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의 프랑스와 2011년의 한국 
     
      평화至上주의는 분열과 전쟁을 부른다
    趙甲濟   
     
     처칠: "소설을 집어치우고 愛國논설을 쓰라"
     
      앙드레 모로아(1885~1967)는 프랑스의 작가, 평론가였다. '영국사' '프랑스사'의 著者로 유명한 그는 1차세계대전중 4년간 영국 육군사령부에 파견된 프랑스 연락장교였다. 反英감정이 강한 프랑스에서 親英派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1939년9월에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정부로무터 영국 육군참모본부 근무 '프랑스측觀戰연락武官'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1940년 5, 6월에 히틀러의 전격전에 걸려 6주만에 프랑스가 항복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프랑스 항복 후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건너가 강연과 집필생활을 했다.
     
      그는 전쟁 체험담이기도 한 책을 냈다. 1940년 11월에 나온 '프랑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 to France)란 책인데 나중에 '프랑스의 비극'(Tragedy in France)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에선 '프랑스 지다'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가 大敗한 원인을 군사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와 국민의 士氣면에서도 관찰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과 북한을 생각했다. 1930년대의 프랑스가 오늘의 한국이고 그때의 나치 독일이 김정일의 북한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동맹국 영국은 한국의 동맹국 미국과 거의 같은 처지이고.
      평화至上주의, 패배주의, 사회주의가 득세하고 左右대결이 깊어진 프랑스 사회는 무섭게 군비증강을 하는 나치 독일을 쳐다보면서도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선전의 천재 괴벨스는 이런 프랑스 사회를 표적으로 삼았다. 프랑스의 左右대결을 부추기고 특히 英佛 동맹을 이간질 시키는 심리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독일의 선전부는 영국의 對獨 강경론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려 들 것이라고 反英감정과 厭戰(염전) 무드를 선동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 프랑스는 독일과 싸워 조국을 지켜낸다는 擧國일치의 전쟁의지를 확립할 수 없었고 투지만만한 상대를 만나 어이없는 大敗를 당하고 말았다.
     
      모로아는 이 책에서 문필가로서 자신의 책임을 맨 먼저 지적한다. 1935년12월말 그는 영국의 귀족 부인 집에서 당시 윈스턴 처칠과 점심을 함께 했다. 처칠은 끊임없이 히틀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동료 정치인들은 對獨유화론을 지지하여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식사를 끝낸 뒤 처칠은 모로아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로아君, 소설 쓰는 것은 그만두게. 傳記 따위도 집어치워"
      놀란 표정의 모로아를 향해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소설도, 傳記도 쓰지 말고 하루 한 편씩 논평을 써! 그 내용도 이것 하나만 다뤄야 해! 프랑스 공군은 과거엔 세계 제1이었지만 지금은 4, 5위 정도란 말이야. 독일 공군은 과거 미미했으나 지금은 세계1위에 육박하고 있어요. 君은 프랑스에 돌아가거든 매일 이 점을 지적하란 말이야. 만약 프랑스가 君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君은 여자의 사랑, 남자의 야망이니 하는 것들을 주제로 글을 쓴 것보다 훨신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야!"
     
      '2차세계대전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처칠은 글과 말의 동원력을 안 지도자였다. 그런 그도 소설, 傳記따위는 집어치우고 오직 프랑스가 직면한 국방상의 위험을 알리는 게 모든 글 쓰는 이들의 의무라고 말한 것이다. 모로아는 이 책에서 자신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있다. 처칠은 마지막으로 모로아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고 한다.
      "君의 조국 프랑스는 독일 공군 때문에 멸망할지 모른다. 모로아君! 힘이 따르지 않는 문화는 내일이라도 死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처칠의 경고를 오늘날 한국의 글 쓰는 이들에게 變用한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여러분의 조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성, 특히 김정일과 친북세력의 음모, 한국 지도층의 무사안일을 지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소설과 傳記와 詩는 나중에 써도 되지만 음모를 폭로하는 글은 지금입니다. 한국이 누리는 예술과 문화가 국가수호의지의 뒷받침이 없다면 내일이라도 여러분들은 글 쓸 자유, 말할 자유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하루 한 건씩 논평을 쓰세요. 그 주제는 오직 하나 한국의 위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글로 해서 국민들이 깨어나 이 음모를 저지한다면 여러분들은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화지상주의와 좌파득세  
      
      앙드레 모로아가 미국으로 건너가 쓴 책에서 프랑스가 망한 원인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 평화지상주의가 프랑스의 국가수호의지를 약화시켰다.
      2. 소련을 조국으로 삼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를 분열시켰다.
      3. 군대가 정치에 종속되어 재무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4. 영국과 프랑스를 이간질 시킨 나치의 선전戰이 효과를 보았다.
     
      프랑스는 독일이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좌익들이 확산시킨 평화지상주의 무드에 정치권이 넘어가 군비증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의 분열책동에 신물이 나서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졌다. 이래 저래 프랑스 지도층 안에선 애국심과 決戰의지가 약화된 것이다.
      1차세계 대전 때 主전선은 프랑스-벨기에의 동쪽(독일을 기준하면 서쪽)지역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젊은이 약160만 명이 전사했다. 20대 젊은이들의 약40%가 죽었다고 한다. 이런 참화를 겪은 나라이니 厭戰(염전)사상이 퍼져가기 쉬웠다. 더구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지상주의라는 위장술로써 國論을 분열시키고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1930년대의 프랑스와 2011년의 한국은 비슷한 점이 많다. 나치를 북한정권, 사회주의자들을 친북세력, 영국을 미국으로 바꿔놓으면 역사적 무대의 설정이 비슷해진다.
      뜻 있는 한국인들의 걱정은 "만약 내일 북한군이 남침하여 서울이 포위되어도 李明博 대통령은 과연 국군과 국민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명령할 것인가"이다. 세계사에서 敵對관계에 있는 두 국가 사이에서 일방의 사회가 이 정도로 他方에 대하여 굴종적인 예도 드물 것이고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더 드물 것이다.  
      
      전쟁중에도 반목한 프랑스 지도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에서 발간한 '프랑스의 비극'에서 프랑스의 국가지도부가 독일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반목, 분열해간 사정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수상은 에도알 달라디에였다. 이 내각의 재무장관은 폴 레노. 두 사람은 상대를 나름대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公的인 일에선 앙숙이었다. 1940년 3월 달라디에 수상이 핀란드 사태와 관련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레노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달라디에를 육군장관으로 붙들어놓았다.
      앙드레 모로아는 레노 수상에게 축하의 뜻을 담아 이런 문구를 써보냈다고 한다.
      <의회는 평화시엔 국민을 대표하고, 戰時엔 군대를 대표한다>
      군대를 신뢰하고 밀어주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사태는 정반대로 흘렀다. 레노 수상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가므랑 원수를 싫어했다. 너무 소극적이란 이유에서였다. 가므랑 원수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쳐들어가고 있을 때를 틈타서 독일을 쳐야 한다는 견해를 묵살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프랑스 군대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독일군대는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주력하느라고 프랑스 접경지대에 배치했던 병력을 많이 빼버렸던 것이다.
      가므랑의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 프랑스는 출산율이 매우 낮다. 1차 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人的 자원이 없다. 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레노 수상은 공격적 전략을 원했고, 가므랑은 방어위주의 전략을 고집했다. 두 사람은 반목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부엔 이런 異見을 조정하고 종합하여 더 나은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도력이 부족했다. 이 점이 영국과 달랐다. 異見은 어떤 조직에도 있다. 문제는 그 이견이 반목으로 악화되는가, 아니면 더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는가이다.
     
      "서로 싸운다고 적과 싸울 시간이 없다"
        
      레노는 가므랑을 교체하려고 했다. 이런 움직임을 가므랑도 알았을 것이니 전쟁을 지도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레노 수상은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갈 것이 뻔한데도 벨기에 정부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진주를 허용하지 않는 데 화가 났다. 그는 벨기에 영토로 강제 진입할 생각을 했는데 가므랑은 이에 반대하여 싸우기도 했다.
      독일군의 기습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1940년 4월29일 앙드레 모로아가 레노 수상 집무실을 찾아갔더니 그는 이렇게 불평했다.
      "탱크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 대포와 기관총은 창고에서 잠 자고 있다. 독일은 240개 사단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고작 100개 사단밖에 없다. 달라디에의 게으름과 우둔함이 모든 것을 망쳤다"
      모로아가 "그래도 달라디에는 프랑스를 사랑하는 사나이입니다"라고 변호했다. 레노가 한 말은 이랬다.
      "그렇다. 달라디에는 프랑스의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승리 이상으로 내가 실각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독일군 침공 나흘 전인 5월6일에 모로아는 다시 레노 수상 집무실에 들렀다. 책상에 세 개의 직통전화가 놓여 있었다. 정부기관, 외부, 그리고 愛人인 모 백작부인 거실로 통하는 전화였다. 그때 레노는 백작부인으로부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날도 달라디에와 레노는 국회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여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야 했다.
      5월10일 독일군의 全面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벨기에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군의 취약지구를 강타했다. 독일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결합한 電擊기동전술로 전선을 돌파하여 배후로 진출했다. 기다렸다는듯이 레노 수상은 가므랑 원수를 해임하고, 그를 싸고돌았다고 해서 육군장관 달라디에를 외상으로 전보시킨 뒤 자신이 육군장관을 겸했다. 戰線은 무너지는데 내부 권력투쟁에 더 치중한 것이 프랑스 지도부였다. 한 영국군 장교가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료끼리 싸우는 데 바빠서 독일군과 싸울 시간이 없다"
     
      앙드레 모로아는 "개인끼리의 싸움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었던 가장 좋은 사례를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당시 대통령 포앙카레와 클레망소 수상은 사이가 나빴으나 전쟁지도라는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對독일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로아는 "지도층의 不和가 결정적 패인은 아니었지만 군대로부터 마지막 抗戰의 기회를 앗아갔다"고 평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분열상은 親北세력이 좌파적-계급적 적대감으로 대한민국 주류층을 공격하고 현대사의 정통성을 부정한 데서 발생했다. 국민들은 이들이 김정일보다도 대한민국과 자신들을 더 증오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이때 김정일이 남침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군의 기습이 성공하여 초전에 국군이 밀리고 서울이 포위될 때 국군과 국민들은 대통령과 함께 서울을 死守할 것인가?
      중요한 일들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축적된 원인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지금 친북세력이 한국 사회에서 축적시켜가고 있는 분열과 증오와 반목의 원인들이 무슨 재앙을 한국에 가져다 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피를 부를까 걱정이다. 
       
      戰時에 不信당한 지도부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1940년말에 미국에서 펴낸 '프랑스의 비극'이란 책에서 左右대결이 계층간 증오심을 폭발시켜 애국심을 실종시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엔 희망을, 中産계급 일부엔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이 된다는 생각을 심었다. 소련과 독일은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선전전을 통해서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 두 나라의 工作이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부터 있어왔던 분열상을 더욱 깊게 했다>
      독일이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자 전통적인 애국심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인들이 참전했으나 결코 열심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정치인들 전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미운 정치인들이 전쟁을 지도하게 되니 국민들이 흔쾌히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開戰 6주만에 프랑스가 抗戰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해버린 데는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이런 不信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 일부 국민들은 "敗戰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컨대 프랑스 좌파는 소련을 조국처럼 생각하고 이 꼴을 보다 못한 우파는 차라리 나치 독일이 들어와 좌파를 혼내 주는 것을 보고싶다는 심정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세태와도 비슷하다. 한국의 친북세력은 김정일 정권보다 애국세력을 더 증오하고 있다. 애국세력도 김정일 정권보다 친북세력을 더 증오하여 "저런 반역세력이 당하는 꼴을 봐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이럴 때 김정일 군대가 남침한다면 한국인들은 열심히 싸울까? 지금 핵무장한 敵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의 自衛의지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평화至上주의가 좀먹은 自衛의지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오늘의 한국처럼 평화至上주의가 팽배했다. 어떤 代價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對獨유화정책이 히틀러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좌파는 핵실험을 하고 침략근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에 대한 自衛조치까지 "그렇다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윽박지른다. 좌파정권은 이런 선동을 이용하여 對北퍼주기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敵을 이롭게 하였다.
      1936년 히틀러가 독일군을 비무장 라인란트 지역으로 불법 진주시켰을 때 프랑스가 군사적 대응을 했더라면 독일군부의 쿠데타로 히틀러는 실각하게 되어 있었다. 평화至上주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는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단독으로 武力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도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다. 이 기회를 놓친 프랑스는, 재무장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된 독일군과 불리한 입장에서 상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애국심이 약화되자 노동자의 직업윤리가 붕괴되고 기업인들도 이기주의에 함몰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군수산업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國産무기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외국 무기의 수입을 방해하였다.
      앙드레 모로아는 이 책에서 "프랑스는 어떻게 했더라면 패전을 면할 수 있었을까"라고 自問自答했다.
      <첫째, 강하게 되었어야 했다. 국민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곧 자유를 잃는다. 민주주의는 국민도덕이 붕괴한 뒤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민첩하게 행동해야 했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가 과정을 중시한다면서 일을 미루고 기업은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총체적 비효율이 패전의 한 원인이었다.
      셋째, 국론통일.
      넷째,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국민의 여론을 보호했어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중에는 독일로부터 돈을 받고 親獨여론을 조작한 이들이 많았다.
      다섯째, 국가분열적인 사상, 즉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켰어야 했다.
      여섯째, 국민들이, 특히 지도층이 고결한 생활을 했어야 했다>
      위의 처방은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은 많으나 행동하는 사람은 적다.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은 많으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시간을, 지식을, 돈을, 손발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적다. 논평자와 분석가들은 많으나 구체적인 救國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방관과 무사안일의 축적은 패배주의를 만들어낸다. 막연한 패배주의와 막연한 낙관론 속에서 대한민국호는 지금도 기울고 있다. 30도인가, 45도인가? 이 기울기에서 復元力은 과연 있는가?
     
      프랑스의 반역자이자 영웅 페탕의 斷罪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에는 '두칼레 팔라초'라는 口자 모양의 장대한 베니스 공화국 정부청사 건물이 있다. 요새같은 건물 속에 내부정원이 있다. 거기서 2층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 위. 여기서 서기 1355년 국가 원수 마리노 파리엘은 금빛 나는 원수모자를 벗기우고 백발의 머리를 잘렸다. 10인 위원회의 한 위원이 창 끝으로 머리를 찍어 이 건물의 발코니로 나가 청중들에게 『나라를 배신한 자에게 정의를 구현했다』고 소리쳤다. 원수 이외에 11명의 음모자들은 참수형보다 한 등급 낮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파리엘이 평민들과 짜고 민중봉기를 선동, 공화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쿠데타 미수였다. 비록 미수사건이라 해도 베니스 지배층은 그들의 국헌(國憲)과 헌정(憲政)에 대한 도전에 가차 없는 응징을 한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 조국을 뒤엎으려는 반역에 대해선 大逆罪(대역죄. high treason)이라고 하여 보통 死刑으로 처벌한다.
      프랑스의 반역자이자 영웅 필립 페탕 장군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轉役을 기다리던 50代 후반의 고참대령이었다. 전쟁이 나자 그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을 거쳐 제2군 사령관으로서 유명한 베르당 전투를 지휘했다. 獨佛 쌍방이 낮은 野山지역에서 맞붙은 이 진지전에서 양쪽이 약80만 명의 戰死者를 냈다.
      나는 3년 전 베르당의 전투기념관을 구경한 적이 있다. 프랑스측에서 15만 명 분의 쌍방 유골을 수습하여 거대한 기념관 건물안에 꽉 채워놓고는 유리창을 통해서 들여다놓게 해놓았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유골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일 것이다.

      베르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물러서지 않아 이긴 셈이 되었다. 페탕은 '베르당의 영웅'으로 불리게 된다. 1917년에 그는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戰後엔 국방장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군의 전격전에 걸려 두 달도 되지 않아 붕괴되자 그는 국가원수로 추대되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페탕의 名聲(명성)도 작용하였는지 패전국 프랑스는 상당히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다. 히틀러는 페탕을 존경했다고 하는데 그는 프랑스 국토의 5분의 2를 페탕이 영도하는 비시 정부의 관할로 넘겨주었다. 이 비시 정부 구역엔 나치 독일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비시 정부는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독일이 벌이는 전쟁에도 휘말려 들지 않으려고 중립을 선언했으나 뒤로는 독일을 지원했다. 페탕은 프랑스의 敗因은 자유민주주의체제下에서 방임된 무질서와 부패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카톨릭의 전통에 입각한 건전한 풍습을 진작시킨다면서 여러 가지 우파적 개혁정책도 폈다. 물론 독재적 숫법을 썼고 反유태인 정책을 폈으나 비시 정부지역의 거주자들은 독일의 간섭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다가 美英 연합군이 北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독일은 1942년 11월11일에 비시 정부 구역 내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페탕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연합군이 1944년 6월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프랑스 수복에 나서자 나치는 페탕을 독일로 데리고 가서 연금했다.

      1945년 4월 독일의 항복선언 직전에 페탕은 프랑스로 돌아왔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한때 페탕 장군의 부하였던 드골 수상은 총살형을 종신징역형으로 감형했다. 페탕은 1951년 옥중에서 죽었는데 89세였다. 최근 프랑스에선 페탕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의 명성과 자존심이 패전국 프랑스의 전면적 붕괴를 막았고 인명 희생을 많이 줄였다는 이유에서이다.

      페탕은 한국의 형법 93조 與敵罪('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抗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에 비교하면 동정의 여지가 있는 반역을 범한 경우이다. 그는 敵國과 합세하긴 했으나 조국에 대항하진 않았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敵國과 협력했다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1차 세계대전 救國의 영웅은 83세에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식 正義라면 敵國(북한정권=準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抗敵한 자는 100세가 되어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