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00억 기부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 올 초 또 215억 기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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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해를 맞았다는 다소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을 만하던 지난 1월 10일 오전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서 이목을 끄는 행사가 있었다.

    미래산업을 창업하고 한때는 카이스트 이사장을 맡았던 정문술(74)회장과
    강성모 카이스트 총장 그리고 이광형(60)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등 20여명이 모였다.

    정문술 회장이 또다시 215억원을 기부하는 약정식이었다.
    현금 100억원은 즉시 기부하고,
    부동산 115억원 은 5년 기한 유증 형태로 기부했다.

    정문술 회장은 2001년에도 300억원을 기부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2001년 처음 기부할 때 정문술은 매우 이례적인 전제조건을 달았다.
    반드시 이광형 교수가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 전제조건은 그대로였다.

    이번 기부금은,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에 쓰인다.
    뇌 인지과학 인력 양성에도 사용된다.

    2001년에 기부한 300억원은,
    [IT+BT 융합기술을 개발해서 우리나라의 차세대 먹걸이를 찾는 것]
    목적이었다.
    이번 기부는 그 다음단계를 겨냥하고 있다.


  • 정문술은 2번째 기부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 미래에 대한 혜안과 인품,
    자격을 갖춘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기본이 잘 다져진 빼어난 지도자를 선발하고 교육•양성해주길 바란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을 해서 심금을 울렸다.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고 기부함으로써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돈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광형 교수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 분은 벤처기업을 운영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5남매를 두고 있으나
    일반 부모의 통상적인 보살핌 이상의 도움은 주지 않고 있다. 
    이번 기부로 개인 부동산을 모두 처분했고,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전세이다.”


    정문술은 일생의 피와 땀이 담겨있는 515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며
    그 집행을 이광형 교수에게 의뢰한 것이다.

    도대체 정문술회장은,
    이광형 교수만 그렇게 예뻐하는 것일까?

    기부를 받은뒤 보름이 채 안됐다.
    옛날 일을 기억하는 필자를 만났을 때,
    이광형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10 여년 동안 숨 죽이며 살았다.
    나도 이제 말 하면서 살고 싶어."


    2001년 300억원을 기부받아 건물을 짓고
    학과를 만들고 인력을 양성하고 연구성과를 내면서
    얼마나 그가 마음속에 고통받으며
    기부자의 뜻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고 참았던 그 모든 시절의 무게가
    이 두마디에 응축된 것처럼 비쳐줬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이제 정문술이 첫 번 기부금 사용 성과에 만족한다며
    두 번째로 이광형을 통하여 기부를 함으로써
    이광형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말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이광형 교수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필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규모가 2001년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커졌고,
    떡 하면 재벌 총수들이 억억 소리 나는 수천억을 기부한다고
    대문짝 만하게 신문지면을 장식하지만,
    재벌 총수들의 수천억과 정문술의 수백억은,
    무게가 달리 느껴진다.

    10여년이 지나 다시 거액을 기부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수백억을 기부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  5.7평짜리 연구실


    이광형 교수 연구실은 카이스트 <정문술 빌딩> 11층에 자리잡았다.
    이 건물 11층은 교수들 연구실이 있는 곳이다.
    300억 기금 운영하는 교수 연구실은 어떤 모습일까 싶었지만,
    다른 교수들 연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좁았다.
    실 평수는 5.7평이다.

    이교수는 커피 한 잔 하겠냐고 묻고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
    조교에게 차 한잔 부탁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일회용 종이컵에 따뜻한 물 두 잔을 떠 오고,
    커피믹스 하나를 들고 왔다.

    본인은 따뜻한 맹물을 마시고 방문객은 커피믹스를 타서 마셨다.
    이 학과가 교수를 통솔하는 원리를 알 것 같았다.

    지금은 학과 일에 관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사람들은 뽑아 놓으면 나보다 잘하니 그냥 놔두면 된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기금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이라도 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11층 연구실에 입주할 때도 그랬다.
    정문술 빌딩 건설 공사를 마치고 교수연구실을 나눌 때가 됐다.
    설계하다 보면 조금 넓은 방도 나오고 좁은 방도 나온다.
    카이스트 교수실의 평균은 7평이다. 
    이교수는 후배교수들에게 연구실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교수는 좁은 연구실을 잡았다.
    물론 조교사무실 이런 거는 없었다.




  • 재산을 기부할때,
    정문술은 별도 재단을 만들지 않았다.
    별도 재단을 만들면,
    사무실 별도로 두고 [사람] 쓰는 비용도 엄청나다.
    그 사람들이 10~20년 뒤 어떻게 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효율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기부금 운용은 공적인 기관이 하는게 안정적이다.
    그래서 큰 돈이 대학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기부금은 <카이스트 발전재단>에서 관리한다.
    발전재단은 채권투자 등을 벌여 이자수익을 얻으면
    이자수익의 10%를 발전재단에 떼고 사업부서에 넘겨준다.

    이광형 교수는 기부금 300억 받아 110억을 둘여 <정문술 빌딩>을 지었다.
    그 뒤에 시설 및 장비구입에 수십억 쓰고 아직도 140억을 남겼다.
    쓰라고 준 돈을 아끼고 아껴 아직도 140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쓰라고 준 돈인데 어서 쓰자고 주장하는 주위 사람들과 마찰도 생겼다.

    이광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돈이 어떤 돈인지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서 쓸 수가 없어요,
    그 분이 돈을 넘겨주면서 '자식들도 찬성했다'고 말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면서 내가 자식을 잘 기른 것 같다고 했어요.
    이 돈이 누구 돈입니까? 다 그 분 자손들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나를 위해서는 한 푼도 안써요.

    내 주머니 돈이라고 생각해서 아끼고 아껴요.”


    이러다 보니 이광형 교수가 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말을 못한다.
    이렇게 기부금을 아껴쓰고 절약하고 해서 신뢰가 더 커졌을 것이다. 
     

    2. 정문술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300억 받은 다음 이광형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개인을 위해 명예를 위해 개인의 목표를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큰 기부금을 받고부터는 이 사업의 성공이 목표가 됐다.
    사업 성공하면 나도 성공이고,
    사업 실패하면 나도 실패라고
    목표가 바뀌었다.

    그런데 성공은 무엇으로 평가될까?
    그의 해답은 매우 주관적이다.

    이광형 교수는 IT와 바이오를 접목시키는 연구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예감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두 분야를 접목시켜 융합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바이오와 전자를 어떻게 융합하나?
    말도 안된다.

    대만국립대학이 그에게 자극을 줬다.

    “1998년 대만국립대학 컴퓨터공학과에 갔습니다. 
    그런데 교수중 4명이 바이오 정보 전공하고 있어요.
    너무 놀랬어요.
    어떻게 바이오 전공교수가 4명씩이나 있느냐 물었더니

    [학과장이 결단하면 뽑는다] 해요. ”


    큰일났다 싶어서
    이 교수는 귀국해서
    우리도 그런 교수뽑자고 했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학과장도 아니고 이제 막 40을 갓 넘은 젊은 교수가
    엉뚱한 이야기 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교수들이 우선 자기 분야 교수를 뽑기를 원하고
    의사결정이 다수결로 이뤄지는 학과에서
    새로운 분야의 교수를 뽑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년 교수 충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같은 이야기를 한 이 교수의 말은 허공에 울릴 뿐이었다.

    바로 이같은 생각에 불을 지피고 가능하게 해 준 이가 정문술이다.

    이광형은,
    정문술이 <미래산업> 사장이던 시절 인연을 맺었다.
    카이스트의 총망받던 젊은 교수인 이광형
    <미래산업> 사외이사 자격으로( 이 교수는 2013년까지 사외이사를 맡았다)
    이사회가 있을 때 간간이 만났다. 

    2001년 1월 2일 갑자기 연락이 왔다.
    당장 내일 이사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하루 전에 이사회를 연다고 통보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달려갔더니  이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있었다.

    정문술 당시 <미래산업> 사장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하겠다는 이유도 놀라웠다.
    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 은퇴한다,
    주식은 뜻있는 곳에 쓰겠다,
    생산적인 것에 기부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식들도 찬성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울음이 터졌다. 비서가 황급하게 크리넥스 통을 가져왔다.
    크리넥스로 닦아도 닦아도 그치지 않는 오열이 계속됐다.
    솟아오르는 오열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은 냉방처럼 차가웠다.

    그 후에 경영권은 부사장에게 넘겨주고
    정문술은 회사 운영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

    당시 <미래산업>은 반도체 산업 발전과 함께 뜨는 회사였다.
    정문술 은퇴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명예박사를 주겠다는 대학들이 7군데였다.

    어느 날은 정문술이광형에게 말했다.
    오늘 오후 어느 대학 총장을 만나기로 했다고.
    이광형이 말했다.

    "받지마세요. 받아서 뭐해요."

    "그렇지? 그래."


    오후에 대학총장이 오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정문술은 오후 약속을 취소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정문술도 흔들렸던 것이다.

    2001년 2월 23일이었다.
    정문술이 물었다.


    “우리나라가 정보통신이 떠서 먹고 사는데 그 다음에 뭐가 될까?”
    “글쎄요, 바이오라는데 우리나라가 약해서요.”
    “바이오와 IT융합하면 어떨까?”


    가긴가야 하는 길이니,
    융합해서 다리를 놓아 찾으라는 뜻이었다.

    “그러겠네요.”


    그 다음부터 만날 때 마다,
    정문술은 정보통신과 바이오의 융합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정문술이광형에게 말했다.

     “카이스트가 그런 거 구상하고 있어?”

     “안하죠.”

     “카이스트가 안하면,
      대한민국이 안한다는거 아냐?

      이런 거 정부가 못해.
      내가 공무원의 생리를 알아요.

      민간에서 시작해야 해요.
      그러니 이교수가 구상해보세요.”


    정문술은 본인도 공무원 생활을 해 봤기 때문에,
    이런 일 공무원이 못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자기 재산을 좋은 일 생산적인 일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정문술이 준비해보라고 했으니
    이광형 교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에는 <정문술교육연구재단> 계획도 세웠다.
    그랬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재단은 안한다.
    그런 거 만들어서
    뒤로 자식들에게 돈 빼돌리고
    그런 거 많이 봤다.”


    10억을 주려나, 20억을 주려나, 하다가
    그래 통을 크게 하자고
    50억짜리 까지 제안서를 여러 개 준비해갔다.

    바이오 관련 동료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카이스트의 유명한 젊은 40대 바이오 교수들 유욱준 이상엽 이수영 조영호 교수와
    생명공학연구원의 염영일 박사가 모여 기획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광형은 자신이 바이오와 전자, 나노 분야를 알 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야 전문가 자문을 받았다.

    정문술“더 크게 해 봐” 하면서도 액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100억짜리로 키웠다.
    그랬더니 "더 크게 더 크게 해보라"고 또 채근했다.

    회사돈이 아니라 개인돈 10억원도 카이스트에 기부한 사례가 없던 시절에,
    이광형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40대 젊은 교수들은 매주 모였다. 
    3월이 가고 4월이 됐다. 
    4월 말이 되면서 
    이광형
    도 간이 커지고 돈도 계속 커지면서 
    [그 분]하고 뜻이 맞았다. 
    마침내 4월 24일, 정문술의 입에서 250억이란 숫자가 나왔다. 
    그러면서 말을 덧 붙였다.

    "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돈이 부족한 법이다.
      쓰다가 더 필요하면 말을 하세요."

      나중에 건물을 잘 짓기 위해서 50억이 더 필요하다고 하자,
      정문술은 두 말 않고 여기에 50억을 얹어서 모두 300억원으로 늘어났다.
      몇 년 뒤 정문술은 이광형에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그 때 더 통 크게 기부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워요.
     그 때 돈이 더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광형은 말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제껏 그만큼 한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 생각 말고 편히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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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돈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기부자와 협의가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고비가 남았다.
    대학본부와 다른 교수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카이스트가 놀라움에 휩싸였다.
    기부금이 들어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광형 교수도 이를 어떻게 카이스트에서 활용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다.
    여러 교수들은 학제전공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학제전공이란 전임 교수 없이 학생만 뽑아서 교육하는 방식이다.
    주위에서는
    학제전공으로 키워보다가
    잘 되면 과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키우자고 했다.
    [BT+IT]라는 신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학제전공으로 실험해보자는 의견이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학제전공이라는 것이 학문간의 융합을 실험적으로 해보자는 제도이다.

    그렇지만,
    이는 기부자의 뜻을 실현하고 결실을 얻기 어려울 것으로
    이 교수는 생각했다.
    말이 좋아서 학제전공이지,
    전임교수 없는 조직이란 허울뿐인 것이라 생각했다.
    학제전공은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을 수 없고, 교수를 뽑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임교수가 책임지고 학과를 만들어서 키워야 했다.

    한번은 어떤 교수가 이 교수에게 이렇게 따졌다.

    “그렇게 다짜고짜로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지 고집피우냐.
    학제전공 해봐서 그 다음에 학과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

    이 교수는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모래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래밭에 나무를 심고 잘 자라면 거름주겠다는 것과 같다.”

    이교수는,
    학제전공이라는 것이 결국 주인없이 흐지부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교수도 학생도 자율적으로 뽑지 못하는 "부자" 학제전공의 운명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결국 기부금을 사이좋게 나눠 쓰고 결과가 없는 꼴이 될 판이었다.

    어떤 분은,
    바이오와 정보전자를 함께 공부한다고 하는데,
    전혀 이질적인 것을 모아서 융합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겠는가,
    그렇게 해서 졸업생들이 취업을 할 수 있겠는가 물었다.
    또 어떤 원로교수는,
    학생들을 가지고 무모한 실험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융합연구가 생소한 시절이라
    그런 반응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도 논란이 되니까,
    당시 최덕인 카이스트 총장이 기부자의 뜻을 들어보자고
    대전 롯데호텔에서 회의를 열었다.
    총장, 교무처장, 관련된 분야 학과장들,
    이광형 교수, 정문술 사장 등이 모였다.
    5월 7일 오찬모임이었다.
     
    총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부금을 받고 싶어했지만,
    학과장들은
    [생소한 분야의 학과설립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학교에 일임하면 뜻을 받들어 잘 사용해주겠다]
    는 입장이었다.

    정문술 회장은,
    대학에 그냥 맡기면 안되고 학과를 만들어서
    이광형 교수 주도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마지막으로 원로급 학과장이 결론을 내렸다.

    “학과를 만드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아십니까?
    돈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이렇게 무산되는가 싶었다.
    오찬모임이 실패로 끝난 그 날 2시,
    호텔앞 커피숍 <가이야>에서 대기하던
    젊은 40대 기획위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결국 이렇게 무산되는가 생각하며 자리를 일어섰다.

    그 다음 주에 정문술 회장과 이광형 교수는 다시 만났다.
    카이스트에 학과를 만드는 것이 좌절됐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좋은 지 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전국에서 장학생을 모집해
    유학보내면서 인재를 키우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혹시 과학기술부 공무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무작정 과기부 차관실에 전화를 걸었다.
    어째서 과기부에 전화할 생각을 했는지,
    무슨 배짱으로 감히 차관에게 전화를 했는지,
    그리고 장관에게 전화하지 않고 차관실에 전화했는지
    지금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얼굴도 모르는 유희열 차관(63)과 통화를 하면서
    활용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화 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정열적이었다.

    이틀 후에 세 사람은 팔레스호텔에서 만나서 논의했다.

    정문술이광형
    “미래는 BT+IT 융합시대가 온다.
    융합분야를 개척해서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고 싶다.
    새로운 학과를 만들려고 하는데
    카이스트에서 과는 안된다고 하니 다른 방도가 없겠냐"
    고 물었다.

    유희열 차관은,
    “카이스트가 그러면 장관과 상의해보겠다”고 하고 갔다.
    당시 장관은 김영환 현 민주당의원이었다.

    며칠 후에 다시 팔래스 호텔에서 장관-차관과 회의를 가졌다.
    김영환 장관은,
    "매우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다각도로 높은 뜻이 실현되게 돕겠다,
    카이스트에 다시 부탁해보겠다"
    고 말했다.

    지난 1월 10일 정문술이 2차 기부식을 할 때 불청객임을 자임한 김영환 의원이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박수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산대 석좌교수로 가 있는 유희열 전 차관은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로 축하했다.

     

    4. 내 돈으로 화합하지 마시오.


    과기부 장-차관의 적극적인 의사가
    카이스트 대학본부에 의견이 전달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마침 6월 8일에
    카이스트 총장이 최덕인 교수에서 홍창선 교수로 바뀌었다.
    개방적이고 추진력 있는 홍창선 총장이 들어오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마침내 2001년 7월 19일 협정서가 체결됐다.

    협정서를 체결하는 날 정문술은 이렇게 말했다.

    "이 돈으로 모방하지 마시오.
    전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연구를 해서
    미래에 국민들을 먹여살릴 기술을 개발하고
    빌 게이츠 같은 인재를 길러주시요.

    비범한 사람들이 모이게 하시오.
    그런데 비범한 사람은 괴짜라서 대하기 어려우니
    인내심으로 잘 모시고 일 하시오.

    이 돈으로 화합하지 마시오.
    골고루 나눠쓰면 인화에는 좋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이 교수가 이 돈을 쓸 때
    불협화음이 나와서 내 귀에 들리면

    이교수가 돈을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정문술은,
    협정 체결 20일 만에 300억원을 모두 기부했다.

    교내외에서 각종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광형이 짊어진 고통은 줄지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새로운 사업에 왜 이런 분야를 포함하지 않느냐?
    왜 연구 참여자를 공개모집하지 않느냐?
    이광형 혼자서 그 돈을 주무르려 하느냐?
    정문술 회장의 진심이 왜곡되고 있는 것 아니냐?

    홍창선 총장은,
    주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이광형
    여러차례 위로해줬다.
    큰 일을 하다보면 다 그런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해 주었다.

    따뜻하게 격려해 준 얼굴들이 몇 더 있다.
    혹시 빈말이라 할 지라도 격려가 그렇게 크게 위로가 되는 줄 처음 알았다.

    이때 또 하나 고마웠던 사람중의 한 명이,
    앨빈 토플러이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오명 당시 동아일보 사장과 인터뷰를 했다.
    오명 박사는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고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오명 사장과 앨빈 토플러가 대담을 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크게 실렸다.





  • 대담의 주제는 정보통신산업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였다.
    결론은 [정보통신 + 바이오의 융합]이었다.
    IT+BT 융합학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란이 한참 뜨거웠던
    2001년 6월 9일자 보도였다.
    이 교수는 크게 용기를 얻었고
    그 기사를 복사해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활용했다

    협정서를 사인 한 다음 다음엔
    다시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감을 확대하기 위해
    학과설립소위원회를 만들었다.
    여름부터 가을 내내 논의했다.
    기부자의 뜻을 존중해서 [BT+IT 융합학과]를 새로 만드는 일이 추진됐다.
    9월 6일 소위원회는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침내 2001년 12월 27일 카이스트 이사회가 이를 통과시켰다.

    학과 이름은 [바이오시스템학과]로 정해졌다.
    [바이오정보전자학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보라는 단어도,
    전자라는 단어도,
    교내 반발을 의식해 쓰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MIT나 스탠포드 등 어느 유명 대학에도
    이런 학과가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 명문대학에 없는 학과,
    아무도 도전하지 못한 학과가,
    대한민국에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학과 이름에는 이광형 교수의 뜻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반대하는 논리도 가지가지인데 이런 말도 나왔다.

    "태어날 때 내 이름을 자신이 짓는 거 아니지 않느냐?
    이런 과도 다른 사람들이 이름 지어주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애매한 이름이었지만,
    홍창선 총장은 이 교수를 달랬다.

    “한꺼번에 이루려 하지 말고 일단 받아라.
    다음에 다시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

     실제로 2007년에 학과 이름을 [바이오 및 뇌 공학과] (Bio and Brain Engineering) 로 바꿨다.

    시대를 앞서가다 보니, 정문술과 이광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고비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사업가와 반짝이는 젊은 두뇌의 도전을 진심으로 도와줬다.

     

    5. 이를 악 물은 두 사람

     

    학교 내의 반대를 헤쳐나오며  이광형은 이를 악물었다.

    새로운 융합학과를 만들고 학과 소속을 옮길 때,
    그는 두가지 결심을 했다.
    그의 결심은 한 장의 부채와 한 개의 액자에 그대로 실려 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현충원에서 사 온 이 글귀는 이순신 장군이 각오를 다지면서 쓴 말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기를 각오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부채에 써 있는 글귀는 이것이다.

    “出師表”
    (출사표)


    중국 청도에 가서
    부채에 [光炯惠存](광형혜존)이라고 이름을 넣어 구입한 것이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에 있는 액자와 부채이다.
     

  •  
  • 이제부터 이광형의 목표는,
    죽어도 성공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바뀌었다.
    이광형은 말로 할 수 없는 사연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입을 열면 저항이 더 커져 사업 추진에 방해가 된다.
    오직 결과로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
    [바이오일기]라는 제목으로 된 컴퓨터 파일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10년 동안 숨 죽이며 살았어.
    나도 이제 말 하면서 살고 싶다.“

    이를 악 물기는 정문술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건네면서 정문술은 말했다.

    "이제 돈이 건너갔다. 나는 관여 안 할 테니 잘 알아서 해라."

    정문술빌딩의 기공식이 준비됐다. 장관 총장 등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
    그러나 정문술은 나타나지 않았다. 답은 간단했다.

    "잘 알아서 하라 하지 않았느냐."

    2003년 건물 준공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참석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준비했다.
    사무실에서는 출타중이라 했다. 휴대전화는 꺼져있었다.
    나중에 말했다.

    "건물이름을 [정문술 빌딩]이라 붙였습니다."
    "쓰잘데 없는 일하고 있네..."
    "그래도 한 번 와 보셔야죠."
    "국가 먹여 살릴 기술이 나오면 그 때 가서 보지요."

    그 후에 정문술은 카이스트 이사장의 자격으로 카이스트를 방문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그 때 마다 정문술빌딩을 방문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먼 발치서 바라보고 발길을 돌렸다.

    2009년이 됐다. 바이오 및 뇌공학과에서 자신있는 기술이 나왔다.
    최철희 교수팀에서 당뇨병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었다.
    8년동안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        학생, 교수들의 환호속에 정문술 회장과 그의 아내 양분순여사가 건물에 들어섰다.
    교수와 학생들이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연구결과를 설명했다.
    돌아가는 차 속에서 정문술이광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물 곳곳에 꿀벌들이 양식을 준비하듯이
    국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교수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니 국가의 미래가 밝아 보입니다.
    내 아내도 돈을 잘 쓴 것 같다고 합니다."



    6. 노름판이냐? 개평을 이야기하게


    기존 학과를 떠나 새로 만드는 학과로 옮길 때,
    이러저러한 말들이 나왔다.
    그 중 하나는,
    떠나는 학과를 위해서 뭐 좀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압력이었다.
    무언의 압력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농담반 진담 반으로
    한 뭉치 떼어놓고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해는 가는 말이다.
    이러저러한 정리가 켜켜이 쌓이는 대한민국에서
    자기가 몸담았던 조직을 위해 마음 쓰는 거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왜 없겠는가?
    더구나 마음대로 쓰라고 준 돈 아닌가?

    개인 용도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같은 카이스트 학과에
    더구나 자신이 몸담았던 학과에
    연구비를 내놓으라는 압력은,
    일면 매우 타당했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찾기 힘들고,
    압력이 점점 거세지니까
    하는 수 없이 이 교수는,
    정문술 회장에게 전화로 상의했다.

    정문술 회장은 딱 부러졌다.

    “지금 하는 말 받아 적으세요.
    단 1원이라도 가져가면 전부 회수합니다.”


    명쾌한 결론을,
    그대로 홍창선 카이스트 총장에게 전했다.
    이후로,
    카이스트의 다른 교수들이 기부금을 받을 때도
    누구도 놓고 가라는 소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진은 여러 과에서 옮겨온 젊은 교수들로 꾸려졌다.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던 교수 중
    유욱준 교수와 이상엽 교수는
    생명공학 쪽에서 벌려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올 처지가 안됐다. 

    신생 학과의 학과장은 이수영 교수에게 부탁했다.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광형 교수가 첫 학과장으로 일을 이끌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분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광형은,
    연장자인 이수영 교수가
    경륜이 더 많기때문에 리더십을 잘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고,
    사실 2년간 그렇게 해 주었다.

    이광형이 기존 학과를 나올 때
    연구실의 대학원 학생들이 모두 새 건물로 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는 무언의 분위기가 있었다.
    학생들은 용기를 냈다.
    이광형은 그런 학생들이 매우 고마웠다.

    당시 분위기를 따라 그때 학생들이 떨어져나갔으면 어땠을까?

    “학생들이 분위기에 굴복했으면,
    나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너무 아파서.”


    그랬던 이광형 에게,
    정문술 회장은 올들어 다시 한 번 큰 결단을 내렸다.
    또다시 215억원을 기부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이광형
    교수가 집행하여 성공시켜 달라는 주문이 달렸다.


    7. 예상하지 못한 안철수와의 만남


    이번에 정문술 회장이 다시 기부한 과정은 매우 특이하다.
    정문술 회장은 2001년에
    경영권을 혈연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주식의 대부분은 카이스트에 기증했다.
    그래도 남은 <미래산업> 주식 7.5%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냥 최대주주로 남아있으면서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고 참아왔던 것이다.
    회사가 잘 되건 안 되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절대 회사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사장 선임에만 간여했다.

    무색무취에
    자기 권한도 최대한 자제하면서
    힘을 응축시키는 이광형의 장점은
    정문술에게도 잘 나타난다.
    정문술 역시
    회사를 떠난 대주주였을 때도 참고 자제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광형 교수는 사외이사이면서도
    사장의 연봉을 결정하는 보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기업 감사를 책임지는 감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이교수는 10년 이상 이 역할을 계속 맡아왔다.
    회사에 영향력이 큰 위치에 있어서 직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자리였지만,
    이교수는 스스로 다짐했다.

    도를 넘어가면 내가 걸려서 넘어진다고...


    이런 면에서 이광형 교수나 정문술 회장은 닮은 점이 많다.

    정문술이 떠난 뒤
    <미래산업>의 경영은 예전같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정문술 역시 참고 끝까지 자제하고 있었다. 

    이광형 교수가
    정문술 회장이 기부한 돈을 가지고
    단 한 번 계획되지 않은 곳에 쓴 적이 있다.

    2007년에 카이스트는 안철수 교수를 영입하고 싶어 했다.
    석좌교수로 영입하려면,
    석좌교수에 걸맞는 기금이 있어야 했다.

    당시 교무처장이었던 이광형 교수는,
    <정문술 기금> 300억원 중 10억을 떼 내어
    <정문술 석좌교수>로 삼는 방안을 생각했다.
    총장과 정 회장의 동의를 받고 <정문술 석좌교수> 자리를 만들었다.
    이 자리에 안철수 교수가 임용됐다.
    3년 뒤 안철수는 서울대융합대학원으로 갔다.

    그것 뿐이었지만,
    안철수가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거론되면서
    갑자기 <미래산업>도 함께 부상했다.
    대통령 출마선언을 하지 않았는 데도
    안철수 테마주식이 급등했다.
    <미래산업>도 같이 뛰었다.
    안철수가,
    카이스트 <정문술 석좌교수>였다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였다.

    정문술 회장과 안철수는,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다.
    과거 벤처기업을 할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안철수가,
    존경하는 벤처기업인으로
    정문술을 거론한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미래산업> 주식이 뛰면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가을이다.
    <미래산업> 직원중 우리사주 주식을 팔고 회사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미래산업> 주식이 4배까지 뛰니까
    수십명이 <미래산업> 주식을 팔고 회사를 떠났다.

    하루 거래량이 전체 발행주식수 만큼 될 정도로
    작전세력들이 사고 팔던 시기였다.
    개미만 피해를 볼 것이 분명해보이는 상황에서
    정문술 회장은 이 불을 꺼야했다.

    결국 최대 주주인 정문술은 주식을 모두 던짐으로써,
    <미래산업>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마지막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작전의 열풍속에서
    정문술
    은 자기 보유 주식을 다 던졌고,
    <미래산업> 주식 작전은 그대로 사그러 들었다.



  • ▲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연구실에 걸어놓은 텔리비전은 거꾸로 달았다.ⓒ
    ▲ ▲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연구실에 걸어놓은 텔리비전은 거꾸로 달았다.ⓒ



    일부에서는 정문술이 정치 테마주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 때 불을 끄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안철수가 대선 참여를 선언하면 주가는 더욱 치솟았을 것이고,
    작전 세력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정문술 때문에 작전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정치테마주 작전이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2012년 말, 주식 매각 폭리 논란이 일어날 때 정문술이광형은 이렇게 주고 받았다.

    "내가 어떻게 그 돈을 혼자 쓸 수 있겠습니까."
    "천천히 생각하세요."

    지난해 봄에 다시 정문술 회장이,
    이 돈 어떻게 쓸까 하고 물어봤을 때
    이광형[미래전략]을 떠올렸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할 것 같았던 녹색성장
    대통령 바뀌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죄다 창조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이 것 역시 불과 4년 뒤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가을철 뒷골목을 쓸쓸히 뒹굴다가 밟히는 단어가 될 것이다.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장기 청사진은 안 보이고
    시류에 흔들리며 갈팡질팡하는 대한민국을 잡아주려면
    그래도 미래전략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회사를 경영할 때 [거꾸로 경영]으로 이름을 날린 정문술
    이광형의 이런 발상의 전환을 좋아했다.
    이광형은 TV를 거꾸로 보고 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과 집에는 TV가 거꾸로 걸려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점점 닮아가고 있었고,
    국가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의기투합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거인같아 보이는 정문술도,
    고민하는 모습은 범부와 다르지 않았다.
    고심에 고심을 이어갔다.

    고민하던 정문술은,
    지난해 가을 추석 때가 돼서야 카이스트 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이렇게 정문술은 또 카이스트와 인연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이었다. 번민은 가을 내내 이어졌다. 만날 때 마다 이렇게 던졌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바뀐다.
    힘들다.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
    하루 속히 결행해버려야 하겠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힘들게 했을까?
    이 모습을 곁에서 줄곧 지켜본 이광형은 이렇게 진단했다.

    "부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말 때문이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10여년전의 약속이죠.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싸우는 모습이 처절해 보였어요."

    정문술이 인터뷰에서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한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광형도 2차 기증식에서 이렇게 격려해줬다.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편하게 사세요.
    하고 싶은 것 맘대로 하시고,
    쓰고 싶은 것 맘대로 쓰세요." 

     

    8.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이광형 교수는,
    지금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벤처기업을 여럿 성공시킨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 교수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성공시킨 회사들이 즐비하다.

    세계적인 인터넷 게임회사인 <넥슨>,<NC소프트> 그룹의 김정주 군,
    세계 2대 CCTV 녹화기 제조회사인 <아이디스>, <Kortek>, <HD Pro> 그룹의 김영달 군,
    <네오위즈>를 공동 창업한 신승우 군,
    <인젠>, <해커스랩>의 김창범 군과 김병학 군,
    <올라웍스>의 김준환 군 등이다.
    이들이 현재 올리는 연간 매출이 약 2조5,000억이고
    창출한 일자리가 7,000명 정도 된다.

    바이오 융합 관련 벤처기업도 성공시킬 법 하지만,
    아직은 창업할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학문적인 성과와 이론연구는 세계수준이다.
    어느 교수가 며칠전에도 <네이처>에 논문을 실었다.
    그러나 창업할 만큼 거기까지 못갔다.
    기술이 나왔어도 돈벌이 하지는 못해요.
    내부를 보면 약점이 있어요.
    기본 방향은 공학인데,
    국민 먹여살릴 것 만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큰 성과는 오히려 인력양성에서 나왔다.
    졸업생들은 좋은 직장을 찾고 교수요원들도 많이 나왔다.
    삼성과 LG가 최근 바이오 산업 육성시킨다고 하는데,
    여기 졸업생들이 많이 가니까
    그런 목표 설정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아직 바이오 및 뇌공학과는 갈 길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응용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뇌 인지 분야를 더 강화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던 융합학과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고 살았던 이광형 교수,
    오직 답은 결실을 보여줘야 했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다시 큰 짐을 지게 됐다.
    이번에도 기부자의 뜻과 달리 이광형 교수가 개인 이익을 위해 멋대로 한다는 말이 들린다.
    10년간 살얼음 걸으며 살아왔는데,
    그가 또 다시 그런 부담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는 말 못하는 스트레스를 다시 일기에 적기 시작했다.

    이광형 교수가 말하는 성공은 매우 특이했다.

    “기증자가 만족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주관적이지만, 그 분이 만족하면 성공이죠.”



  •  

    정문술 회장이 기부한 이후 카이스트에는 크고 작은 기부가 줄을 이었다.
    그 중에는 2010년에 100억원을 기부한 오이원 여사도
    이광형 교수를 알게 되어 카이스트에 기부하게 되었다.
    오이원 여사는 마지막 결단을 할 때 말했다.

    "이 교수 얼굴을 보니 헛 돈 안 쓸 것 같습니다.
    이 교수 믿고 결심하려 합니다."


    이런 말을 사람들이 아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믿겠어요? 또 묻는 사람도 없고요.
    오히려 기부금에 조건을 달아왔다고 탓하더군요."

    필자가 이 교수 연구실을 찾아간 날,
    이 교수는 발신자 이름을 가린 채 엽서 한 장을 살짝 보여줬다.
    현재 대화중인 사안이라고 했다.
    이 교수에게 "생각을 재고해 보라"는 구절도 보였다.
    주위 환경이 이 교수가 이 분의 높은 뜻을 받아 알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고 한다.
    편지 곳곳에 아쉬움의 표현이 서려있다.

    인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숭고한 뜻이
    무산되는 것 같아 마음이 흔들린다고 한다.
    한 번 더 욕을 먹으며 또 다시 나설까 하다가도
    마음을 독하게 먹고 참는다고  한다.

    첫 기증자가 만족하지 못했다면
    기부 행렬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광형은 이런 기부금이 이어질 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성공하고 있구나...'
    비록 한 번도 입밖에 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정문술 회장이 기부한 이후 
     50억 이상 주요 기부자
    (이름, 연도, 약정액, 용도)


    1. 정문술 = 2001/2014년, 515억원, 
          정문술빌딩 & 바이오및뇌공학과 건립기금, 뇌 인지과학과 미래전략대학원 기금
    2. 박병준 = 2007년, 1000만달러, KI빌딩 건립기금
    3. 류근철 = 2008년,  578억원, 류근철스포츠컴플렉스 건립기금
    4. 김병호•김삼열  = 2009/2011년, 350억원, 김병호김삼열 IT융합빌딩 건립기금
    5. 조천식 = 2010/2012년, 155억원, 조천식 녹색교통대학원 기금
    6. 오이원 = 2010년, 100억원, 이원 조교수 기금
    7. 이수영 = 2012년,  80억원,  이수영국제교육프로그램

    [사진출처=카이스트,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