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경찰서장과 수사라인 감찰하고 징계하라!"
  • 경찰의 내시 근성 :

    故(고)박처원을 생각하며



  • ▲ 고박처원 치안감ⓒKBS 화면 캡쳐
    ▲ 고박처원 치안감ⓒKBS 화면 캡쳐

    몇년 전에 경우회(퇴직 경찰 협회)에 갔었다.
    거기서 한 전직 고위경찰 관계자와 커피 한 잔 했다.
    물었다.

    "박처원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 시점은 이미 박처원이 숨진 다음이었다.
    생전에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그 분은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대공수사단장 하시다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으로 해임되고 처벌받은 박처원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 분이 말했다.

    "저희는 그런 사람, 선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그 양반을 때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같은 경찰 밥을 먹은 처지로서,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 속에 살인에 대한 책임과 치욕을 감당해야 했던 대선배 박처원에 대해,
    평생 양지 속에 있으며 고위직까지 오른 후배란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처원과 악연이 깊다.
    81년 3월 처음 대공수사분실 (책임자는 총경급, 당시는 대공수사단이 아니라, 대공수사분실이었다)의 고문취조실인 옥인동으로 잡혀갔다.
    내 나이 만 20살 11개월때다.
    2주 정도 빨간 방에서 쥐어터지며 보냈다.
    사방과 천장이 송송 구멍뚫린 새빨간 방음벽으로 되어 있고,
    바닥도 새빨간 타일로 되어 있는 방.
    투신 자살을 할 까봐  반 뼘 정도 폭의 창문 하나만 있는 방....
    창문 틈으로 보이는 북악산과의 각도와 거리에 바탕해서 나는 위치를 알았다.

    "아, 여기는 옥인동 종로구 보건소 부근이구나.."


    쥐어터지고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끌려왔기에,
    위치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나는 종로구 옥인동 부근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살아왔다.
    당연히,  반 뼘 정도 창문으로 보이는 북악산의 모습만으로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수 있었다. 

    처음 끌려 갔던 일은 그냥 나왔다.
    그로부터 8개월 전에 갈라섰던 지하조직 무림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새로 만든 지하조직 학림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을 지켜낼 수 있었다.

    편집자 주 : 

    광주 5.18 이후 1980년 여름에 <학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학림>은 1981년 여름 검거될 당시에 수사기관이 붙인 이름이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쌍둥이 조직이었다.
    이 글의 필자 박성현<전민학련>수도권 조직책이었다.

    80년 여름 <학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 상황을 좀 참고할 필요가 있다.

    80년 겨울,
    196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가까이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도해 온 지하 인맥이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이 인맥에 대해 수사기관은 <무림>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 전체 운동 역량의 90%가 서울대였기 때문에
    <무림>은  전체 급진운동 역량의 핵심 인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림>은 80년 봄에 조직 실체가 드러났다.
    그래서 <무림>"역량을 보존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80년 광주 이후, 80년 여름부터 "동면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동면이냐 저항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투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기존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던 <무림>에 대해 반발해서
    저항
    을 주장했다.
    이들이 <학림>을 만들었다.

    <학림>은,
    6.25 이후 처음 만들어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전투적 지하 조직]이었다. 
     
    노무현을 거짓으러 찬양한 영화 <변호인>이 다루는 <부림>은,
    <학림>의 부산지역 조직으로서 그 안에는 [노동자 파트]와 [학생 파트] 양쪽이 모두 존재했다.

    <부림>은,
    이 글 필자 박성현과 전혀 상관없이,
    <전민노련>을 만든 이태복이 직접 구축했다.

  • ▲ (서울=연합뉴스)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가운데)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학림사건에 대해 서울고법에 재심을 신청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9.7.7
    ▲ (서울=연합뉴스)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가운데)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학림사건에 대해 서울고법에 재심을 신청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9.7.7


    이태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 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와,
    DJ 정부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다.

    박성현은,
    자신이 했던 운동이
    [공산주의의 통일전선 노선]을 따랐다고 생각해서,
    <학림>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않았고,
    민주화운동 보상을 받지도 않았다.

    <학림>의 후신이,
    80년대 최대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북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 사건으로 꼽히는,
    <깃발>
    (1985년 검거)이다.

    <깃발>에 의해,
    레닌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지하 출판되었다.

    <깃발>의 후신이,
    1987년에 검거된 <제헌의회> 그룹이다.

    이 그룹에 의해,
    마르크스의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제헌의회> 그룹의 후신은 둘이다.
    하나는 민중당(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며,
    다른 하나는 사노맹(박노해 백태웅 조국 은수미 등)이다.

    한마디로 <학림>은,
    PD(북한과 관계없는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권의 출발점이다.

    PD는,
    90년 경까지는
    [김일성주의](NL = 민족해방노선 = 주체사상파)와
    맹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1980년 출발시기에서 1990년경까지
    PD는,
    북한을 [제대로된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 경까지는, 
    [평양에 대해 비판적/적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PD)와,
    [북한-전체주의를 추종하는 민족해방노선](NL)
    팽팽한 긴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6.25이후 35년 이상 숨죽여 왔던 [구세대 종북] 인사들이
    대거 지상으로 튀어나오면서
    NL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또한 북한 최고위 간첩 이선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천문학적 거액을 뿌려 <중부지역당>을 조직하면서,
    NL
    이 압도적으로 득세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양심적 통일운동 지식인]
    으로 알려졌던,
    최고급지식인 원로 김낙중은,
    이때 백만달러 이상의 돈과 권총과 난수표를 받아 챙겼다.

    이선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PD 성향 (=당시에는 북한-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가졌던
    민중당 핵심 인사를 포섭해서,
    NL과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구세대 종북]의 활성화와 북한의 공작에 의해,
    90년대 초반 이후,
    PDNL에 완전히 굴종하는 상황이 되었다.

    PDNL에 굴종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정일이 가장 공을 많이 들여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남공작이다.

    이 굴종은
    사실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망을 뜻한다.
    [김일성-전체주의]
    북한에서는,
    [숙청]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개잡듯 잡아 죽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거물간첩의 공작과 돈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안락사시켰다.

    90년대 초반 이후에 대한민국에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짜 급진 좌파-진짜 빨갱이)가 없다.
    이름만 PD일 뿐,
    모두
    [김일성-전체주의] 부역자로 보면 된다.



    81년 6월 다시 대공수사분실에 붙잡혀 갔다. 
    이번엔 남영동 분실이었다.
    반뼘 정도 창틈으로 보인 철로와 기차 소리 덕분에,
    비록 쥐어터진 채 눈이 가려져서 끌려갔지만,
    그곳이 남영동, 용산 부근일 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사방은 새빨간 방음벽이고,
    천장과 바닥은 샛노란 병아리색인 투톤 방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두 달 정도 쥐어터지며 살았다.
    (나중에 이근안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을 취조하던 이근안이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새낀 악질이야.
    큰 일 낼 놈이야.
    죽여야 돼."


    나를 취조하던 또 다른 수사관은 이렇게 맞장구쳤다.

    "민청학련은, 이 새끼가 만든 조직에 대면 새발의 피지.
    상부의 이태복이부터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태복이 아지트에서 조직 문건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얘들 못 잡았어.
    얘들은 철저한 점 조직이야.
    도대체 어디서 이런 새끼들이 튀어나온거지?"


    당시 나는 방위(공익)로 근무하고 있을 때여서,
    대공수사분실에서 취조가 끝나자 보안사령부로 이첩되었다.
    이첩되기 전날,
    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눈이 부리부리한, 
    살기가 뚝뚝 넘치는 50대 후반의 거한이 내 방에 들어왔다.
    그는 술을 한 잔 정도 걸친 것 같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빨갱이들만 잡으면서 살았어.
    내 손으로 사형까지 보낸 자들이 수십명이 넘지...
    그런데 어떻게 너희같은 젊은 학생들이 빨갱이가 되어 버린 거야?
    이건 뭔가 정부가 잘 못 한 게 있어서 그래...
    너희 같은 놈들까지 잡아 넣게 될 줄은...
    정말, 정말..."


    세월이 흘렀다.
    85년 여름에 다시 붙잡혀 갔다.
    이번엔 대공수사단이다.
    박처원이 이끄는 대공수사분실은 혁혁한 공을 세워 대공수사단으로 확대되었고,
    박처원은 몇년 사이에 총경에서 치안정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나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위장 취업해 있었다.
    원래 이때 된통 당했어야 하는데,
    한국일보 선배 김주원이,
    <말>지에 [언론보도지침](매일매일 정보기관에서 언론사에 보내던 지침서)을 폭로했다가 구속되는 바람에, 2주정도 만에 풀려났다.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연속 2명이나 구속되면,
    한국일보에서 대형 정치파업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일보의 사세는 조선일보와 비등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조선일보보다 쎘었다.
    예를 들어, 당시 조선, 동아, 중앙, KBS, MBC 등의 편집-보도국장-주필의 태반은 한국일보 출신이었다.
    한국일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공채를 실시한 언론사였기에,
    배출된 인맥이 기라성 같았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일보 43기인데,
    조선의 내 동기들은 17기, 18기였다. 

    풀려난 직후에,
    수사관이 나를 찾아왔다.
    현직 기자니까,
    특별 관리대상 쯤으로 분류했었을 것이다.
    둘이 소주를 먹다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박단장 특이한 사람이지.
    대공분실이었던 시절,
    총경이었던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어.

    우리 대공수사관들은 가난하잖아?
    간첩이 뇌물 줄 일 없잖아?
    그래서 우린 노상 테니스만 치지.
    분실 마당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그러니까 치안본부 인사과에 가서 노상 소금값을 받아 온단 말이야...
    그런데 이 치본 인사과장 총경이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어.

    [당신들은 소금만 처먹고 사나?]

    박단장이 이 말 듣고, 수사관을 보내 인사과장을 수갑채워서 끌고 온거야.
    꿇어 앉혀 놓고 가슴패기를 발길로 차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그래, 이 개새끼야.
    우리는,
    간첩, 빨갱이가 뇌물 안 바쳐서 평생 소금만 처먹고 산다.
    이 새끼..겁대가리 없이...
    새끼야, 너도 총경이고 나도 총경이지만,
    총경이라고 다 같은 총경인 줄 알아?
    이 개새끼야!]
    "


    수사관은 키득거리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왜?

    나를 쥐어패고 가둔 사람들의 두목이라면,
    마땅히 그 정도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길거리의 개생양아치한테 붙잡혀서 맞으면 엄청 기분나쁜 일이지만, 
    박처원 같은 사람이 두목이 되어 이끄는 집단에게 붙잡혀서 맞으면,
    [상대방]으로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끄는 집단은 고문과 수사로써,
    나는 음모와 혁명으로써 칼을 겨눌 수 있다.
    전사(戰士)는,
    상대방이 개생양아치가 아니라 자신과 동급인 전사이기를 원하는 법이다. 

    그 자리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박처원은 평남 용강 출신으로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때에 단신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아마 부모 혹은 집안 어른이 철사줄에 묶여 돌에 처맞아 죽는 참혹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공수사에 투신했고,
    50년대 초부터 아마도 백여명이 넘는 사람을 교수형까지 보냈을 것이다.
    그의 부리부리한 동굴 같은 깊은 눈빛,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참으로 적(敵)다운 적이요,
    전사(戰士)다운 전사 아닌가!

    편집자 주 :

    박처원은 경찰 대공수사의 [대부].
    1947년 경찰에 몸담은 뒤 40여년동안 대공 분야에서만 일했다.
    일선 경찰서장이나 시-도경국장 자리도 마다하고 오로지 대공수사에만 전념했다.

    그가 대공수사 집착은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다.
    그의 가족은 해방 후 평남 진남포에서 지주계급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 처형당했다.
    월남 직전 고향 부근 북한군 보급기지를 습격하다 체포돼 손-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단신 월남했다.

    경찰에 들어간 그는 남로당 지하조직 적발, 국회프락치 사건 등 굵직한 대공사건에 참여했다.
    위험한 대공 특수 임무를 자청, 북측의 암살대상으로 지목됐다.

    그는 1987년 5월 박종철(박종철)씨 고문사건을 은폐 지시한 혐의로 구속됐다.
    고문 가담 경찰관 수를 5명에서 2명으로 허위 진술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1996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이게 내가 아는 박처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앞에 "고(故)"를 쓴다. 
    故박처원.....  

    그가 이끄는 집단에 의해, 
    욕조 턱에 목젖이 짓눌려서 기도 유착으로 숨진 박종철은 내 조직 후배이지만,
    박종철 후배의 넋이 있다면,
    내가 박처원의 이름 앞에 "故"를 쓴 것에 대해 기꺼워할 것이라 믿는다. 

    자,
    (나는  스스로에 대해 [급진 리버럴]이었다고 생각하고,
    [실용적 관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차용한 자]였다고 생각하지만,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나같은 새빨간 빨갱이,
    나같이 토탈 3~4개월 넘게  박처원의 새빨간 방에서 보낸 새빨간 빨갱이가,
    박처원에 대해 인정하는 판에,
    평생 경찰 밥을 먹으며  고위직까지 오른 분이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그런 사람 선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선 이런 분노가 끓어 올랐다.

    "야! 이...
    니들 조직의 역사와 뿌리도 모르는...
    그럼,
    나를 끌고 가서 개처럼 팬 것은 개생양아치들이었단 소리냐?


    니가 뭔데...
    내 인생을 부정해?


  • ▲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김병권 전 세월호 가족대책위 위원장(왼쪽)과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이 19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김병권 전 세월호 가족대책위 위원장(왼쪽)과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이 19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대리기사 집단 폭행 사건에서 경찰이 보여준 행태는,
    바로 그 밸도 원칙도 없는 전직 경찰 고위직이 보여준 행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평생 양지에서만 사는 자들....
    국회 안행위원 앞에서 설설 기는 자들.....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설설 기는 자들...
    그래서 마침내  증거인멸과 개인정보유출을 태연히 저지르는 자들....
    그래서 피해자를 피의자로 둔갑시키고,
    일방 폭행을 쌍방 폭행으로 뒤바꾸고도 남을 자들... 

    이런 자들에게 권총을 차게 하고 수갑을 들고 다니게 할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다. 

    경찰을 해체하든가,
    경찰이 거듭나든가... 

    경찰이 거듭나려면 우선 자체 감사와 외부 감사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경찰청장이 옷을 벗어야 한다.
    영등포 경찰서장과 수사라인은 몽땅 대기발령시켜야 한다. 

    감찰 결과에 따라 해임하고...
    증거인멸, 개인정보유출에 대해서는 콩밥을 먹여야 한다. 

    경찰은 "합법적으로 당당하게 폭력을 휘두를 권한을 가진 집단"으로 거듭나야 한다.
    경찰은 그런 집단에 요구되는 엄정한 직업의식-책임감-공정성을 지키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아니면, 때려 치든가! 

    우리,
    전사(戰士)는 경찰이 없어진 세상,
    만인이 만인에 대해 극한 투쟁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김병권 전 세월호 가족대책위 위원장(왼쪽)과 김형기 전 수석부위원장이 19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bangmo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