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제정’으로서 ‘인민민주주의’를 고발한다

    박효종 (한국선진화포럼 편집위원, 서울대 교수)


       고대 그리스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민족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정치비전을 갖고 실천했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외심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자신들의 민주적 정치양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백성이 통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는 관행을 경멸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나 페르시아와 같은 거대한 오리엔트제국의 웅장한 문화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통치방식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냉소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특히 통치자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관행은 시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불평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나라의 사람들을 ‘야만인’을 의미하는 ‘바르바로스(barbaros)’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또한 그리스반도의 같은 도시국가들 가운데 마케도니아가 있었는데,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모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도시국가이면서도 왕에게 무릎을 꿇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인들을 ‘야만인’으로 호칭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전제국가의 특징

       우리가 이 21세기에 피통치자가 통치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에 대해 여전히 동일한 태생적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종교인들의 태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무릎을 꿇는 행위는 신(神) 앞에서는 할 수 있을 뿐, 인간들 사이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인간이 인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신이 되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음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관계’에 대하여 설명할 때 종종 ‘지배’를 뜻하는 라틴어 ‘dominatio’에서 나온 영어의 ‘domin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스어의 ‘despotes’나 라틴어의 ‘dominus’, 이 두 단어는 한결같이 노예에 대하여 자의로 권력을 휘두르는 노예주를 지칭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나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전제정을 뜻하는 ‘despotism’이나 ‘domination’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로마 시대에 제한된 기간의 비상대권을 의미했던 ‘딕타토르(dictator)’와는 다른 ‘일상적 정치’를 설명하는데 있어, ‘독재(dictatorship)’라는 단어나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권력현상에 대한 우리의 실존의식에서 억압적인 지배에 대한 공포스러운 느낌이 여전히 줄어들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의 시대’가 종식된 지금 전제정은 사라졌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전제정에 대한 반감과 평등의식, 인권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성과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잔인한 이집트의 파라오나 로마의 칼리굴라, 네로 등에서 연상되는 광기어린 황제들과 같은 전제군주에 대해 혐오감을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파라오나 칼리굴라, 네로가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했다고 한다면,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흉내 낸 ‘짝퉁 상품들’이 유난히 많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한을 보라. 북한은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자처해왔다.
    그러나 이번 김정은 3대 세습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괴기스러움을 드러낸 북한의 체제는 전제정의 가능성이 시·공간상으로 결코 먼 과거나 다른 지역만의 일이 아님을 실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정은은 왕조국가의 세자처럼 김정일의 후계자로 책봉된 것이다. 과거의 왕조국가와 차이가 있다면, ‘은둔의 왕국’ 답지 않게 서구의 기자들을 대거 초청한 상태에서 화려한 열병식을 통해 후계자가 되었다는 점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에서는 전제정의 방식으로 통치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북한의 통치방식은 주민들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이나 죽음을 강요할 수 있는 체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괴기스러움을 설명하기 위해 때때로 ‘불량국가(rogue state)’나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라는 새로운 개념과 용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실체와 본질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 이 명칭들은 북한을 도덕적으로나 체제의 수준에서 이해하는데 유용하거나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북한을 전제정 국가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제주의적 정치체제에서 질서의 궁극적 원리는 전제군주, 개인자신의 성향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전제정이라고 해서 정의(正義)나 법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런 무규범의 질서 체제는 아니다. 정의를 규정하는 절차뿐만 아니라 정치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나름대로의 법과 규칙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의성’과 ‘폭압성’이 통치의 유기적 특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제정의 본질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휘두르는 통치자의 무제한적인 권력에 대하여 법적으로나 제도적, 관행적으로 비판이나 반론을 정당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입법권을 가진 의회도 없고 반대파도 없으며, 자유언론이나 독립된 사법기구도 존재하지 않고 권력의 탐욕으로부터 법에 의해 보장받는 사유재산도 없다. 설사 의회나 언론, 사법기구가 있다고 해도 실체는 없고 이름뿐인 ‘유명론’에 의하여 압도될 뿐이다. 전제군주의 명령과 지시 이외에 토론과 설득, 합의의 공간이 존재할 수 없고 전제군주의 뜻과는 다른 어떤 공공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북한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흉내 낸 ‘짝퉁 상품들’이 유난히 많다. 종교를 보라. 장충교회도 있고 봉수교회도 있어 때때로 외국 관광객들이 들리는 명소가 되고 있긴 하나, 그렇다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있으나, 공개선거만 있고, 재판도 있으나, 사법적 정의는 없다. 군대도 있으나, 그 기능은 주민을 억압하는 일이 우선이다. 말이 좋아 ‘선군정치(先軍政治)’지, 총칼을 앞세운 ‘무단정치(武斷政治)’에 불과하다. 인민은 없고 노예만 넘쳐나며 단 한사람의 노예주만 대를 이어가며 군림하는 곳이 북한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동족의 입장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야 할 의무 때문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노예처럼 때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을 “그곳에서는 상식”이라고 강변하면서 어떻게 민족끼리의 정과 유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북한주민들을 노예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자유인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족사랑일 터이다.

    북한주민을 노예처럼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랑’이 아니라 ‘민족학대’다.
    민족주의자라고 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을 옹호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민족끼리”를 외치는 민족주의자일수록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공동체’를 꿈꾸어야지, 같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노예들의 공동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금물이다.
    <한국선진화 포럼, 선진화 포커스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