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6월15일에 북한군이 선제공격으로 한국 해군에 사격을 가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선 북한군이 한국해군에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 한 것이다. 피해는 교전에서 선제공격을 한 북한군의 피해가 한국군 보다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하였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되었으며, 나머지 경비정 4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북한 측의 인명 피해는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 측 피해는 고속정과 초계함 등 2척이 선체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사자는 없으며, 장병 7명만 부상을 당한 것으로 발표됐다. 이것이 제1연평해전이다. 이 당시 김정일의 분노가 굉장해 복수를 다짐 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제1연평해전에서 선제공격을 하고도 한국 측 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김정일이 당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불만을 터트리며 항의를 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답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일어난 제2연평해전에서 바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당시에는 북한의 도발을 해군작전사령부에서는 이미 2틀 전부터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기에 한국해군은 북한의 도발에 대비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은 충분하였다. 하지만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를 보고 받고도 묵살하여 큰 참사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정부에서 내린 말도 안 되는 SOP 지침으로 피해를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피해를 입기 전에는 절대 사격을 하지 말라는 교전수칙을 내림으로 한국의 해군들은 손발은 있으나 포승줄로 온 몸이 묶인 것과 같은 상황으로 북한군의 사격에 한국해군은 제대로 된 대응 사격 한 번을 하지 못하니 무수한 전사자가 나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당시에 보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일본을 출국하였다. 국군 최고통수권자로서 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가. 더욱 유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것은 영결식에 정부 관계자는 한 명도 참석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장례일도 통상 5일로 치루 던 것을 약식 3일로 끝냈다.

    이후에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의 설움은 계속 되었는데 국가보훈처에서 국가 유공자 등록을 3차례나 거부 하는 등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한 공무원들의 눈치보기식 행동이라고 해도 전사자 그들의 우국충정에 대한 보답이 냉대라니 유가족들에게 죄송할 뿐이다. 간첩도 국가 유공자로 대접 받고 국회의원도 되는 시점에 진정한 애국자는 홀대와 냉대라니 지하에 있는 순국선열들이 알면 화를 낼 일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북한과의 관계를 모든 정책의 최고 우선순위로 정한 만큼 유가족들의 설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더 나아가 정부의 홀대와 유족을 괴롭히는 좌파 신문들의 비난 섞인 언론 플레이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유족도 있었으니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다.

    현 정부 들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김종선씨는 “정치가들은 미워했지만 남편이 목숨으로 지킨 나라는 사랑 할 수밖에 없었다” 고 했다.

    앞으로도 제3, 4의 연평해전이 벌어 질 수 있고, 전쟁이 발발한다면 제2, 제3의 한상국 상사가 나올 수 있다. 국가를 국민을 위해 산화한 사람들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와 명예를 존중해야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킬 마음도 생기지 않겠는가.

    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제2연평해전 행사에는 국가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해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