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2013/03/25] 발제

    시민의식 선진화, 어떻게 할 것인가?

    박일영[가톨릭대학교]

    1. 서론: 한국사회의 선진화와 시민의식의 성숙

    개인의 삶이 크고 작은 난관을 겪으며 살 듯, 종류와 형식이 다를 뿐 모든 공동체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늘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과 경험 안에서 사회 문제를 서로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에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이슈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 가운데 지금 우리 사회가 우선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김수환 추기경이 삶을 마감하면서 남긴 말,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는 우리 사회에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감사와 사랑을 일상의 가치로 재발견하고, 장기기증과 같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실천을 소중한 가치로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감사와 사랑, 정직과 성실, 배려와 나눔이라는 덕목이 사회를 선진화하고 인간을 성숙시키는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새삼 일깨운 것이다. 그가 한국인에 대해 누누이 강조한 말들이 있다. “한국 국민이 부지런하고 각 개인의 재능이 뛰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민주화도 성취하는 등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직성과 준법정신이 떨어지고 남을 배려하는 관용의 태도가 부족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런 부분을 메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언술과 행적은 성숙한 시민사회로 발전하고 선진화된 민주사회를 이루어 나가려는 이 시대의 요청과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화를 향해 한 단계 더 발전해 나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각 개인이 자기발전을 도모하면서 자아완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공동체로서 모든 국민의 행복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사회로의 도약을 모색 중이다. 선진 시민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민주‧시민사회를 향한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의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겠고, 둘째, 민주 시민의식의 함양을 통해 개인의 양심 회복과 인격적 성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접근방식의 구체적인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사회적 덕목과 시민정신의 실현을 위한 실천방안을 도출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토대 위에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함양할 수 있다. 그리하여 1) 정직과 성실을 내면화하는 도덕성 회복과 2) 질서를 생활화하는 준법정신의 함양, 그리고 3)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2. 시민의식 선진화의 방향성

    시민의식 선진화의 방향은 민주‧시민사회를 향한 윤리적 토대 형성과 실천적 덕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세계화시대로 접어들어 무한 경쟁이 불가피할수록 성숙한 시민사회를 저해하는 갖가지 복합적 요인이 나타난다. 이를 극복하여 선진화된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 사회의 주체로서 우뚝 서려는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격 성숙과 도덕 실천을 통해 신뢰도를 높여 나가는 길만이 세계 속에 빛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핵심기저로 작동한다.

    성숙한 민주‧시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사회 시스템이 공정하게 구축되어야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시민 사회의 윤리적 토대 형성을 위한 이론적 모델들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규범이나 지침이 우리 사회의 실천 덕목으로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마음 깊이 다가갈 수 있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당위성과, 이를 실제 삶으로 보여준 귀감이 되는 본보기의 제시가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김수환 추기경은 이러한 본보기로 적합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60년대 이후 전개된 우리 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그에 따른 희생 그리고 그 결실로 이룩된 현대 한국사회의 가치 실현을 대변한다. 따라서 그가 평생의 삶으로 보여준 모범은 선진 사회를 향한 우리의 윤리적 공감 의식 표상에 적합한 모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된 민주사회, 즉 선진화 단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정직과 성실 그리고 양심을 따르는 준법정신의 고양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토대 형성의 근거를 인간 존엄성에서 찾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가 삶의 지표로 제시한 감사 • 사랑 • 나눔은 이러한 가치를 실천하는 실천규범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선진화를 향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 제도적 시스템 작동과 민주시민의식의 함양을, 우리 사회에 널리 공감을 불러일으킨, 귀감이 되는 본보기들을 통하여 모색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표상이 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윤리규범과 실천덕목을 내면화하여, 올바른 가치체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실종된 시민의식의 회복과 선진화를 위한 활동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 구체적인 윤리규범과 실천 강령으로 부각된 사회적 덕목과 가치들은 민주‧시민사회 형성을 위한 시민교육과 캠페인의 주요 콘텐츠를 이루게 된다.

    3. 시민의식 선진화 윤리규범

    가치관의 전도로 인해 시민의식이 실종됨으로써 발생하게 된 기본적인 덕목의 결핍을 일종의 ‘한국병’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병을 치유하지 않고는 진정한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는 선진화에 걸 맞는 성숙한 사회의 실현이 관건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의식이 실종된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는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시민의식을 일깨우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윤리규범으로 추출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리에 대한 감사, 둘째,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존중, 셋째, 양심에 대한 일깨움.

    3.1. 진리에 대한 감사 - 절대근거의 식별

    우리나라가 올바른 선진 사회로 변화되기를 염원한다면 정직과 성실 등 사회적 실천덕목의 내면화를 통한 성숙한 시민사회의 형성이 불가결하다.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바탕으로 제시할 수 있는 첫 번째 규범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하는 확실한 잣대로서 절대 ‘진리[天/하느님, 法/다르마, 道, 本, 뿌리]에 대하여 확실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동의하며 감사하는 마음가짐’[報本]까지를 갖는 것이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인식은 지성의 영역에 멈추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무한자에 대한 맛봄(taste of the infinite)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감성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실, 이렇게 감지(感知)된 진리를 공유(共有)하는, 즉 공-감(com-passion)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의시키는 과정이 가장 높은[宗] 가르침[敎]인 종교의 심층 내용인 영성(靈性 spirituality)의 영역을 이룬다. 그렇게 진리에 대한 가장 높은 가르침은 특정 종교 교단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한결같은 진리에 대한 감사의 마음가짐’을 지니게 만든다.

    그러한 확고하고 분명한 잣대가 확실하게 인식되어 체득되고 제시될 때, 인간존엄성에 대한 확신 및 인권에 대한 소신도 흔들림 없이 갖추게 된다. 당연한 귀결로, 올바른 양심의 일깨움이 가능하여 자발적인 준법정신이 따라오게 된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하여, 이러한 진리에 다가가는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처럼 깊은 고뇌는 진리의 절대 근거와 그를 따르는 인간, 그러한 인간과 공동체의 관계를 통찰하는 구도자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찾는 사람이 지닌 윤리규범의 뿌리 또는 배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사회질서의 혼돈과 가치의 충돌양상이 고조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치선택의 기준이요, 바탕으로서 진리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더욱 깊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주여 우리 겨레를 돌보소서.
    우리 길을 밝혀 주소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깨우쳐 주소서.
    분노에 찬 표정들입니다.
    주여 우리의 진공상태를 채워줄 진리는 어디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마음의 공백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김수환 추기경의 메모, 1972년].
    [이하: 별도의 표시가 없는 경우, 김수환 추기경의 글에서 인용].

    인간의 본성 자체가 정신적 진공상태를 참을 수 없다.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서는 확고한 가치관이 필요하다. 즉, 오늘날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묻고, 과연 그러한 가치가 선진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의식의 확고부동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곰곰이 따져 물어야 한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에 물질주의가 팽배하지만, 물질이 최종적인 가치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진리라는 기준이 사라져버린 ‘결핍과 실종’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과 정립이 절실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시민의식의 각성 혹은 마음의 방향전환[回心]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서, 이러한 각성과 전환을 이루기 위한 바탕에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선진사회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인간존엄성을 인정하며, 진리를 따르고, 양심을 일깨우는 집단적인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를 빼놓고 따돌리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규범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를 위한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보편적인 천부적 사랑의 바탕이 되는, 진리에 대한 감사의 마음가짐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하는 윤리규범이요, 삶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3.2. 인간의 본질에 대한 존중 - 기준가치의 선정

    절대 근거로서의 진리가 규범의 기준으로 식별되고 정립된 이후의 과제는 바로 그러한 참된 진리에 따라 인간이 지닌 본질적 가치를 존중하겠다고 확실하게 결정하고 결심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치열한 경쟁 시스템은 사람들의 잘못된 행복 도식 속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사람 10명 중 8명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이라는 질문에 ‘돈’을 첫 번째로 꼽았다. 돈을 많이 벌려면,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려면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대학에 가려면 높은 성적을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보상이라는 행복의 도식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왜냐하면 돈이 행복을 무조건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삶에 쫓기며 살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순위 경쟁에 내몰리고 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배운다. 그래서 열심히 경쟁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도 취직을 해서도 이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전의 승리에서 오는 행복은 잠시 뿐, 새로운 경쟁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투를 벌여야 한다.
    나는 왜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 단지 부모님이 시켜서,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였을 뿐,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이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지치기 시작했다. 목적도 없이 망망대해에서 노만 열심히 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학교의 강제적인 교육방식에 의해 대학입시까지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후 이제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생활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학점도 잘 받아야 하고 취직을 위해 자격증도 필요하고 여유가 된다면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한다. 이러한 상황의 반복에서 나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S 대학교 신입생, 나에게 행복이란?, 2012년].

    이제 우리는 물질보다 인간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켜야 할 시점에 다다라 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물은 사용하라!”(People are created to be loved, things are created to be used).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내적으로 깊은 인식과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여야 한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생각해볼 만한 예화가 있다. “망망대해에서 여객선이 조난을 당했을 때 마지막 구명보트에 한 사람만 더 탈 수 있다면,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와 정신박약자 가운데 과연 누구를 구조해야 하겠는가?”

    “여기 답은 물론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버나드 쇼가 살아남아야 한다.’와 ‘정신박약자가 살아남아야 한다.’입니다. 먼저 쇼가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왜 그렇습니까? 정신박약자는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쇼는 더 많은 작품으로 인류 문명에 더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 쇼는 스스로 희생되고 정신박약자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왜 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보여준 그 인간애는 쇼의 과거, 현재의 작품, 미래에 쓸 어떤 작품보다도 인류에 더 공헌할 수 있고, 살신성인의 정신이 오늘의 이기적 인간 사회에 불멸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가치관 중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전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일종의 엘리트 사회관입니다. 그러나 약자의 생명을 짓밟고 살아난 쇼의 인생관은 무엇이겠습니까? 쇼가 자기가 살기 위하여 정신박약자를 밀어내고 구명대를 차지하였더라면 그 사람의 인품은 무엇입니까? 그가 글로써 말한 인간애, 인본주의, 이런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닙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한 자, 사회발전에 구체적인 이바지를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더 연장시키면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병약자, 불구자, 노약자, 문둥병자, 폐병환자 등 모든 약자는 제거되고, 건강한 자, 두뇌가 우수한 자, 예컨대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운동선수, 과학자, 기술자, 저명한 학자, 경제가, 재벌, 힘센 자, 한 마디로 권력자, 금력자 등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이겠습니까? 치열한 경쟁 사회, 약자는 도태되어 죽고 강자만 살아남는 사회, 즉 약육강식의 극도로 이기주의적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회가 추구하는 문명이란 무엇입니까? 물질문명입니다. 고도의 물질문명을 이룩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짓밟고 인권을 유린해도 관계없는 유물론적 문명입니다. 인간다움은 없습니다. 탁월한 두뇌, 지성은 있어도 정신은 없을 것입니다. 성애(性愛)는 있어도 참으로 인간다운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혼이 타락한 사회, 마음이 메마른 사회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자, 약한 자, 불구자, 노약자 등 사랑과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인간이 설 땅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무용지물이요, 다 잉여존재이기에 폐물로 도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오로지 권력과 금력을 추구한 나머지 모두가 그 권력과 금력의 도구와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어떤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 국민대학교, 1995년 9월 14일].

    이와 같이 인간의 초월적 가치를 중시하는 견해는 이에 역행하는 한국 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하여 비판적 안목을 제공한다. 인간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를 우선으로 삼는 사회의 모습을 경계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발전을 앞세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공공성과 개인의 내면성을 통합하여 ‘인간화된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인간존엄성의 궁극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 자신 스스로의 가치가 얼마나 존귀한지 알게 되고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우리는 왜 모든 인간을 그가 잘났든 못났든 관계없이 아무리 가난하고 약해도, 부족한 자, 장애자라 할지라도 또 큰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인간인 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거기서 인간존중, 인간 사랑이 자연히 우러납니다. 이런 인간관을 오늘의 지성인들, 언론인들, 정치인, 경제인 모두가 지닌다면 우리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새로이 태어나고 새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동성 언론인 송년회 강연, 외신기자클럽, 1994년 12월 12일].

    3.3. 양심의 일깨움 - 준법정신의 앙양

    강력범죄 발생 원인의 대부분은 물질을 더 우선시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개인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물질은 가장 우선된 선택의 준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래와 같은 청소년들의 윤리의식 지수는 우리 사회의 물질 만능 풍조를 되돌아보게 하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초‧중‧고교생 각각 2,000명을 대상으로 윤리의식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 고등학생 44%는‘10억 원이 생긴다면 1년간 감옥행도 무릅쓰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학생은 28%, 초등학생은 12%가 같은 대답을 했으며 이외에도 학생들의 응답을 기초로 '정직지수'를 산출한 결과 초등학생은 85점, 중학생 75점, 고등학생 67점으로 나타났다. 학년이 높을수록 윤리의식도 낮아지고 있는 셈이다. 문항별로는 ‘남의 물건을 주워서 내가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초등학생 36%, 중학생 51%, 고등학생 62%였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부정행위 인식도 학년이 높을수록 급격히 악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초등학생 16%와 중학생 58%, 고등학생 84%가 ‘인터넷에서 영화 또는 음악 파일을 불법 다운로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중‧고교생 5% • 24% • 35%가 ‘시험성적을 부모님께 속여도 괜찮다’고 답하고 있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2012년 청소년 정직지수, 2012년 12월 20일].

    기성세대의 경우에도 이러한 풍조는 만연해 있다. 근현대 이후 한국 사회에는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부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시민 각자는 양심의 대오각성과 동시에 준법정신을 앙양하여야 하고, 정부에서는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에 입각한 정책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정직과 성실. 옛날 김천 유장주 회장 도정공장 - 독일제 모터. 성주의 E신부님(독일인). 독일제에는 고장이 날 수 없다는 확신. 지금 우리: 일제는 좋다. 국산보다 더 낫다는 인식. 봉OO 회장, 일제 선물을 가져와서, 이것은 차고 있으면 건강에 좋답니다. 일본 사람의 말이니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안 하니... 이렇게 우리도 일제는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있다. [중략].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의 정직성을 믿지 못한다. 일본인은 정직하다. 이것은 상품에 관한한 거의 통념이 되어있다. 우리는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발전은 부지런함과 함께 정직에 달려있다.”[2004년의 육필일기 중에서, 『김수환추기경 일기수첩』, 2012년]. 

    한국 국민이 부지런하고 각 개인의 재능이 뛰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정치민주화도 성취하는 등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정직성과 준법정신이 떨어지고, 남을 배려하는 관용의 태도가 부족한 점은 아쉬운 사실이다. 이런 부분을 메워나가는 양심의 일깨움, 국민적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고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간존중의 정신은 이와 같은 일깨움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간존엄성을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윤리적 규범이 이미 하늘로부터[天賦的으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확신에서부터 출발할 때 힘을 받을 수 있겠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같이 천부적으로 이런 도리, 즉 윤리규범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져 있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요, 저만의 소신이 아니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소신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을 닮도록, 당신을 섭취하며 살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올바르게 삽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이 각자 양심에 새겨져 있습니다. 뿐더러 각자 이 양심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하고, 이때에 그는 참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인천 청소년 신앙대회 강연, 1982년 6월 11일].

    우리 사회의 혼란한 가치질서를 바로잡고 준법정신이 존중되는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서는 ‘진리[法]를 따르는[遵]’ 양심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 즉 준법(遵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참된 진리[양심의 법]인지가 먼저 밝혀지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알려져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윤리규범은 그 절대적 근거와 기준이 되는 진리에 대한 신뢰와 감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인간의 가치에 대한 존중과, 그에 따른 양심의 각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확실하고 분명한 바탕 위에 비로소 이를 실천하는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윤리규범의 확립을 일종의 기초공사라고 본다면,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방안으로서 실천 덕목은 윤리규범과 상응관계를 이루면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 구체적으로 실행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해의 틀은 규범 따로, 덕목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서로 밀접히 연관된 모습으로 짜여 있다.

    4. 시민의식 선진화 실천덕목

    한국의 ‘경제기적’은 너무나도 불리한 여건 속에서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 과정 속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시되고 부정부패가 끼어듦으로써, 정의가 실종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이 조장되기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발언은 가치관의 전도로 시민의식이 실종되어있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던지는 경종인 동시에, 윤리규범이라는 분명한 기준[잣대]를 적용하여 실천하는 해법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 아래 중대한 고비에 서 있다. 물질적 가치가 앞선 가치관 전도 속에 날로 늘어나는 것은 불법, 무질서, 부정부패, 인명경시, 성폭행, 마약과 폭력행위 등 온갖 범죄와 사회악이다. 윤리와 도덕은 살아나야 하고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황금만능의 가치관을 타파하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참으로 인간이 존중되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인식전환과 의식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깨끗한 사회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민적 화합이 착실히 점진적으로 이룩되어 가면서 경제도 힘차게 발전할 것이고 마침내 우리 모두의 염원인 통일도 달성되어서 만방에 빛나는 대한민국을 이룩할 것이다.[종교지도자 초청 심포지엄 강연 요지, 신라호텔, 1992년 10월 27일].

    인간에 대한 사랑, 정직과 성실의 실천, 배려와 나눔의 봉사가 상호 작용을 하는 실천덕목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선진화 과정에 지혜를 더해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덕목은 인간존엄성과 상응하며, 정직과 성실은 양심의 각성이라는 규범과, 그리고 배려와 나눔은 진리에 대한 감사와 상응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덕목의 실천은 각 개인의 가치를 재정립하여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우리 사회를 선진화하는 데 밑받침하여 줄 것이다.

    “양심, 진리, 그리고 인간적인 기본 자유가 회복되어야 한다. 정의가 다시 이룩됨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너무 큰 격차가 사라져야 하며, 경제성장의 속도가 좀 늦춰지더라도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연설, 로마, 1974년 10월].

    이렇게 보면, 선진화를 위한 시민의식의 실천덕목이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진리의 정의로운 보살핌을 향하여 열려 있는, 종국에는 완전한 평화를 우리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4.1. 인간에 대한 사랑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인간 경시 풍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자살률의 급증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반인륜적 강력범죄 등 인간 생명을 소홀하게 다루는 사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낙태의 문제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 연간 낙태 시술 건수는 34만2433건이고, 그 중 기혼 여성은 약 20만 건(58.0%), 미혼 여성은 약 14만 건(42.0%)으로 기혼 여성의 낙태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낙태율은 OECD 국가 중에 가장 높은 수치이다. 2005년 기준으로 한해 출생아 수가 43만5천명임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보건복지부,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수립 보고서, 2005년].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사회는 모든 이를 살아나게 한다. 내 이웃을 버려두지 않는 사회는 모든 이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고 저항력도 없는 태아, 오히려 우리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할 그 귀한 어린 생명을 죽여 가면서 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락, 물질적 행복,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 발전을 어느 정도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온갖 반인륜적 범죄, 인간 생명 경시의 풍조가 지금 극에 달해 왔습니다. 가장 생명을 사랑하고 아껴야 할 어머니들이, 또 생명은 잉태된 순간부터 존중하고 지키겠다고 서약한 의사들도 상당수가 그 생명을 예사롭게 죽이는 사회 속에서 그것을 또 방치할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는 정치 사회 풍토 속에서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온갖 반인륜적, 반생명적 범죄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의 근본문제」, 『김수환추기경 전집』, 2002년].

    인간 사랑의 근거는, 위의 윤리규범에서 밝힌 바대로, 천부적인 인간존엄성 그 자체이다. 인간의 가치를 양보할 수 없는 절대 기준으로 삼을 때, 인간과 그의 권리에 대한 조건 없는 존중과 사랑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인권은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있고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인권회복은 인간회복이요 하느님의 존엄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인권 모독은 인간 모독이요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인권 회복은 인간 안에 근본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인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 인권선언일 기도회, 1974년 12월 8일].

    4.2. 정직과 성실의 실천

    역대 정권의 부침 과정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치관의 전도로 인한 기본덕목의 결핍과 그에 따른 시민의식의 실종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6월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총체적인 한국병의 대표적 사례로 진단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에는 첫째는 집을 잘못 지은 것이 분명하니 우리 건설업계가 얼마나 기술면에서 뒤져 있고 무엇보다도 얼마나 성실하지 못한가가 잘 드러납니다. 아울러 가사용 허가 준공검사와 용도 변경 허가 따위에 얽힌 행정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기업주, 건설업계, 행정 관청 일선 공무원들에게 필요한 가치관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뿐더러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어떤 가치관 부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정직과 성실의 결핍이요, 그 결과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것은 물질위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낳았고, 이렇게 돈이 제일인 사회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과 부패, 인간부재의 전도된 가치관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 엄청난 붕괴사고를 가져왔습니다. 돈이 앞서고 인간이 잊혀진 사회, 이른바 ‘한국병’이라는 부정부패로서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깊이 병들어 있는 나라, 이것이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입니다.”[목요특강: ‘어떤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 국민대학교, 1995년 9월 14일].

    특히 “인간이 잊혀진 전도된 가치관” 속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철학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한 결핍 구조 속에서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고, 선진화는 더더욱 요원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와 의식 고착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통렬하게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숙된 민주사회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이를 개선해 나가는 동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결국은 선진 시민의 출발점인 정직과 성실의 마음가짐을 소홀하게 하고 질서의식의 결여를 가져온다.

    “‘한국인은 정직하다. 한국인은 성실하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믿을 수 있다.’ 만일 세계인들이 우리 한국인을 이렇게 평하고 믿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힘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은 친절하고, 이웃을 위하고, 사랑할 줄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야말로 한국은 ‘동방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말인 줄 압니다. 이 이상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괴리는 너무나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세계화 속에서 정말로 선진국 대열에 들려면 이러한 이상을 우리의 가치관으로 삼아야 합니다.”[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강연, 1996년 6월 24일].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왜 이렇게 부정부패가 많은가? 근본 문제는 이기심과 황금만능주의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근본적인 가치관이 잊히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직과 성실이라는 삶의 기본자세를 잊고 살며, 동시에 준법정신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져도, 인간다움이 없으면 아무도 진심으로 존경을 하지는 않는다. 또한 인간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좋은 존재가 아니다. 진리의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양심과 도의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때 참 인간이 된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지 않다.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감사원 특강 요지, 2002년 1월 8일].

    “저는 정치인이든, 일반 국민이든 우리 한국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정직과 성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다. 한국 사람은 믿을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우리 이웃 나라를 비롯하여 교류가 많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한류도 없고, 자산도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들어간다 해도 한국인은 믿을 수 없다.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결정적으로 마이너스입니다. 정치, 경제, 교육 모든 것이 헛되고 나라가 거짓 위에 세워진 꼴이 됩니다. 정치인들부터 참으로 필요한 덕목은 정직과 성실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매일같이 너무나 많은 사기, 속임수 등의 불미한 소식에 접합니다.”[가톨릭신문사 80주년 인터뷰, 2007년 3월 17일].

    이렇게 볼 때, ‘정직과 성실’은 시민의식의 선진화를 위한 실천덕목의 중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성 파괴와 도덕적 해이 현상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보다 인간답고 진실 되며 정의롭고 상호간에 신의와 협력이 두터운 사회로 변화하고 한국이 세계 속에서 빛나는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관이다.  

    “흔히 21세기는 정보화, 국제화 시대로서 치열한 경쟁의 시대일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힘은 경제력과 첨단기술을 많이 꼽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직과 성실이 가장 기초적이요, 가장 큰 경쟁력이라 믿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정직하고 성실하여 세계가 한국 사람은 정직하다,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큰 힘입니까? 우리는 이 도덕적 힘으로 어떤 시련도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각 개인도 인간으로 행복할 것이고 사회도 밝아지고 나라도 세계 속에 신임도 높아져서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인제인성대상 수락 인사말, 인제대학교, 2000년 11월 28일]. 

    4.3. 배려와 나눔의 봉사

    이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 정직과 성실에 대한 강조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에 대한 열린 자세인 봉사로서 배려와 나눔은 어떻게 실천이 가능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85세 때 단순한 선 몇 가닥으로 그린 자화상 “바보야”는 가치관의 혼돈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깊은 울림과 강한 끌림의 공-감(com-passion)을 얻은 우리 시대의 아이콘(icon; 聖畵)으로 보인다. 그는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과 이에 따른 희생 그리고 그 결실로 이룩된 현대 시민사회의 가치 실현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윤리규범과 실천덕목은 우리 사회가 선진화의 길을 함께 가는데 있어서 공감(共感)을 표상하는 적합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례로, 추기경이 선종하면서 안구 기증을 한 덕택으로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되찾았다는 언론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 후, 우리 사회에서 장기 기증 신청자가 급증하였다. 그의 사후 남은 전 재산 340만원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자선의료기관인 라파엘클리닉에 기부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수많은 의료인과 자원봉사자들이 국내외 자선기관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이에게 본보기가 되는 추기경의 배려와 나눔이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던 것이다. 위의 예에서처럼, 이와 같은 규범과 덕목을 시민 각자가 성숙한 의식을 지니고 사회를 선진화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구체화하여야 한다.

    즉,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한 민주사회 즉 선진화된 사회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진리에 따르는 정직과 성실, 그리고 양심에 따르는 준법정신’의 고양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 사회의 윤리적 토대 형성의 근거를 천부적(天賦的)인 인간 존엄성에 따르는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에서 찾아야 한다. 특히 배려와 나눔은 이러한 윤리적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실천규범이 된다.

    “ ‘매일 5분씩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살 것인가? 밥을 먹기 위해 살 것인가? 입신출세를 위해 살 것인가? 사랑을 위해 살 것인가[…] 왜 사는지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히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동시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만일 우리가 모두 매일 5분씩이라도 명상을 하며 산다면,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내가 과연 그렇게 살았나 반성하며 산다면, 세상은 훨씬 달라지지 않겠는가? 훨씬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 「말씀의 이삭」, 『김수환추기경 전집』, 2002년].

    이렇게 볼 때, 시민의식의 선진화를 위한 실천덕목은 첫째, 혼란과 불의가 있는 곳에 양심의 정의를 밝히고, 둘째, 갈등과 알력이 있는 곳에 배려와 나눔으로 일치를 가져다주며, 셋째, 무관심과 증오가 있는 곳에 감사와 사랑의 문화를 살려 나가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겠다.

    5. 전망: 시민의식 선진화 운동의 제안 및 기대

    이상에서 선진화된 민주사회를 이루기 위한 시민의식의 윤리적 토대와 실천덕목들을 정리해 보았다. 진리에 대한 감사, 양심의 일깨움, 인간존엄성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은 윤리적 가치의 규범으로 볼 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사랑, 정직과 성실의 강조와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서 배려와 나눔의 자세는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발전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덕목이 될 수 있다.

    소통과 화합의 시대를 맞아, 일방적인 규제강화라든가 권위주의적인 지침의 제시는 반감과 역효과만을 불러올 뿐이다. 반면에, 귀감(role model)이 되는 인물들이 평생을 통해 보여주는 감사와 사랑, 정직과 성실, 배려와 나눔의 본보기는 성숙한 민주 시민사회로 나아가는데 불가결한 시민정신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과정에서 파급력이 매우 크다고 보인다. 선진 시민사회로 발전하기 위해 그러한 귀감이 되는 표상 인물들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은 1) 인간이 물질보다 더 소중하다는 진실, 2) 양심에 따른 정의의 실천, 3)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 등이다.

    사랑 • 정직 • 나눔은 진리 • 양심 • 인간에 근거한 윤리적 가치의 실천 덕목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우리 사회가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윤리규범과 실천덕목이란 정직과 성실을 내면화하는 도덕성 회복과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고양이라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윤리규범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에 따르는 실천덕목을 계발하여 교육과 캠페인에 활용하면 다음과 같은 전망과 기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 사회에 귀감(role model)이 될 만한 인물들의 사상과 덕목을 기초로 하여 각 분야별 선진 시민의식 교육이 가능한 공감(com-passion)의 콘텐츠를 계발하고, 중장기적으로 적용해 나갈 수 있는 실천적 윤리규범을 확립해나간다.

    둘째, 선진 시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단체들의 중장기 과제로 공동의 학술 • 교육 • 문화 • 연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시민의식 선진화 운동의 단초를 마련한다. 

    셋째, 정부 내 유관 부처와 시민사회 단체들이 네트워킹 하여 지속적으로 시민의식 선진화의 콘텐츠를 계발하고 완성도를 높이며, 각 분야별 교육과 캠페인으로 심화시켜 나간다.

    넷째, 시민의식 선진화를 위한 사업을 학술기관-시민단체-정부기구가 유기적으로 시행-평가-지원하는 순환적 과정을 통하여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여 나감으로써 선진화된 사회를 향한 학-민-관 협력의 새 모델을 제시한다.

    다섯째, 선진사회의 실현이 단순한 정책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한국 사회의 장래(將來)를 열어가는 실천적인 규범을 실질적으로 수용하여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만든다.

    여섯째, 위에서 제시한 윤리규범과 실천덕목을 성숙한 민주‧시민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민의식으로 모든 이들이 공유하여,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위험성을 방지하고 국민적 통합력을 이끌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