전옥숙 타계소설 '남로당'의 실존 인물‥지금은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로 더 유명
  • ▲ 영화 '그대 옆에 가련다(1966)' 포스터.   ⓒ 블로그 '오태환의 그림사랑'
    ▲ 영화 '그대 옆에 가련다(1966)' 포스터. ⓒ 블로그 '오태환의 그림사랑'

    요즘 같으면 존 레논의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가 떠오르는데, 굳이 한국에서 찾는다면, 내가 아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전옥숙 여사가 그럴듯하게 부각돼요. 그 주변에는 김지하 시인, 이병주 소설가, 조용필 가수, 장일순 민주화 운동 대부 등이 맴돌았어요. 열거하자면 각계각층 부지기수죠. 전 여사는 그들 모두의 '뮤즈'가 아닐까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지난 9일 타계한 전옥숙(86)을 '한국의 오노 요코'라 부르며 칭송했다. 고인과 평소 각별한 사이였던 남재희 전 장관은 "'뮤즈' 전옥숙은 일본의 세 가지 정신적 지주인 동경대학, 아사히(朝日)신문, 이와나미(岩波)출판사와 모두 연결되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며 "당대 최고의 일본통이자 지성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월간지 '세까이(世界)'의 주간을 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씨는 매우 까다로워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매우 가려서 만난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 야스에와도 전옥숙 여사가 잘 통했다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한겨레신문 창간 부사장을 지낸 임재경씨의 말에 따르면 일본 주류 사회에선 '시베리아 유키코(雪子)'라는 이름으로 통한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선 제가 '사교계의 여왕봉(女王蜂)'이란 별명을 붙여줬죠.


    한 평생 이렇게 많은 수식어가 달린 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을 터.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벌여온 고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힘들지만, 해방 이후 격변하는 한국 사회의 도처에 '흔적'을 남겨온 전무후무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1960년 영화평론지 '주간영화'를 발행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63년에는 답십리에 국내 첫 영화 제작 스튜디오인 '은세계영화제작소'를 차렸다. 이듬해 육군 중령 출신 홍의선씨와 결혼한 고인은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 대표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부부 전쟁(1964)', '그대 옆에 가련다(1966)', '휴일(1968)' 등이 당시 고인이 제작했던 작품들이다. 남편 홍씨는 1967년 영화신용조합을 발족해 조합장을 맡기도 했다.

    70년대엔 일본으로 넘어가 출판·방송 분야로까지 손을 뻗쳤다. 74년부터 박정희 정부가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월간 '일본연구'의 발행인을 맡았고, 75년엔 문학계간지 '한일문예'와 '소설문예'를 잇달아 창간했다.

    당시 국내 문학을 일본 현지에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고인은 외교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력 인사로 등극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 후지TV 한국지사장을 지내며 방송계와도 연을 쌓은 고인은 1984년 국내 첫 독립 외주제작사인 '시네텔서울'을 설립해 다수의 TV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듬해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방영된 드라마 '웃음소리'가 '시네텔서울'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 연합뉴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 연합뉴스



    ◇ 내로라하는 고위급 인사들, '여왕봉' 한 마디에 총출동


    고인이 한국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건, 매년 개최한 송년 파티 덕분이었다. 당초 자택에서 조촐하게 시작했던 송년회가 해를 거듭할수록 참석자들이 늘면서 나중엔 홍익대 근처의 맥주집에서 열리는 대형 파티로 발전했다.

    참석자들의 면면은 보는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고인과 '골백번' 술자리를 같이 했다고 자부하는 남재희 전 장관을 필두로 시인 김지하, 재야 운동의 대부 장일순, 연출가 표재순, 김석원 쌍용그룹 전 회장,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춤꾼 이애주 교수 등, 정·재·문화·노동계를 아우른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여왕봉(女王蜂)이 개최한 연회에 얼굴을 내비쳤다.

    남재희 전 장관은 매년 백여명쯤 모이는 송년회 초청 인사들을 총 4기로 구분했다. 1기 멤버로는 김지하 시인 등 재야 운동원 인사들이 주축인 시기, 2기는 조선일보 간부들과 TV 고위 인사들이 합류한 시기, 3기는 정치권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시기로 나눠진다. 4기부터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위원, 전여옥 의원 등도 자리에 함께 했다.

    한번은 좀 일찍 가 있었더니 김근태 의원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어, 대권 후보감이 왔군' 했죠. 좀 있으니 손학규 의원이 와요. 그래서 '두 번째 대권 후보감이 오는군' 이라고 말했죠. 이어서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까지 나타났어요. 그래서 '세 번째 거물이 오는군'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국회의원 연찬회의 정도가 아니면 다 모이기 힘든 거물급 인사들이 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전옥숙'이라는 거물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인의 '미친 인맥'을 실감케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남재희 전 장관이 이태원의 크라운호텔 옆 술집에서 전옥숙, 권오기 동아일보 사장, 고바야시(小林慶二) 아사히(朝日) 신문 특파원 등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전옥숙 여사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김영삼씨를 부를까?


  • ▲ 故 전옥숙의 생전 모습.  ⓒ 뉴데일리DB
    ▲ 故 전옥숙의 생전 모습. ⓒ 뉴데일리DB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의 총재를 맡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김영삼 총재가 실제로 술집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남재희 전 장관은 "YS가 온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전 여사가 YS와 그렇게 흉허물 없이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술회했다.

    화통한 성격인 전 여사는 그 자리에서 "오늘 YS 대통령 만들기 모임을 만들까?"하는 깜짝 제안을 했다.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라 이를 만류하는 이들은 없었다. 당시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남재희 전 장관에겐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농담이었지만 전 여사의 호기로움에 말려 그도 즐겁게 잔을 부딪혔다.

    고인은 일본에서 계간지를 발행하고 후지TV 한국지사장까지 지낸 덕분에 일본 내 문학·방송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사히신문이나 NHK의 한국 특파원이 새로 부임하면 어김없이 전 여사를 찾아온다"는 게 남재희 전 장관의 얘기.

    그는 이같은 방문을 일종의 '예방'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특파원들이 관행처럼 알현(謁見)을 자처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옥숙이 지닌 영향력과 위상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일보 10일자 칼럼에도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올라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던 김지하가 석방된 날, 대학로 주점에서 전옥숙의 주최로 조촐한 술자리가 열렸다.

    이때 술기운이 오른 김지하가 앞에 앉은 선우휘를 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우휘는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당대의 논객. 그러자 대뜸 전옥숙이 김지하의 뺨을 때렸다.

    니 선우휘 때문에 목숨 붙어 있는 거 모르나?


    그러면서 전옥숙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기 직전 선우휘를 불러 '부탁할 게 있으면 하라'는 말을 건넸는데 이때 선우휘가 '김지하를 석방해달라'는 요청을 했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대한민국에 김지하의 '귓방맹이'를 갈길 수 있는 여성이 전옥숙 말고 또 있을까? "전 여사에게는 대단한 카리스마(일본어로 '겐마꾸')가 있다"는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이 실감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그쪽 세계에선 대부로 통하는 이영희(리영희) 교수가 고인을 '누님'이라 부르며 졸졸 따랐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그 이영희'가 술을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전옥숙에게 전화를 걸어 "누님, 돈 좀 꿔 줘"라고 SOS를 쳤다는 얘기는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 ▲ 시인 김지하   ⓒ 뉴데일리
    ▲ 시인 김지하 ⓒ 뉴데일리


    ◇ 소설 '남로당'에 전옥숙이 등장?

    고인은 '지리산'의 소설가 이병주와도 오랜 교분이 있었다. 이병주의 둘째 부인과도 친하게 지낼 정도로 막역했던 두 사람의 인연은 소설에서도 이어진다.

    이병주씨는 '남로당'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거기에 전 여사를 등장시키는데 이름을 '김옥숙'이라 했어요. 전(全)'을 '김(金)'이라고 바꾼 거죠.


    남재희 전 장관은 "나림 이병주는 학생 때 좌익 운동을 했던 전옥숙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김옥숙이라는 인물이 패주하는 인민군을 따라 의정부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는 대목을 삽입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 여사는 6·25 때 서울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 후 공산측이 후퇴하자 엉겁결에 휩쓸리어 북쪽으로 가게 된 모양이에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의정부 쪽으로 가다가 국군에게 투항을 했는데 다행히 헌병대장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 헌병대장과 결혼이 성사가 되고, 그 헌병대장은 대령으로 예편했습니다.


    이와 관련, 남재희 전 장관은 "오늘날의 독자들은 놀라워하겠지만, 시대상황의 변화를 고려하면, 아주 크게 놀랄 일은 아니"라면서 "전 여사가 사상적 극복을 하였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내 관찰을 종합해 볼 때 보수는 아니고 리버럴(liberal)"이라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4월 '기파랑'에서 복간한 실명(實名) 소설 '남로당'에선 '김옥숙'이 아닌 '전옥희'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기파랑은 "'전옥희'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미모의 이화여대 학생' 역시 실존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이 아흔을 훌쩍 넘긴 박갑동이 지금도 생존해 있는 것처럼, 전옥희 역시 서울을 주무대로 활동한 문화·예술계의 대모'로 꼽혀 왔다는 것.

    "그 아들이 국제 영화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유명 영화감독이기도 하다"는 부연 설명에선, 전옥희가 바로 '전옥숙'을 모델로 그려진 인물이라는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남로당'의 원본이 없는 이상, 원래 '김옥숙'이라 쓰여있던 것을 출판사가 복간하면서 '전옥희'로 수정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이병주가 출판할 당시 '전옥희'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 ▲ 시인 김지하   ⓒ 뉴데일리



    ◇ 가왕 조용필, 전옥숙을 '어머니'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


    아사히신문 한국 특파원을 지낸 와까미야(若宮啓文)가 '신문기자―현대사를 기록하다'라는 책에서 전옥숙을 '(재야 인사들의)갓 마더'라고 표현했듯이, 고인의 주변엔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송년회에 가끔 나타나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도 고인을 볼 때마다 '어머니'라는 말을 썼고, 가왕(歌王) 조용필도 전옥숙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조용필은 고인의 차녀 생일엔 기타를 직접 가져와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고인과 인연이 있는 한 언론계 인사는 "전옥숙이 과거 조용필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며 "조용필이 일본에 진출, 공연 활동을 할 때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남재희 전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옥숙 여사 작사, 조용필 작곡의 노래 '생명', '한강'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얘기가 와전돼서 일부 언론에선 "고인이 조용필의 노래 중 '서울, 서울, 서울'과 '생명'을 작사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타전하기도 했다.

    고인이 생전 조용필에게 2개의 곡을 작사해 준 것은 사실이나, 곡명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조용필의 4집 앨범에 수록된 '생명'은 전옥숙이 작사한 노래가 맞다. 그러나 '서울, 서울, 서울(양인자 작사)'과 '한강(김순곤 작사)'은 다른 이들이 노랫말을 붙인 곡들이다.

    고인이 작사한 또 다른 노래는 '서울 1987년', 조용필의 10집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6월 항쟁'을 모티브로 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82년 발매된 '생명'은 말 그대로 생명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존엄을 찬사한 노래. 원래 진혼곡(鎭魂曲)으로 쓰여졌으나 심의를 거듭하며 원안과는 다른 가사가 앨범에 실린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대중 가요에선 최초로 시도됐던 '프로그래시브 록(progressive rock)'으로, 조용필의 역대 히트곡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저 바다 애타는 저 바다 노을 바다 숨죽인 바다
    납색의 구름은 얼굴 가렸네 노을이여 노을이여
    물새도 날개 접었네 저 바다 숨쉬는 저 바다
    검은 바다 유혹의 바다 은색의 구름은 눈부시어라
    생명이여 생명이여 물결에 달빛 쏟아지네
    애기가 달님 안고 파도를 타네
    애기가 별님 안고 물결을 타네


    故 전옥숙을 어머니라 부르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다. 영화감독 홍상수.

    그는 실제 고인의 아들이다. '돼지가 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등을 통해 오늘날 예술 영화 거장의 반열에 오른 홍상수 감독은 모친과 친분이 두터운 오태석의 권유를 받고 연출 분야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 ▲ 홍상수 감독   ⓒ 연합뉴스
    ▲ 홍상수 감독 ⓒ 연합뉴스



    ◇ 문화를 키워드 삼아 남녀·좌우·국경 초월


    니체와 릴케, 프로이트의 지근거리에서 그들에게 '섬광처럼 자극을 주는 뮤즈' 역할을 했던 루이스 살로메처럼, 국내 정·재·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영감(靈感)을 주고 총기(聰氣)를 불어 넣었던 여왕봉(女王蜂)'이 오늘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은 "故 전옥숙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미모와 지성, 친화력을 그의 힘의 원천으로 얘기했다"며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으며 문화를 키워드 삼아 남녀·좌우와 국경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에서 비범한 일생이었다"고 평가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