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1994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국군포로 자녀 김기철 씨"혜원이-규원이가 아빠를 안만나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오길남 박사가 받은 신숙자 모녀 사진, 내가 있을 당시 찍은 것"
  • '통영의 딸' 신숙자씨 모녀와 남편 오길남 박사를 월북시키는 과정에 개입한 음악가 윤이상이 북한 대외문화연락부에서 유럽 지역을 담당했었다는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가 21일 연 ‘북한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증언대회’에서 발언을 한 탈북자 김기철씨는 대회가 끝난 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위부 예심부 국장-부국장'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김 씨는 1991~1994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국군포로 자녀다.

    "국가보위부 예심부(전문적으로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는 곳) 국장-부국장이 같이 있었다. 광복거리를 조성할 때 조총련에서 온 사람들에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그들의 돈을 먹으려다 잡혀 들어왔다."

    김 씨는 "국가보위부 예심국장이 직접 '윤이상은 남조선에서 태어난 유명한 음악가가 맞다. 하지만 남조선에 환멸을 느껴 북한으로 들어와 통일전선부 산하에 있는 대외문화연락부에서 구라파 지역(유럽)을 담당했다. 오길남 박사도 윤이상한테 당했다'고 했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그 때 공작원도 한 명 만난 적이 있는데 그도 '윤이상은 김일성이 지시를 했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윤이상 음악당(김정일 지시로 1991년 3월 착공, 1992년 10월 준공)'도 크게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5월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는 기자회견을 통해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가 유엔의 임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신 씨는 1980년대부터 앓던 간염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오 씨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답변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김 씨는 "혜원이-규원이가 아빠를 안만나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4~5년을 같이 있었는데 그것은 말도 안된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 안보고프냐’고 물었을 때 규원이는 웃기만 했다. 혜원이는 ‘안보고 싶을 리가 있겠어요. 보고 싶지요’라고 했다."

    다음은 <북한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에서 출간할 예정인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 수기집'에 실린 김기철 씨의 수기 중 주요 내용이다.

    하루는 정치부 부부장이 올라와서는 내게 시간이 날 때마다 혜원-규원네 땔나무를 해주라고 했다. 혜원이네가 서독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당시에 그 집을 ‘서독집’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는 ‘통영의 딸’로 알려진 신숙자 모녀와 교류를 시작했다.

    당시 수용소 담당 보위부원들은 신숙자 모녀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다. 당국에서는 신숙자 모녀가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더욱 신경을 쓰라고 쪼아댔는데 특별히 나오는 건 없으니, 결국 수용소 측에서 알아서 챙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보위부원들이 직접 나무를 해주고 집안 살림을 도와줄 수는 없고, 다른 수감자들도 관리해야 하니, 정치부장도 국가보위부에서 안 잡아넣어도 되는 걸 잡아넣었다고 투덜대곤 했다.

    당시 신숙자 씨는 몸이 안 좋아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어린 혜원-규원 자매가 도맡아 했다. 아침도 자신들이 해서 먹고 학교에 갔다.

    한번은 자매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침을 하는데, 다 젖은 생나무라서 불이 잘 붙지 않고 집안에 연기만 가득 찬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혜원-규원네 나무를 할 때는 일부러 송진이 있는 부분을 잘게 쪼개서 갔다 줬다. 송진이 있으면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혜원-규원이는 나이도 어렸지만 키도 작았다. 그래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물지게를 지는 것을 힘들어했다. 요덕의 겨울은 유달리 혹독했는데, 겨울에는 보통 어른 허리만큼 눈이 쌓이곤 했다. 그 정도면 키가 작은 혜원-규원이에게는 목까지 오는 높이였다.

    정치부 부부장의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아이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무도 신경써서 해주고, 물지게도 아이들 키에 맞게 맞춰주었다.

    한번은 혜원이가 닭을 길러보겠다고 해서 병아리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병아리는 너무 작아 잘 기르지 못하고 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금 큰 병아리를 몇 마리 줬더니, 그것들은 잘 길러서 잡아먹었다며 해맑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국에 와서 보니, 오길남 박사가 신숙자 모녀의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사진도 내가 있을 당시에 찍은 것이다.

    신숙자 모녀가 보위부원들과 어디를 다녀오기에 애들 엄마한테 어디를 다녀오는지 물었더니 “애들 아빠한테 사진 보낸다고 해서 분주소에 가서 사진도 찍고, 편지도 쓰고 왔지”라고 대답했었다.
  • ▲ 김기철 씨가 언급한 사진이 바로 위 사진이다. 1991년 윤이상은 북한 관계자에게서 이 사진을 구해 오길남 박사에 전해줬다.
    ▲ 김기철 씨가 언급한 사진이 바로 위 사진이다. 1991년 윤이상은 북한 관계자에게서 이 사진을 구해 오길남 박사에 전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