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촉감이 있는 풍경IV Oil on canvas 130x161cm 2013 ⓒ백신혜
    ▲ 촉감이 있는 풍경IV Oil on canvas 130x161cm 2013 ⓒ백신혜

    백신혜의 개인전 [TACTILE LANDSCAPE]가
    오는 3월 5일부터 11일까지 갤러리 그림손에서 전시된다.

    작가 백신혜가 이번 작품을 통해 구축해가는 TACTILE LANDSCAPE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위협적 자연에 대한 방어적인 방법으로 [막(screen)]을 설치한다.
    막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직접적인 두려움의 요소를 차단하고
    자기보호와 불안정한 심리적인 부분을 거리두기를 한다.

    이번 전시에서
    수직적 나무들 위에 미세한 붓으로 수많은 털을 입혀
    마치 설경이나 무언가에 뒤덮인 것 같은 풍경을 제시한다.
    뾰족한 것들은 부드러운 형태로 변형돼 있으며,
    차가운 것들조차 온기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작가의 [막]은
    작가의 성장의 고통과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신,
    낯설고 잔인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견지해 보여준다.

  • ▲ 촉감이 있는 풍경Vll Oil on canvas 130x192.5cm 2013 ⓒ백신혜
    ▲ 촉감이 있는 풍경Vll Oil on canvas 130x192.5cm 2013 ⓒ백신혜

    다음은 전시서문 전문이다.

    보이기에서 만지기로 – 풍경화의 심적 변형

    미학박사 양효실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자연이나 풍경을 감상, 관조하는 문화적 관습은 풍경화나 산수화와 같은 장르를 통해 유지되어 왔다. 대자연의 숭고함이나 변화무쌍한 생성으로서의 대지에 대한 찬양은 오늘날 인간 주체를 압도하는 ‘환경(environment)’의 이념을 통해 더욱 그 가치를 발하고 있다. 공생과 상생의 가치를 내포한, 인간을 둘러싼 조화로운 전체에 포섭됨으로써 우리는 지성의 수고를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분리된 개별 자아의 노동과 긴장을 내려놓고 ‘환경’의 침묵으로 들어가 거대한 전체에 종속되려 할 때 인간은 삶과 화해하고 조화로운 전체와 소통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우리는 식물이나 자연을 클로즈업하는 기법을 통해 주관적 자아의 심리를 자연 오브제에 투사하는 근대적 예술가들의 관습을 참조할 수도 있다. 꽃, 화분식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가까이 잡아당긴 나뭇잎 하나와 같은 오브제는 흔히 주관적 자아의 심적 욕망을 투사하는데 사용된다. 식물은 기계적 도시의 인공성과 대비되어 죽음과 부패, 유한한 삶을 상징하는데 적절한 오브제이다. 동물적이고 탐욕스러운 욕망 ‘바깥’의 식물에 대한 주체의 심적 동일시는 관계와 사회적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피해 개인 주체의 고독과 존엄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유효한 전략이다.    

    세 번째 방향은 위의 두 가지 방향이 제시하는 문화적, 역사적 일반성과 달리 대단히 개인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텐 데, 가령 백신혜의 작업은 바로 이런 세 번째 방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은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교감하는 문제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심지어 삶의 방식을 바꾸기도 한다. 해감을 위해 다라이에 담아둔 바지락들이 주방 한 켠에서 (내지르는)소리를 들은 새벽녘 육식을 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나 물고기의 (죽은)눈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생선찌개를 먹지 않는 사람의 감수성은 타자의 생명, 생존에 대한 반응(response-ability)이 ‘상식’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소리 아닌 소리이고 눈 아닌 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리이고 눈인 것이다. 백신혜가 식물 앞에서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식물들이 자신을 바라본다고, 식물들이 자신을 유혹하고 포획하려한다고 느낀다. 한 동안 백신혜는 8월 한 여름이 시작되면 식물들 앞에서 자아가 붕괴되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상태를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 일년생 식물들의 잎사귀에서, 무성히 우거진 수풀에서 그녀는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의 시선, 목소리, 욕망을 감지했다. 그것은 식물이 생존에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고 극화하는 한여름 대낮의 공포였고, 유약하고 연약한 자연 존재들의 집요함이라는 기이한 상황에 노출되는 사건이었기에 낯선 경험이었다. 보통의 우리에게 식물은 동물보다 여리고 온순한 존재의 상징일 것이지만 예민한 작가에게 푸르고 싱싱한 녹음은 그 자체 공포인 것이다. 작가는 그 앞에서 동물로서의 자신이 패배하고 자기를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여리고 연약하고 아슬아슬한 존재의 살아있으려는 안간힘이라니! 저렇게 많은 잎사귀들의 힘으로 겨우 살아있는 존재의 탐욕스러움이라니! 햇볕과 물만으로도 부피를 늘리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식물들, 잎사귀들, 나무들. 동물의 삶은 집요함과 탐욕을 쉽게 상징하지만 번져가는 식물의 집요함과 탐욕은 낯선 것이리라. 한 여름 무성한 초록의 녹음 앞에서 누군가는 살아있음의 축복을, 누군가는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의 고통을, 누군가는 공포를, 심지어 누군가는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감각은 존재의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가에 의해 이 자명한 세계의 겹을 펼치고 추락하고 전율할 수 있다. 백신혜의 감각은 그렇게 세계의 이면을 지각했고 그렇게 작가는 한 여름 낮의 공포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와의 만남은 한 개인의 무의식 깊숙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이 드러나는 기회이기에 이제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이고 심적인 이미지와 바깥 식물의 접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녀는 식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형상들, 이미지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것은 작가의 사적이고 은밀한 기억을 호출하는 문제였고, 여리고 연약하고 유약한 식물을 경유해서 작가는 자신의 숨겨진 기억들과 다시 만났다. 절정과 소멸의 동시성을 드러내는 우거진 잎사귀들 위에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얹었다. 백신혜의 식물들은 그녀의 자전적이고 고백적인 이야기를 위한 소재, 배경, 도구, 은유로 동원되었고, 그렇게 해서 그녀만의 그로테스크한 식물 이미지가 등장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두 번째 자연을 사용하는 관습, 즉 주관적 자아의 심적 투사와는 분명 다르다. 백신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 오브제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핍진성있게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만 실재하는, 예민한 감각이 해독하는 절대적 장면으로 자연 풍경을 밀어넣었다. 그것은 위협적인 풍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고, 분노하는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인간이 드러내는 자신의 유약하고 연약한 삶의 적나라함이었다. 작가는 자신을 알아보는, 자신에게 고백할 것을 요구하는 시선에 포획당한 것이다. 그것은 박해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장면이기도 하다. 아니 박해 중에 구원이 일어난다. 한 동안 백신혜는 무성한 식물들 위에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슬쩍 얹고 그것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자신의 캔버스를 개방했다.
      
    이번 전시에서 백신혜는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변화, ‘발전’을 보인다. 이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을 압도하는 위협적 자연에 굴복하고 그 힘을 인정하기 보다는 방어를 위해, 혹은 그 힘을 감추기 위해 ‘막(screen)’을 설치한다. 그녀는 한 여름 우거진 녹음에 부드러운 털을 입히고 타자의 시각적 응시의 폭력/힘을 촉각적 부드러움으로 어르고 달래려고 한다. 자신이 비밀을 고백해야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전시에서 백신혜는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는 데 고심한다. 이를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했고 위협적 힘이 자신에게 곧장 가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방어막을 배치했다. 이번 전시는 주로 다년생 나무들을 소재로 하는데, 육중한 나무나 수직으로 직립한 나무의 몸통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 작가는 미세한 붓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털을 입혀 마치 거대한 천이나 한겨울 폭설에 뒤덮인 것 같은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뾰족한 나뭇잎들의 테두리는 부드럽게 변형되었고 생명의 집요함은 문화적 온기로 대체되었다. 그녀를 사로잡았던 응시가 사라진 화면에는 눈이 쌓인 듯, 솜에 덮힌 듯, 천으로 싼 듯 부드럽고 온화하고 여성적인 감각이 내려 앉아 있다. 시각적 폭력을 촉각적 부드러운 감촉으로 진정시키려는 시도는 일종의 유아기적 ‘퇴행’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과 그녀의 영향을 받은 위니캇(Donald Winnicott)은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유아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라는 대상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분석함으로써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천착한 프로이트를 보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아는 자아를 형성하고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상(good object)이건 나쁜 대상이건 어머니(의 젖가슴)와의 분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과도기적 대상(transitional object)은 유아가 엄마를 자기(의 일부)가 아닌 외부의 대상으로 지각하기 전까지 부재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엄마와의 일체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들로 가령 담요, 곰인형, 양모천 조각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유아는 과도기적 대상을 입으로 빨거나 어루만지는 중에 자신의 취약한 자아와 자신을 보호하는 양육자의 부재를 견딘다. 보통 4~12개월 사이의 유아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이러한 과도기적 대상과의 애착관계는 그러나 성장한 뒤에도 계속 잔류한 채 자아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성인이 된 뒤에도 분리 불안이 엄습할 때, 자아의 집요함에 고통당할 때 ‘퇴행적으로’ 등장한다. 성장한 어른에게도 과도기적 대상은 유아적 삶을 지속하려는 욕망을 증명하는 심적 투사물로 따라다닌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강한 어른이란 기실 환상이 아닐까? 우리는 고독의 고통을 견디는 어둔 방에서 과도기적 대상을 끌어안고 뺨에 부비며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하는 유아적 존재를 우리에게서 제거할 수 없다. 성장은 고통스럽고 아프고 불가능한 환상일지 모르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강력한 자아의 허구성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은 사실 자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는 모순적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흰 털이나 천으로 감싼 백신혜의 화면에는 여전히 ‘응시’가 존재한다. 그것은 핏빛으로, 블랙홀처럼 숨겨진 채로, 흰 털 사이로 제 존재를 알리고 있다. 아무리 부드러운 털로 막는다 해도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는 진실을 작가는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은 살에 박힌 가시처럼 잊을만하면 다시 아프게 현재를 찌른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작가의 어르고 달래기의 전략은 여리고 연약하고 유약한 자아의 상처와 슬픔에 대한 기억을 경유해서 유아기적 퇴행을 무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녀는 성장의 고통과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신, 유아의 좋은 엄마에 대한 갈망, 낯설고 잔인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전작과 이번 전시를 통해 일관되게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견지했다.  
    연약한 자아, 민감한 감수성은 좋은 작가를 위한 덕목이다. 그것은 견고한 자아의 위치에서 세계를 대상화하거나 세계로 도피할 수 없는 ‘무능’의 전략이기에 타자와의 관계가 중요한 재현의 윤리로 평가되는 동시대적 맥락에서는 중요한 ‘능력’일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한 이는 죽음을, 행복한 이는 불행을, 확고한 자아는 타자를, 행운은 불운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현재 결핍된 자는 평등하지 않은 삶의 고통, 에너지, 생명을 약자의 자리로 내려가 증언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일지 모른다. 시각적 세계의 폭력에 촉각적 부드러움으로 대적하는 방식은 여성 작가의 방식으로서 장점이다.

    젊은 작가에게 자신만의 회화적 이미지를 발굴하고 자신만의 회화적 은유를 찾아내는 일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일 것이다. 백신혜는 그녀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상황’을 무대화하고 재현하는 데 천착하고 있다. 그것이 보다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상징과 결합됨으로써 문화적 관습을 확장하는 쪽으로 흐르게 될지 좀 더 깊숙이 자리한 자신의 주관적 심상의 회화적 변형을 도모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게 될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