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천안시, 시민, 학생 등 800여 명 참석 예정
  • 유관순 열사 순국 91주기 추모제가 28일 오전 11시 천안시 병천면 소재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천안시(시장 성무용)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회장 류근창) 주관으로 열린다.

    추모제에는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 성무용 천안시장, 김동욱 천안시 의회의장,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과 기념사업회원, 유족, 일반시민, 학생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추모식은 천안시장의 추념식사, 국가보훈처 차장·광복회장(부회장 대독)·천안시 의회의장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 및 분향, 천안시립합창단의 아우내 노래 합창, 천안 청수고등학교 박소영 학생의 추모의 글 낭독, 유관순 노래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유관순 열사는 91년 전 아우내 장터에서 18세의 어린나이로 3.1운동에 참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1901.12.16~1920.9.28)는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녀는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에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했다.

    유관순 열사는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으로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갖고서 귀향했다. 유 열사는 인근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등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 장꾼으로 가장한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000여 명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진동했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선두에 선 사람들을 총검으로 찔렀다. 유 열사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이의 시신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고, 일부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 전화선을 끊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해 군중들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끝까지 추격해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 이 만행으로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씨와 어머니 이 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오후 4시경, 그녀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헌병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코야마(小山)와 상등병 미나토다니(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헌병들은 유 열사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해 공주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유 열사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을 만났다.

    유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다. 하지만 일제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확정했다. 유 열사는 곧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