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년전 오늘, 그리고 朴正熙의 선택

    <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 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날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傳記에서 발췌.

    趙甲濟

    *미아리 고개
     
     25일 오전 6사단 7연대 병력은 화천 쪽에서 북한강 다리를 넘어오고 있는 인민군 전차 두 대를 발견했다. 보병들이 전차를 따르고 있었다. 7연대 공병팀은 전차가 다리 한가운데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폭파장치를 눌렀다. 다리는 폭파되지 않았다. 적의 포격으로 導火線(도화선)이 끊어진 탓이었다. 이번엔 국군의 57mm 대(對)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전차에 명중했다. 7연대 장병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 소리가 가라앉자마자 전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T─34형 소련제 전차는 일시 멈칫했을 뿐이었다.
     
     우군의 무기로는 어쩔 수 없는 괴물의 등장. 무력감 뒤에 공포감이 확산되었다. 서울을 북쪽에서 차단해주고 있던 임진강과 북한강, 그리고 그 지류에는 많은 다리가 걸려 있었다. 국군 측 공병들은 이 다리를 폭파하는 데 실패했다. 임진교, 영중교, 만세교, 의정부교, 창동교, 소양강교가 고스란히 인민군에 넘어가 그들의 서울 접근을 도왔다. 유일하게 폭파에 성공한 다리는 京春(경춘)가도의 중랑교. 탱크 공포증과 다리 폭파의 실패는 육군 수뇌부에 하나의 공식을 입력시킨다.
     
     ‘탱크가 서울에 들어오면 한강다리를 폭파한다.’
     
     박정희가 육군본부로 돌아온 27일 아침 국방 수뇌회의가 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채병덕 총장 등 지휘관들에게 위스키를 한 잔씩 돌린 뒤 비통한 말투로 서울 포기를 선언했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李瑄根(이선근) 정훈국장이 일어나더니 대단히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해주를 점령하고 북진 중이라느니 27일에는 미 공군기 100대가 지원하러 온다고 발표해 놓고 시가전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니 말이 되는가. 임진왜란 때 선조가 맨 먼저 피란하여 민심이 흩어진 것을 잊었는가.”
     
     다른 참모들도 이선근에게 동조하자 채병덕은 즉흥적으로 서울 死守(사수)를 선언했다. 정부기관과 他軍(타군)은 서울을 탈출하더라도 육본만은 서울에 남는다고 결정한 뒤 회의를 끝낸 채병덕은 장도영 정보국장을 통해 김종필 중위를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건네주면서 채 소장은 “창동선을 방어하고 있는 劉載興(유재흥) 7사단장에게 보이고 답을 듣고 오라”는 것이었다. 편지의 요지는 ‘창동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金 중위가 지프로 포탄이 떨어지는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다가가니 대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7사단 병력은 후퇴하고 5사단 병력은 전진하는데 督戰隊(독전대)가 나서서 권총을 들이대면서 위협해도 공포에 질린 패잔병들은 총구를 몸으로 밀어붙이면서 달아나고 있었다. 7사단 사령부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장병도 없었다. 김종필은 겨우 사단장 부관을 찾아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후퇴가 아니라 지리멸렬이라고 생각한 김종필은 전선을 빠져나오다가 金鍾甲(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났다. 그는 “채 총장한테 가서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릉에서 정보국장으로 모셨던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참모학교 부교장이던 이 대령은 독전요원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현재 상황으로는 내일 아침까지 버티기도 힘들다. 부대를 일단 물린 뒤 재편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중위는 돌아와서 채병덕 총장에게 보고했다. 채 총장은 “담배 피워”하면서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을 내미는데 그의 손이 덜덜 떨려 담배 개비가 저절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채 총장은 한숨을 쉬더니 “수고했어. 가 봐”라고 했다.
     
     김종필 중위는 다시 지하벙커에 있는 작전상황실로 돌아와서 땅바닥에 깔아놓은 5만분의 1 지도에 전황을 그려 넣고 있었다. 박정희도 이 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채 총장은 김종필 중위의 절망적 보고를 들은 직후 오전 11시에 육본 참모와 在京(재경) 지휘관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육본은 오늘 시흥 보병학교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철수계획을 김백일 참모부장이 설명하도록 한 뒤 비만 체질의 채 총장은 의자에 앉은 채 졸기 시작했다. 때때로 심하게 코를 골았다. 코고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깨어났다가 또다시 잠에 떨어지고 있었다.
     
     공병감 崔昌植(최창식) 대령이 나서서 육본 철수 뒤의 한강다리 폭파 계획을 설명했다. 당시 한강에는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를 비롯하여 광나루에 있는 광진교, 그리고 복선 철교와 두 개의 단선 철교가 걸려 있었다. 그 전날 채병덕 총장은 서울 북방에 있는 많은 다리들이 하나도 폭파되지 않고 결국 의정부가 떨어지자 최 공병감을 불러 한강다리 폭파준비를 지시하면서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총살이다”고 못을 박았다.
     
     한강다리가 폭파될 경우 강북에서 고립될 약 5만 명의 국군과 수백만 국민들에 대한 고려보다는 폭파가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가 더 무겁게 최 대령의 뇌리를 누르고 있었다. 육군본부의 선발대는 낮 12시 30분 용산을 떠나 오후 2시에 시흥에 도착했다. 沿道(연도)는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과 차량으로 메워져 있었다.
     
     시흥 보병학교에 도착한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중인데 미 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이 채병덕 총장에게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다. 따라서 육본은 서울로 복귀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미군의 助言(조언)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편인 채 총장은 내리던 짐을 트럭에 다시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날 아침 가족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온(채병덕 총장도 미리 가족을 대피시켰다) 신성모 장관은 수원역장실에서 ‘육본을 시흥으로 옮기고 지구전을 펴라’는 명령서를 작성하여 비서실장을 통해서 채병덕 총장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채 총장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육본의 귀환과 함께 신문사에서 나온 호외는 ‘미군이 온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피란길에 올랐던 많은 시민들은 집으로 逆流(역류)하기 시작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인민군 주력이 집중된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의 전차대는 저녁 7시 수유리를 통과하여 미아리 고개로 접근했다. 자정을 지나 28일 새벽 1시 인민군 전차대는 길음교 전방에 눕혀놓은 수십 대의 차량 장애물을 간단하게 돌파한 뒤 길음교로 진입했다. 국군 측에서 폭파장치를 눌렀다. 도화선은 뱀처럼 몸부림치며 타들어가다가 식어버렸다. 적이 도화선을 중간에서 끊어버린 때문이었다.
     
     8대의 전차대는 그대로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보병의 엄호를 받지 않은 전차대의 돌진이었다. 대담무쌍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이 전차대가 창경원, 동대문, 돈암동 등지를 휘돌아다닌다는 보고를 접한 채병덕 총장은 육본의 재철수를 명령한다. 이미 질서 있는 철수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아직 인민군 본대가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이었지만 단지 10여 대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것이 육군본부 지휘부를 일종의 恐慌(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육본의 무질서한 심야탈출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도 이 행렬에 끼었다. 지향점은 한강 인도교였다.
     
     *阿鼻叫喚(아비규환)
     
     6·25 동란에 대한 우리 측의 公刊史(공간사)인 《한국전쟁사》(국방부) 제1권은 한강다리 폭파 명령이 내려진 것은 6월 28일 새벽 1시 45분이라고 적고 있다.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미아리 고개에서 달려온 姜文奉(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화로 최창식 공병감에게 폭파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최 공병감은 즉시 한강 인도교로 달려가 이미 폭약을 장치하여 명령만 기다리던 공병 팀에 폭파를 명령하는데 이때가 새벽 2시 20분이었다고 한다. 채병덕 총장이 다리를 지나간 뒤였다. 인도교와 3개의 철교에 장치한 폭약은 각각 1.6t 정도였다. 최 대령은 공병들을 한강 北岸(북안)으로 보내 다리로 진입하는 차량과 인파를 막으려고 했으나 공포감에 휩싸인 시민과 군인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의 선임장교 김종필 중위는 지하벙커 상황실에서 바닥에 깔아놓은 지도판을 정리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썰렁했다. 장교들이 다 빠져나가고 육사 8기 동기생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박정희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앞 다투어 도망가는 상황이니 누가 누구에게 알려주고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김 중위는 동기생들과 함께 바깥으로 달려 나가 병기감실 건물 쪽에 남아 있던 트럭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김종필은 서울사범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선친이 사준 집을 세놓아 중고택시를 한 대 사서 굴린 적이 있었다. 운전면허증을 얻어 정식으로 택시를 몰면서 돈을 꽤 벌어 한때는 본업인 공부보다 부업인 택시 사업에 더 재미를 붙인 적도 있었다.
     
     트럭에 탄 인원은 徐廷淳(서정순) 중위 등 7~8명이었다. 김종필은 트럭을 몰아 한강 인도교로 달렸다. 인파와 차량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인도교에 진입하여 中之島(중지도)에 도달하였을 때였다. 갑자기 꽝하는 폭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한강철교의 아치와 교각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었다. 바로 이어서 눈앞의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차량들과 사람들이 하늘로 튕겨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으니 옷가지와 사람의 살점들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이 폭파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공포의 함성을 지르면서 군중은 오던 길을 돌아 한강의 북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폭파 순간 박정희가 어디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리를 건너지 못한 군중 속에서 인도교의 폭파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 중위보다 약간 뒤에서 폭파장면을 본 것은 육사 8기 동기생으로서 박정희, 김종필과 함께 지하벙커에서 근무하다가 지프를 타고 나온 정보국 全在球(전재구·국회의원 역임) 중위였다. 그의 수기를 인용한다.
     
     <조금씩 전진하던 차량과 피란민 대열이 일순간 멈추었다. “왜 안 가느냐”고 앞뒤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다. 돌연 철교 쪽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밤하늘에 섬광이 지나갔다. 철교가 박살났다. 나는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의 6사단이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도교 위는 차량과 인파가 범벅이 된 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바로 이때 약 150m 전방에서 “쾅”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대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하더니 수백 수천의 비명소리, 그리고 사람과 차량들이 풍비박산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수많은 자동차 前照燈(전조등)에 환히 비쳤다. 동시에 앞에서 “와─”하는 소리. 수천 명이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뒤로 돌진해 나오는 생지옥의 아비규환, 지구상에 다시 없는 참극이 연출되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운명도, 국군의 운명도 여기서 끝장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턱대고 마포 쪽으로 뛰었다>
     
     《한국전쟁사》는 인도교의 폭파로 다리 위에 있던 차량 50대, 사람 500~800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파와 차량으로 꽉 차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무모함보다도 더 큰 참극이 그때부터 한강 北岸에서 빚어지기 시작한다. 김종필 중위 일행은 차를 버리고 서빙고 백사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가면 강남으로 차량과 달구지를 실어 나르던 바지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둑을 지나는데 한 떼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강변을 달려가고 있었다.
     
     기병연대에서 풀려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김종필 중위 일행은 나루터에 도착했다. 고마운 할아버지들을 여기서 만났다. 그들은 “우리야 늙었는데 인민군들이 어떻게 하겠나. 자네들은 일단 피했다가 다시 올라와야지”라고 말하면서 나룻배를 저어 큰 배에 실어다주었다. 김종필 중위는 28일 오전 10시경까지 국군 잔류병과 미 고문관들의 渡江(도강)을 도운 뒤에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전재구 중위 등 4명은 이날 밤을 일행 중의 한 사람인 李(이) 하사의 친형 집에서 보내고 28일 아침에 서빙고 백사장으로 나갔다.
     
     <한강변 大路(대로)에 나가보니 국군이 버리고 간 차량, 중화기, 탄약 등이 무수히 방치되어 있었다. 한강 상류 쪽에서 마포 강변까지 수십 만의 피란민들이 雲集(운집)하여 배를 타려고 혈안이었다. 어젯밤의 비로 강물은 누렇게 불어나 있었고 배는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수영에 능한 사람이 건너가서 작은 보트나 나룻배를 한두 척 가지고 오는 것이 눈에 뜨였다. 고작 5~6명밖에 탈 수 없는 작은 배에 20~30명이 몰려 타고 강변을 떠나는데 20~30m쯤 가다가 뒤집어지는 것이었다. 강가로 헤엄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물속에서 서로 붙잡고 엉켜서 다같이 사라진 것이리라. 이런 비극이 눈앞에서 되풀이되었다.
     
     도강하던 배들 중 8~9할은 이런 식으로 水葬(수장)되었다. 수천 명이 빠져 죽는 것을 4, 5시간이나 지켜보던 우리는 지프의 타이어를 빼려 하였으나 공구가 없었다. 남산에서는 잔류병과 인민군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 소화기, 중화기 소리가 요란하고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선임자 許浚(허준) 소령은 남산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빨간 한옥이 내 하숙집이다. 어젯밤 마누라가 해산을 했는데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겠다. 뒤는 북괴군 전차요 앞은 한강이니 우리 군인답게 이 자리서 자결을 하는 게 어때.”
     
     허 소령의 충혈된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말했다.
     
     “과장님은 결혼해서 아들딸까지 낳았지만 저는 아직 총각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군인이 왜 자살합니까. 도강 못 하면 저 남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죽읍시다.”>
     
     *朴正熙의 선택
     
     전재구 중위의 수기는 계속된다.
     
     <뒤는 인민군, 앞은 한강. 진퇴양난 속에서 체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타났다.
     
     “내가 헤엄쳐 건너가서 보트 하나를 구해 올 테니 그 대신 우리 가족 12명을 보호하여 타게 해주세요.”
     
     우리는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청년은 반 시간 후에 보트 하나를 구해서 저어 왔다.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공포를 쏘아 대며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세 번에 걸쳐 그 가족들을 태워 보냈다.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이 타고 건너는데 집중 사격이 시작되었다. 머리 위로 총탄이 지나가고 물을 튕겼다. 납작 엎드린 우리는 지금의 국립묘지 쪽에 상륙했다. 안도와 함께 용기가 되살아난 우리는 사정거리 밖에 있는 강북의 북괴 전차를 향해 사격을 가해서 울분을 풀었다. 동작동 산에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남산에서는 아직도 총성이 요란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그리고 단선철교 하나의 폭파에는 성공했으나 복선철교는 부분 폭파, 다른 단선철교는 不發(불발)이었다. 강북에서 작전 중이던 약 5만의 국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지휘 체계가 붕괴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리가 끊어질 때 적의 主攻路(주공로)인 미아리 쪽에서는 인민군 제3, 4사단과 105전차여단에 대항하여 국군 제2, 5, 7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투입되어 있었다. 개성`→`문산`→`서울로 이어지는 적의 助功路(조공로)에는 적의 1, 6사단에 대항하여 국군 1사단이 善戰(선전)하고 있었다. 6개 사단 규모의 국군은 적의 전차가 28일 새벽 1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한 시간 반 뒤에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버리자 뿔뿔이 흩어져 필사적으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이 도강은 지휘 체계의 작동 없이 이루어진 집단탈출이었다. 국군은 이때 명령 체계가 와해됨으로써 군중으로 바뀌었다.
     
     李東植(이동식) 1사단 연대장 연락장교(중위)의 수기.
     
     <소대원들을 데리고 한강 하류 二山浦(이산포)에 도착한 것은 28일 밤 11시경이었다. 한강물은 달빛에 반짝이고 멀리 서울과 김포 하늘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수백 명의 국군이 한강물 속에서 뭉쳐 있었다. 가슴, 목까지 물에 잠긴 채 건너오는 나룻배를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장교들도 많았으나 지휘 통제는 간데없고 병사들은 市井雜輩(시정잡배)들의 烏合之衆(오합지중)이었다. 나는 저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어 강둑에서 인민군과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했다. 소대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가라”고 한 뒤 숲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숨겨둔 나룻배를 발견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을 헤매고 있었을 박정희의 感懷(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고 있었다. 여러 번 상부로 경고도 올렸다. 그런데도 국군 지휘부는 미군의 말만 안이하게 믿고 있다가 아무런 대비 없이 당한 것이다. 안보를 외국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과 無備有患(무비유환)의 위험성을 이때의 박정희처럼 切感(절감)한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소신이 된 자주국방과 有備無患(유비무환)은 한강변을 헤매고 다니던 이날 밤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 뒤 1975년 6월 25일자 일기장에 박정희 대통령이 써놓은 감상은 28일 새벽 한강변에서 느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침 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 수뇌, 정부 당국, 미국 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판단서는 전쟁이 발발한 후 너무나 정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 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28일 밤 2시쯤 육본이 철수할 때 박정희의 거동에 대한 목격증언으로서는 전투정보과 소속 육사 8기 출신 서정순 중위의 그것이 유일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진 뒤 뚝섬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 후의 목격담은 정보국 5과장 車虎聲(차호성) 소령에 의하여 이어진다. 그의 생전 증언.
     
     “27일 밤에 저는 미아리 전선을 시찰하고 자정이 지나서 육본에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가 널려 있었어요.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한강다리 쪽으로 가 보았더니 폭파된 뒤였어요.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강에는 추락한 차량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천호동 쪽에 도착하니 동이 터 훤해지더군요.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니 ‘차 형! 접니다’ 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즉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함께 시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의 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누렇고 길쭉한 오이를 따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나 갖고 있는 돈을 주고 한 광주리를 다 샀습니다. 저, 박정희, 부하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오이를 다 먹었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박정희와 헤어졌어요.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서 강변에 남았습니다.”
     
     육군본부는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전했다. 장도영 정보국장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직후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과 함께 새벽에 작은 보트를 타고 손바닥을 노 삼아 저으면서 한강을 건넜다. 아침 일찍 보병학교에 가보니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다. 장도영 국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 ‘좌익 전력자’ 박정희가 끼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육본은 28일 오후 다시 수원으로 옮겼다.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 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갔다. 일제시대에 만든 수원청년훈련소에 정보국이 들어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더니 박정희가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김 중위는 마음이 놓였다. ‘저분은 역시 북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는 안도감. 박정희에게 있어서 6·25 남침은 자신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날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버려진 사람들
     
     위대한 민족지도자 이승만의 생애에 있어서 서울과 시민, 그리고 군인들을 버리고 몰래 한강을 건넌 뒤 다리를 끊은 행위는 일대 汚點(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회까지도 버리고 감으로써 210명의 의원들 가운데 62명이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다. 이들 중 8명이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실종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이 역사의 교훈에서 ‘서울 死守(사수)’란 안보개념을 확립하는 한편으로 안전한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박정희는 여러 번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서울에 남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말을 했다. 1975년 4월 29일 월남 패망을 하루 앞둔 날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死守 서약’을 발표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必死卽生(필사즉생) 必生卽死(필생즉사)이다. 이 강산은… 우리가 살다가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지켜가도록 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박정희의 뇌리에는 국가지도부의 서울 포기가 가져온 地獄圖(지옥도)가 찍혀 있었다. 그런 상황을 예상하여 막아보려고 애썼던 입장에 있었던 그로서는 뼈에 사무치는 경험이었다. 《한국전쟁사》 제1권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로 漢水(한수)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들 가운데 4만 4,000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7사단의 경우(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00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000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되었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하였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이어서 ‘군 작전을 신뢰하다가 피란길이 막히게 된 정부요원들과 시민들은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미처 반출하지 못한 정부 재산은 적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지도부는 끗발 순서대로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2시에, 신성모 국방장관은 오후 2시에,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28일 새벽 2시에…. 채병덕은 서울을 빠져나가기 전에 일선 전투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지도 않았다. 명령을 전투부대에 전달할 만한 통신체제도 유지하지 못했다. 버려진 군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은 부상자들이었다.
     
     6월 24일 현재 서울시내 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는 약 1,300명이었다. 여기에다가 3일간의 전투에서 다친 3,200명의 군인들은 서울대학 부속병원 등 민간병원에도 분산되었다. 서울대학병원은 1개 소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서울대학병원에선 움직일 수 있는 전상자 80여 명이 한 장교의 지휘하에 뒷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남아 있던 전상자들은 인민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다(《한국전쟁사》 제1권).
     
     1950년 9월 15일 육본 계엄고등군법회의는 한강 인도교 폭파의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敵前非行罪(적전비행죄)가 적용되었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폭파명령자 채병덕 소장은 그 두 달 전 하동 전선에서 전사한 뒤였다. 최 대령은 9월 21일에 처형되었다. 5·16 뒤 최 씨의 처 玉貞愛(옥정애)의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최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최창식 대령이 한강다리를 폭파한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작전명령을 따른 것이며 40분간 폭파시간을 늦추고 공포를 쏘면서 차량과 人馬(인마)의 다리 진입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폭파한 행위는 군 작전상의 정당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 판시 요지였다. 많은 증언자들은 최창식 대령이 인도교 위에 인파가 몰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파를 명령한 도덕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때 통신이 유지되었더라면 인도교 폭파는 막을 수 있었다. 채병덕 총장이 폭파명령을 내리고 시흥으로 가버린 뒤 남은 육본 참모들은 전투 중인 국군부대가 철수하기 전에 다리를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뒤늦은 自覺(자각)에 도달했다. 그래서 張昌國(장창국) 작전국장과 丁來赫(정래혁) 과장을 현장에 보내 폭파중지를 명령하도록 지시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최창식 대령과는 통신이 되지 않았다. 이때 육군의 작전통신체계는 마비상태였다. 張, 丁 두 사람은 중지도 파출소에 당도했을 때 헌병들의 제지를 받았다. 헌병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인도교를 건너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 폭파가 이뤄진 것이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채병덕 소장의 강박관념, 그 원천은 인민군 전차의 도강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런데 28일 새벽, 그 아수라장 속에서 수도경비사령부 병기부의 金起潭(김기담) 중위는 걸어서 한강다리를 건넜다. 육사 8기생회에서 펴낸 《노병들의 증언》에는 그의 수기가 실려 있다.
     
     <(한강인도교 폭파 뒤) 나는 무조건 한강 철교 쪽으로 갔다. 가까이 가 보니 양쪽은 폭파된 것이 틀림없는데 가운데 철교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중앙철교 위의 선로 갱목을 밟아갔다. 한가운데쯤 가니까 선로 양쪽에 상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도화선 같은 줄이 노량진 쪽으로 쭉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너마이트였다. 갱목을 하나하나 밟고 가야 하니 뛸 수도 없었다. 나에겐 남겨진 생명의 다리였지만 이 철교로 적의 탱크가 건너오게 된다>
     
     3개의 철교 중 통행이 가능한 철교가 있었던 것이다. 28일 새벽에 이 사실이 알려졌더라면 수많은 생명이 한강에서 수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후 인민군 전차대는 이 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넜으니 인도교 폭파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던가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