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납북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간담회황우여 “더 이상 소홀히 할 수 없어”
  • ▲ 23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KAL 납북 피해자 가족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뉴데일리
    ▲ 23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KAL 납북 피해자 가족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뉴데일리

    “40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정부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까? 위로금이라고 3,000만원 쥐어주는 게 전부란 말인가요. 정부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 줘야지요. 아버님 돌아가신 날짜라도 알아야 제사라도 지낼 것이 아닙니까?” (KAL 납치피해자 가족 이종성씨)

    국회인권포럼이 ‘KAL기 납북문제의 새로운 해법’을 주제로 23일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간담회장.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포럼의 대표로서 피래자 가족들이 내민 ‘KAL 납북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결의안’을 읽은 뒤였다.

    1969년 12월11일,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YS-11기가 북한에 의해 공중 납치돼 함경남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착륙했다.

    1970년 2월14일 판문점을 통해 39명의 승객은 귀환했지만, 유병하 최석만 성경희 정경숙 이하 승무원 4명 전원과 김봉주 임철수 장기영 채헌덕 황원 이동기 최정웅 이하 승객 7명은 지금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결의문을 낭독한 황우여 원내대표가 잠시 침묵했다. 자리에 함께 참여한 박선영 의원도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의원들의 얼굴에 피어 올랐다. 

    황 원내대표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그동안 정부와 몇 번을 만나 논의했나”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한번도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피해자 가족들의 답변 때문이다.

    그러자 박선영 의원이 황 원내대표를 대신해 “이제서야 자리를 마련해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

    황 원내대표는 “이제 모든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앞으로 (정부와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정리를 해 나가겠다. 포럼의 회원이 11명인데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간담회에 참석한 피해자 가족들이 수십년간 쌓여온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왜 이제껏 정부가 마땅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정부가 하루 빨리 대책을 마련해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납북 문제 해결을 위해 3가지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제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KAL기 납치사건은 명백한 제네바 협약의 위반이며, 국제범죄이다.

    둘, 2006년 6월 북한은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남은 가족들에게 ‘생사확인 불가능’이라는 통지서를 보내 온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북한이 성실하게 미귀환 11명에 대한 생사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셋,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강제·비자발 실종에 관한 유엔실무그룹에 접수된 황원, 이동기, 최정웅씨 생사와 소재에 대해 답신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유엔과 북한이 조속한 시일 내로 위 세 사람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넷, 2011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 기조연설에서 밝힌바, 한국정부는 KAL기 납치문제를 포함한 납북자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줄 것을 촉구한다.

    다섯, KAL 기 납치 사건 외에도 전후 납북자 수가 517명(통일부 통계)이며, 문제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고려하여 정부는 현행 통일부 산하 ‘이산가족과’와는 별도로 ‘납북자’과를 신설하여 이 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한다.

    다음은 KAL기 납북일지

    - 1969.12.11  낮 12시25분, 강릉발 김포행 국내선 YS-11기가 승객 47명과 기장 유병하씨 등 승무원 4명을
                         태운 채 북으로 피납됨
    - 1969.12.12   치안국장은 북한 간첩단의 소행이라고 발표. 국제적십자사, 북한적십자사와 전문 연락
    - 1969.12.13   강릉, 제주 등 전국 곳곳에서 북한 만행 규탄대회
    - 1969.12.15   범행 용의자는 고정간첩 채헌덕, 조창희, 부조종사 최석만이라고 치안국이 발표
    - 1969.12.16   국회는 정 총리, 최규하 외무, 박경원 내무, 임충식 국방, 백선엽 교통부장관을 출석시켜
                          경위 청취. 승객의 최종명단을 국제적십자사에 통보
    - 1969.12.17   주 유엔대사,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협조 요청
    - 1969.12.19   최 외무장관 “북괴는 납북 승객을 전원 송환하라”고 특별담화 발표
    - 1969.12.22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 369차 비서장회의에서 첫 송환교섭
    - 1970. 1.21    북한, 최초로 유엔군측에 판문점 본회의를 열자고 제의
    - 1970. 1.24    박동진 주 제네바 대사 “북한적십자사측이 승객 및 승무원 모두 건강하다고 국제적십자사에
                          회답해 왔다”고 발표
    - 1970. 1.25    KAL기 송환 민간사절단, 제네바 국적본부로 출발
    - 1970. 1.29    신범식 정부 대변인 “승객 송환은 시간문제”라고 담화문 발표
    - 1970. 2. 2     군사정전위 제370차 비서장회의에서 유엔군측 비서장 모리스 제섭 대령은 “구정 전인 2월 4일
                          오전 11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하라”고 요구
    - 1970. 2. 3     북한은 국적에 “승객 및 승무원을 송환할 용의가 있다”고 통보
    - 1970. 2. 4     정부는 북한의 일방적 송환에 대비, 판문점 일대와 동·서해상에 인수 준비 태세
    - 1970. 2.14    납북자 51명 중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을 제외한 39명만 판문점을 통해 귀환
    - 1970. 2.15    치안국, KAL기 납북사건은 속초 출신인 고정간첩 조창희의 단독범행이라고 공식 발표

    미귀환 납북자 명단 (11인)

    유병하( 당시 남 37세 기장)            
    최석만( 당시 남 37 부기장)
    성경희( 당시 여 23 스튜어디스)        
    정경숙( 당시 여 23세 스튜어디스)      
    김봉주( 당시 남 28세 MBC 카메라맨)
    임철수( 당시 남 49세 서울 제기동)     
    장기영( 당시 남 41세 국민운동 경기지부장)
    채헌덕( 당시 남 35세 자혜병원 원장) 
    황  원( 당시 남 32세 MBC PD) 
    이동기( 당시 남 48세 강릉 합동인쇄소 대표)
    최정웅( 당시 남 30세 한국슬레이트 강릉지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