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한열(柳漢烈) 전 의원, 낙향(落鄕)보다는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이법철/스님 

    양양 낙산사와 함께 양양의 대표적인 고찰 진전사, 계곡은 기암괴석 사이로 작은 폭포가 장관이었다. 물바닥이 환히 보였지만, 깊이는 어른의 키를 휠씬 넘는 깊이였고, 한 여름철인데도 계곡수의 냉기는 손이 시릴 정도였다. 2011년 8월 6일 오전 11시경, 나는 진전사 계곡에서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긴 노신사(老紳士)가 있어 가까이 가니 유한열(柳漢烈),국회 5선 ), 전 의원이었다. 유(柳)의원의 인상은 무장같은 호상(虎相)이었다. 과연 위엄이 있고, 음성이 기개가 넘쳤다.

     유의원은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종교를 주제로 토론하지는 않았다. 종교는 달랐지만, 종교를 통해 인격도야와 나라와 백성을 위한 헌신, 조국 대한민국수호에 대한 지론은 서로 공감했다. 그날, 유의원은 여러 가지 지난 정치비화와 시국 이야기를 해주어 나를 깨우쳐 주었다. 진전사 계곡에서 유의원과의 해후는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유의원은 작금의 한국정치가 해방직후 좌우대립, 대결로 회귀한 것에 대해 장탄식을 토했다. 우국(憂國)의 변(辯)을 토로했다. 그는 현 국회에서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주창()하는 북한인권법을 정작 해당국인 대한민국 국회는 6년이란 세월을 허비하는 것에 개탄을 토했다. 야(野)당은 오히려 북한정권에 보비위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사명이라는 듯하고, 여(與))당까지 북한정권에 보비위하려는 듯 북한인권법에 대하여 팔짱끼고 먼산 보듯 하는 것을 개탄했다. 나는 그때 “아, 이분이 우국지사(憂國之士)구나”라고 나는 절감했다.

     유의원은 1938년 1월 15일 충남 금산 출생이었다. 그는 제10,11,12,13,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7곱번 출마하여 5번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유의원의 부친은 유명한 신민당 당수 고(故) 유진산(柳珍山)씨이다. 그는 야당 총재로서 독립운동가요, 반공전선의 수장이라 일컬을 만큼 활동한 분이었다. 유의원은 부친인 유진산 총재의 지역구인 금산을 물려받아 정치인 생활을 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산은 어느 곳인가? 임난(壬亂) 때 조헌의병장과 영규대사가 왜군과 맞서 전투하다 순국한 칠백의총(七百義塚)이 있는 충절의 고장이다.

     유의원의 부친인 유진산 전 야당총재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을 보면 항일 애국자요, 타의 추종을 불허힐 지경의 반공지사였다. 유진산씨는 선친 때부터 당시 최고부자의 호칭인 ‘만석군’의 후예였다. 일제시 대개 만석군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 축첩(蓄妾))이 유행이었고, 일제(日帝)에 헌금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아 행세하고, 소작농들을 학대하며 재산을 불리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유진산씨는 달랐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인 때 1919년,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고 어른들과 합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또, 교내벽보에 요즘말로 대자보(大字報)로 독립에 대한 글을 써붙이는 행동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2학년 때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유진산씨는 1923년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한다는 차원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다녔으나,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니(市谷)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3학년 재학 중 대학교도 중퇴하고 강제 귀국선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에 강제 송환되어 귀국한 유진산씨는 농민의 각성 운동운동과 농촌의 개혁을 위하여 1932년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하였고, 농민계몽서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경(日警))의 탄압과 감시가 극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3년, 유진산씨는 강시성(江西省), 난징(南昌)에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중 1934년 일본 영사관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구금되었다. 1935년에서 광복까지 조병옥(趙炳玉), 전진한(錢鎭漢), 백관수(白寬洙), 장택상(張澤相))과 깊이 교유했다.

     유진산씨는 일제가 협박하며 강요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사코 거절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주청년동맹(大韓民主靑年同盟)을 만들어 최고위원이 되었고, 백의사(白衣社)등 비밀 우익 단체에서 반공투사(反共鬪士(반공투사))활동을 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도왔다.

     또, 유진산씨는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주창(主唱), 특위 위원들과 친일파 단속및 검거활동을 지휘했다. 1949년 당시 노덕술 등 친일파들은 오히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를 꾸몄다. 유진산씨는 친일파들의 중요 암살표적으로 밝혀졌다. 수차 친일파 청산계획에서 손떼라는 친일파들의 협박공갈과 행동이 있었지만, 유진산씨는 추호도 친일파 척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드라마 야인시대(野人時)에서도 보여 주듯이, 유진산씨는 우익청년단체를 지휘하며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건청(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 해산시켰다. 1946년 4월 9일, 반공주의 우익 최대 청년단체인 대한민주청년동맹(大韓民主靑年同盟))을 조직, 결성하고 회장에 피선되었다. 유진산씨가 배후 지휘하고 김두한씨가 주먹으로 행동하는 해방직후 반공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세인의 인구(人口)에 신화적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운명의 날이 왔다. 유진산씨는 1974년초 유신헌법개헌투쟁(투쟁維新憲法改憲鬪爭)을 선언하고 나서 앞장 섰으나 결장암이 발생하여 그는 마침내 1974년 4월 28일에 운명했다. 유진산씨는 죽는 최후의 순간까지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번영을 축원하고, 이승만대통령과 같은 사상, “반공만이 자유대한이 살 길이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그해 5월에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만석군의 후예인 유진산씨가 작고할 때 소유한 재산은 토탈 서울 상도동에 작은 집 한 채밖에 없었다. 작금에 대통령을 위시한 고위직을 하면 비유컨대 황금마차(黃金馬車)를 타는 정치인과는 사상과 소신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인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그나마도 집은 2천만원 가까운 부채로 은행에 저당잡힌 상태였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집안이 거의 폐가가 됐으니 정치인의 말로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며 자신부터 성금을 내어 모금을 주선했다. 전경련 등 3개 경제단체와 여,야 의원들은 총계 총 3천만원을 모와 돈을 전달하면서 모금자들의 뜻에 따라 저당 잡힌 집을 찾고, 남은 돈으로 미망인과 자녀의 생계 기금으로 써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유진산씨 만석꾼의 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독립운동자금, 반공운동자금, 친일파 척결 자금 등 해방직후 자유대한을 위해서 아낌없이 척전(擲錢)한 결론이다. 유진산씨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유산을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것이다.

     유진산씨가 잊지 못하는 후회가 있다. 고향 친구인 이현상(공산당 남부군 사령관)이 공산주의자로 변한 것을 보고, 수차 거금을 주기도 하면서 설득하여 우익 진영으로 전향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한 것이었다. 친구가 지리산에서 사살됐다는 소식에 소리내어 울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신민당 총재인 유진산씨는 어떤 정치를 했을까? 문민정부라는 YS, DJ, 노무현, 등의 정치인들처럼 종북정치는 절대 하지 않았다. 김일성을 만나려고 환장하듯 설치고, 국민들에게 금방 평화통일이 올 것 처럼 사기치며 국민혈세를 퍼다 바치는 정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유진산씨는 여야(與野)의 정치를 하면서도 대화를 앞세웠다. 그는 남북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의 상황에서 종북주의자들의 창궐은 애써 건국한 대한민국이 망할 수 있다는 걱정에 여야의 극한투쟁 보다는 대화를 중요시 했다.

     여당에게 협조할 것은 하고, 투쟁할 것은 하되, 쥐잡기 위해 독을 깨는 행위와 같은 당파싸움으로 대한민국 망치기는 하지 않은 것이다. 반공의 야당 당수였다. 김일성, 김정일에게 파리 앞발 부비듯 손을 비벼 만나주기를 애걸하는 매국역적(賣國逆賊)같은 작금의 일부 야당 당수들과는 천양지차의 야당정치를 지휘한 것이다. 유진산총재는 가난한 야당 정치인들을 위해 자신의 돈은 물론이요, 자금을 얻어와 호구지책(糊口之策)을 도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나라일을 위해 집안을 돌보지 않는 부친 탓에 유한열의원은 연세대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해서 루즈벨트 대학교를 졸업했다. 계곡에서 柳의원은 자신의 어깨를 보여주었다. 상처가 컸다. 미국에서 학비를 벌기위해 무거운 집을 나르는 인부노릇을 오래해서 한쪽 어깨가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야당총재의 아들이요, 만석군의 후손이 막노동 인부노릇을 해서 간신히 대학을 다녔는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그는 막노동을 하면서 부친을 무지 원망스러워 어느 때,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것이 뭡니까?”하고 대든 적이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고 아들에게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는데, 이제 후회막급(後悔莫及)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그날 계곡에서 유의원에게 물었다. “향후 어떻게 사시렵니까?” 그는 2년전에 상처(喪妻)했다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향 금산에 내려가 해마다 외국으로 버려지는 기아(棄兒)들을 돌보며 작은 교회를 짓고 싶다고 여생 설계의 속말을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유의원에게 말했다. “어찌 아버님이 걷든 길을 걷지 않으십니까? 아버님은 운명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유대한을 위한 충정(衷情)을 보이셨지 않습니까?“

     나는 유의원이 북핵(北核)으로 대남 공갈협박을 하고, 국내의 종북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북한 김정일에게 바치려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해 위국헌신(爲國獻身)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가 자유대한을 위해 만석군의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는데, 그 아드님이 또 최후의 순간까지 그 길을 당당히 걷는 것이 그 집안의 진정한 효사상(孝思想)이 아닐까?

     혹자는 반론하여 유진산 총재와 그 아드님 유의원에 대하여 공과(功過)를 운위하며 과(過()만 들어 시비할 수 있다. 나는 반박하여 한국정치판에 하늘에서 절대완성의 신이 하강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자유대한을 위해서 그분들만큼 진력(盡力))한 사람들이 몇 있을까? 단, 반공의 선봉에 선 유진산씨를 향해 북한정권과 추종자들인 종북주의자들은 눈을 부라리고 이를 갈 수는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문민정치를 한다는 대통령들이 제2 6,25 전쟁을 초래하는 원인자들인 종북주의자 전성시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해방직후 좌우대결의 시절로 역사의 시계 초침을 돌려놓고, 황금마차를 타고 떠났고 그 도적질한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고혼이 되고, 민심의 돌멩이를 맞고 있다. 그들 사기적 정치인 탓에 대한민국 민주주주의 종착역이 북한의 ‘조선인민민주화’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나는 유한열의원이 낙향 은거보다는, 부지기수의 아스팔트 애국지사들과 함께 자유대한수호를 위해 종북주의자들을 호령, 질타하는 때가 오기를 간망한다.

    李法徹(bubchul@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