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딘 소장을 북괴군에 팔아넘긴 한국인  
     
      미국인이 고마운 것은 이런 배은망덕을 따지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趙甲濟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死守하여 한국을 구한 제1공로자 워커 8군 사령관(중장)은 1950년 12월 23일 서울 도봉구 근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이 몰던 트럭에 받혀 죽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 운전병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으나 옆에 있던 미군 장교 하우스맨이 말려서 재판을 받고 3년간 옥살이만 하도록 했다.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공방전에서 밀려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3년간 고생했다. 그는 휴전 때 풀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그는 1950년 7월18일부터 3일간 북한군의 총공세에 맞서 大田을 방어했다. 이 3일은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었다. 戰史학자들은 이 지연작전이 한국을 구했다고 말한다.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부하들의 앞장을 섰다. 그는 후퇴할 때도 부상자를 자신의 지프 차에 태우고 가는 등 끔찍이 아꼈다. 딘 장군은 혼란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때부터 35일간 낯 선 한국 마을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딘 소장은 한국인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세 번 배신을 당했다. 첫번째 한국인은 그를 보호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이때는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두번째 배신은, 한국인 형제가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 며칠간 보호를 받았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이 "떠나라"고 쫓아낸 일이다.
     
      세번째는 딘 장군이 대구를 향해서 길을 걸을 때였다. 韓, 崔라는 두 한국인이 딘 장군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북한군에 신고했다. 딘 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그 代價로 두 한국인은 3000원(5달러)씩의 현상금을 받았다.
     
      한국을 구하러 와서 목숨을 바친 미국인이 있는가 하면 그 미국인을 북한군에 넘겨주고 돈을 번 한국인도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고마운 것은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특별히 부각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워커 장군의 후임 8군 사령관은 릿지웨이 장군이고 릿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이후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는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였다. 아버지 곁에 있기 위해 戰線 근무를 자원했던 아들은 북한지역 폭격임무를 수행중 실종되었다. 밴 프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수색작전이 너무 지나치다고 중단시켰다.
     
      북한군은 한국군 피란민으로 위장하여 美軍을 공격했다. 미군이 노근리 사건을 일으킨 것도 양민을,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으로 오해한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에 흥분했던 한국인들중 과연 몇 사람이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이들이 한국인이었음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