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張勉), 윤보선(尹潽善), 김대중(金大中)의 대미(對美)의존,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의 대미(對美)자주 
      
     김대중처럼 미국대사에게, 자국(自國) 정부에 압력을 넣어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미국대사를 자국(自國) 대통령 위에 있는 총독 정도로 생각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趙甲濟   
     
     1963년 10월15일 아침 장충동 2가 제 1투표소에 나온 박정희(朴正熙) 후보는 새치기를 해도 좋다는 주변의 권고를 사양하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앞에 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는 등 쇼를 싫어하는 박정희로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자들이 그런 행동을 지적하면서 “부동표가 많이 쏠리겠습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박정희는 계면쩍게 웃더니 줄을 선 약 300명의 유권자들을 가리키면서 “부동표요? 기껏 요만한 부동표를 얻어 무엇 한단 말이오”라고 했다.
     
     이날 윤보선(尹潽善) 후보는 투표를 하고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집안에 머물 기분이 아니었다. 지친 심신을 좀 쉬게 하려고 집을 나섰다. 그때 지프를 타고 집에까지 따라와 있던 한 미군이 다가오더니 백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아내와 함께 백병원에 도착하니 2층 원장실로 안내되었다. 원장은 보이지 않고 간호사 같은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윤보선을 보자 진찰준비는 하지도 않고 원장실 뒤쪽에 난 문을 열고는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모른 채 문 밖으로 나가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아래에는 폭스바겐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한 미국 부인이 시동을 걸어놓은 채 윤보선을 향해서 타라고 손짓을 했다. 윤보선 부부를 태운 차는 한남동으로 달렸다. 미국인 부인은 자신의 집으로 윤보선 부부를 데리고 들어간 뒤 비로소 신분을 밝혔다. 윤보선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 따르면 이 부인은 “남편은 미국 정보국에 근무하는 케디 중령이고, 윤 후보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편이 시키는 대로 우리 집에 모시고 왔다”고 설명하더란 것이다. 尹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제서야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국 정보국에서는 나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 때문에 신변을 감시해왔고 투표가 끝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이틀을 머물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야당총재이고 강력한 대통령 후보가 이틀간 미국 정보기관원 집에서 안전을 도모했다는 것은 약간의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윤보선의 당선 가능성이 대두되던 10월 4일 미 국무부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 대해 군사정부의 강경파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것에 대비하여 일종의 비상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었다. 이 비상계획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윤보선의 증언과 연결시켜 추정하면 미국 측이 투표 및 개표기간 중 윤 후보를 보호하는 것이 그 핵심적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측으로서는 이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 때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 도전하던 張勉을 숨겨서 보호해준 적이 있다. 장면은 그 뒤 이승만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있을 때 미국 대사관 측에‘만약 李 대통령이 유고되었을 때는 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할 때까지 48시간 정도 나의 신변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기간중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도 주한(駐韓) 미국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있다. 駐韓(주한)미국 대사관의 포터 대사가 대통령 선거 기간인 1971년 4월19일에 美 국무부의 브라운 대사 앞으로 보낸 電文(전문)이 미국 정부에 의하여 최근 공개되었는데 흥미로운 秘話(비화)가 실려 있다. 이 電文(전문)의 제목은 ‘김대중에 대한 협박 주장에 대하여’이다. 포터 대사는 이렇게 썼다.
     
      <1. 지난 금요일 김대중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이번 週(주)엔 전라도에 가 있을 것이므로 그날 밤에 급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해왔다. 나는 이런 시점에 그를 만나게 되면 오해를 부를 것이라면서 특별한 메시지가 있을 경우, 가까운 상담역 같은 사람을 보내주면 정치담당 참사관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답신하였다.
     
      2. 오늘 鄭一亨(정일형) 박사(민주당 시절 외무장관,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가 참사관의 官舍(관사)에서 조용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는 김대중과 그가 몇 통의 협박전화와 편지를 받았는데, 정부가 시킨 것 같다면서 자신들은 한국의 정보부가 여론의 지지가 쏠리는 김대중 후보를 암살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鄭 박사는 김대중이 내가 나서서 한국 정부가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방법을 찾아주기를 원한다는 말도 하였다. 참사관은, 차분한 태도로써 그런 전화나 편지는 미친 자들의 소행일 수도 있고, 협박용일 수도 있다고 했더니 정 박사도 동의하였다. 대화중 정 박사는 신민당이 대규모 부정투표를 걱정하고 있다고 했으나, 정부가 어떻게 부정을 저지를 것이냐고 물었더니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였다. 그는 또 궁정 쿠데타의 가능성과 與黨(민주공화당)이 선별된 투표소에서 혼란을 일으켜 투표를 무효화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 박사는 그와 김대중이 협박에 겁을 집어 먹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김대중의 요청에) 더 대응할 계획은 없다.
     
      3. 정 박사는 (참사관에 의하여)설득을 당한 인상을 풍겼는데, 그는 또 신민당이 선거운동의 방향에 흥분하고 있다면서 김대중이 현재로서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면 50만 표 차로 이길 것이라 기대하며, 남은 선거 기간중 여론이 김대중쪽으로 쏠리면 표차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책임자로서 그는 매우 당파적이지만, 귀하도 알다시피 조용하고 신중한 사람이다.   
      포터>
     
      1971년 4월27일 선거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金大中) 후보에게 약90만 표 차로 승리하였다. 투개표는 대체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박정희 정권이 당시 김대중에게 危害(위해)를 가하려 하였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해 5월 김대중씨가 탄 승용차가 트럭에 받힌 사고를 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암살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트럭 운전사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말하였으나, 월간조선(月刊朝鮮)의 수 차례 취재 결과 단순 교통사고로 확인된 바 있고 트럭 운전사도 생존중이었다.
     
     장면,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 소위 민주투사들의 대미(對美)의존은 "이건 사대주의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김대중처럼 미국대사에게, 自國 정부에 압력을 넣어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미국대사를 자국(自國) 대통령 위에 있는 총독 정도로 생각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소위 민주투사들의 이런 태도와는 반대로 박정희(朴正熙), 이승만(李承晩)은 미국 정부와 미국 대통령을 당당하게 대하였다. 때로는 李, 朴 두 대통령이 너무 무례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國益)이 걸린 문제에서 두 사람은 미국을 존중하면서도 미국에 이용당하지도, 미국에 의하여 희생당하지도 않으려 하였다.
     
     이승만, 박정희는 장면,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을 민주투사로 위장한 사대(事大)주의자로 보았다. 박정희가 김영삼 의원의 국회제명을 지시한 것도 김씨가 뉴욕타임스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미국의 내정간섭을 촉구하는 듯한 발언을 한 데 화가 났기 때문이다. 이들 민간 정치인보다 이승만, 박정희는 훨씬 민족주의적이었다. 한국 현대사는 민족적 권위주의자와 사대적 민주주의자의 대치였다고 할까...
     
     친미적(親美的)이던 일부 민주투사들은 종북(從北)주의자로 변신한다. 사대(事大)의 대상이 미국에서 김일성-김정일 정권으로 바뀐 것이다. 사대주의자들은 자아(自我)가 약하므로 늘 더 힘 센 존재에 끌려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