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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장치 없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경험한 정치체제 가운데 가장 좋은 우월한 체제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우월한 체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약점도 없는 완벽한 체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약점 가운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이 허약하다는 점이다.우리나라에서는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정치인과 지식인들조차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때 그 체제의 우월성만을 말할 뿐 그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약점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정치인과 지식인들조차도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하려고만 할 뿐, 자유민주주의를 소중히 생각하면서 그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일을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부의 적의 공격 앞에 약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약점은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그 체제의 본질적 특징에서 비롯된다. 자유민주주의로부터 기본적 권리를 보장 받는 국민 가운데는 자유민주주의에 반대하면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뒤집어엎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런 내부의 적이 자유민주주의가 보장해주는 권리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면서 내부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공격을 전개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이처럼 내부의 적에 대해서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줘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더하여, 그들의 체제파괴활동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한다. 독재체제는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으며 특별수용소나 정신병원에 무기한 감금하거나 살해하는 등의 극악한 수법까지 동원하여 강력하게 통제한다. 그에 반해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내부의 적이라도 그들이 명백하게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 사회로부터 격리할 수 없으며, 내부의 적들이 법률을 위반하여 구금되었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 징역형을 살고나면 다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안정되게 유지하고 그 체제의 장점이 효율적으로 발휘되도록 하려면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데 허약한 약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약점 보완을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정치학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방어장치라고 말하고, 그러한 방어장치를 갖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방어적 민주주의체제라 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 방어장치를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국가는 서독→독일이다. 서독은 1949년 건국할 때부터 기본법(헌법)과 여타 법률들을 통해 방어장치들을 갖춰왔다. 서독이 갖추었던 방어장치들은 매우 많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만을 열거하면 반체제 및 국가안보위협 정당과 사회단체의 해산, 교수자유의 제한, 반체제인사의 기본권 상실, 반체제세력에 대한 국민저항권 보장, 공무원의 체제 충성의무, 헌법보호법, 긴급사태법, 테러방지법, 헌법보호청, 연방정치교육센터 등이다. 서독은 이러한 방어장치들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단기간에 2차 대전 패전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부국으로 부상했다.
서독은 그와 같은 강력한 방어장치들 때문에 이룩한 안정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를 토대로 마침내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 통일이 된 후에도 독일은 서독 시대의 각종 자유민주주의 방어장치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그런 방어장치들 덕분에 통일 후에 발생한 많은 문제점들을 무난히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이자 가장 풍부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내외환경은 독일에 비교할 때 매우 열악하다. 독일에는 군사도발을 자행하는 외부의 적도 없고, 주변국들은 모두 동맹국들이다. 국내에는 규모가 큰 내부의 적이 없으며, 더구나 외부의 적과 연결된 내부의 적은 없다. 국토는 넓고 비옥하며, 국민들은 침착하고 근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자유민주의를 안정되게 실천하기 위해 그 많은 방어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는 독일에 비해 매우 열악한 내외환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갖추고 있는 방어장치는 극히 빈약하다. 헌법에 정당해산 조항이 있으나 그 내용이 빈약하다. 반체제활동을 하는 사회단체를 해산시킬 수 있는 법률도 없다. 국가보안법이 있으나 그 내용이 반체제세력을 효율적으로 규제하기에는 매우 허술하다. 반체제세력을 감시하는 업무만을 수행하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국가기관도 없으며, 자유민주주의체제 보호에 필요한 정치교육을 전담하는 기관도 없다. 공무원의 체제에 대한 충성의무를 명확하게 요구하는 법률도 없다.
우리나라가 처한 환경이 독일의 국가 환경보다 크게 열악하므로 우리나라는 독일이 갖추고 있는 것들보다 더 강력하고 더 많은 방어장치를 갖추어야 이치에 맞다. 현실상황은 그러한 이치에 반대되는 모양새다. 비유하자면, 독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약간 싸늘한 초겨울 날씨에 고성능 방한복을 입고 있는 모양새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엄동설한의 혹한에 내의만 걸치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환경의 열악함이나 독일이 갖추고 있는 강력하고 다양한 방어장치들에 비추어볼 때, 현재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방어장치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반체제세력이 매우 큰 규모로 존재하며, 게다가 그 반체제세력의 주도권을 외부의 적과 연결된 종북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국가를 흔들어대고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방어장치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데 있다. 엄동설한에 내의만 걸치고 있으니 감기몸살이 그칠 날 없는 것과 같은 꼴이다. 내부의 적의 공격 앞에 허약한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에 비추어볼 때 방어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장래는 결코 밝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이 나라 정계에서는 종북세력의 위험성을 놓고 흥분하는 사람들도 많고, 정치쇄신을 외쳐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체제가 결여하고 있는 방어장치를 제대로 갖추기 위한 법제적 조치를 강구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정치쇄신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를 보다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어야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실천하고 종북세력의 위험성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려면 자유민주주의 방어장치 구비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방어장치 구비 논의 없는 종북세력 대처론이나 정치쇄신 주장들은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고민 끝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저 유행 따라 해보는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