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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연대 제1대대가 희천을 점령한 후, 서북쪽으로 진로를 바꿔 걸어서 극성령(克城嶺)을 넘어 회목동(檜木洞)에 도착한 것은 10월 25일 점심때였다. 극성령은 자동차가 통과할 수 없었다. 군용트럭은 희천에서 남쪽 후방으로 내려가서 빙 돌아 온정을 거쳐 우현령을 넘어 회목동으로 와서, 극성령을 넘은 우리 도보 행군부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지어먹고 가기로 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밥 짓는 동안 나는 말라붙은 풀 위에 누웠다. 늦가을 오후의 바람이 냇가의 낙엽을 굴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모여들고 기온은 싸늘했다.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있어 몸을 일으켜 돌아보았더니, 시들어가는 들국화 한포기가 있었다. 나는 옆으로 누워 들국화의 향기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박태숙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단잠에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옆에서는 취사장에서 가져온 점심식사를 정정훈이 차려놓고 있었다.
식사가 모두 끝나도 우리와 합류할 군용트럭들은 오지 않았다. 우회해서 오는 그 군용트럭들이 통과하여야 할 온정, 우현령 등지에는 아직도 북한 공산군 패잔병들이 있어 국군 제2연대가 이들을 소탕하고 길을 열어 줄 때까지, 아마도 어느 곳에선가 멈춰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부대는 도보 행군으로 북으로, 북으로 치달았다. 해가 떨어져도 야간 행군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밤 늦게 군용 트럭들이 우리를 따라와서 그것들을 타고, 자정쯤 고장(古場) 마을에 도착해서 그곳 인민학교에서 숙영을 했다.
다음날 새벽 식사를 끝내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군용트럭을 타고 고장마을을 떠나 북진하던 제7연대 제1대대는 초산(楚山)읍 남방 약 6킬로미터 지점에서 북한 공산군과 격전을 벌여 이를 격파한 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에 그 선두가 압록강에 도착했다. 제1대대 전장병은 압록 강변에서 약 두 시간 머물렀다. 그런 다음 제1대대의 선두로 압록강에 도착하여 강변 마을인 신도장(新島場) 전 지역에 배치된 제1중대를 그대로 강변에 남겨놓고, 나머지 전 병력을 이끌고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압록강에서 약 6킬로미터 남방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중대장 숙소를 강변 중앙에 위치한 초라한 오막살이 초가집으로 정했다. 침실은 아랫방과 윗방 두개였으며, 부엌은 한 칸 반쯤 되어 보였다. 집주인은 피난을 떠나고 없었다. 중대 연락병 두 명, 간호학생 두 명, 나까지 다섯 명이 이 초옥에서 침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수풍댐의 영향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강물은 산과 산 사이를 가득히 채우고 빙빙 돌았으며, 수심이 깊었다. 청어만한 크기의 담수어들이 떼 지어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평화로운 국경선이다. 마을 초가집들의 굴뚝 연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하늘로 느리게 올라간다. 이른 아침에 쏟아진 함박눈은 오후의 햇살에 많이 녹아버리고, 응달진 곳에 만잔설이 남아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잃고 침략자의 손에 국경경비의 권리를 박탈당하여 35년, 그 후 그들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이 분단되어 5년, 모두 40년간의 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이제는 망국의 한도, 분단의 슬픔도 모두 사라지고 남북이 통일됐다. 남북통일의 감격 속에 지난날의 부조(父祖)들의 잘못을 거울삼으며, 자유조국의 미래를 그려보는 청년장병들의 가슴속에는 자유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며 나라를 번영시키겠다는 굳은 맹세가 있었다. 강 건너의 이국땅을 바라보고 있는 내 뒤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돌아보니 박태숙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진지 드세요.”
“그래, 알았다.”
나는 태숙이를 따라서 초옥으로 들어갔다. 아주 오래간만에 구두를 벗고 식사를 하게 됐다. 저녁식사는 정정훈이 차려놓고 있었다.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노획한 소련제 수류탄을 던져 압록강에서 잡은 담수어 조림이 반합 뚜껑에 가득히 차려져 있고, 날고추장이 또 다른 반합 뚜껑에 담겨 있었으며, 된장에 파를 넣어 끓인 국이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항상 먹던 주먹밥 한 덩어리와 고추장 한 숟가락에 비하면 놀라운 성찬이다. 처녀들의 솜씨는 보통 이상이었다.박태숙과 정정훈은 어느 틈에 머리를 감고 손질하였는지 더 예뻐 보였다.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웃옷 소매를 걷어 올린 것도 귀엽게 보였다. 다섯 명은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냈다. 저녁식사 후에 따뜻한 온돌방에 둘러 앉아 낡은 빅터 축음기로 오래간만에 레코드판 노래를 듣게 됐다. 축음기는 압록강 뗏목다리 부근에서 홍 하사가 주워 온 것이다. 축음기 태엽감는 일은 홍 하사가 하고, 나는 레코드판을 골랐다. 박 하사는 유성기 바늘을 열심히 숫돌에 갈아서 끝을 가늘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목포의 눈물’,‘ 나그네 설움’,‘ 애수의 소야곡’,‘ 타향살이’,‘ 사막의 길’...... 남인수, 이난영, 백년설, 채규엽, 고복수, 황금심, 박단마, 백란아 등등의 명가수들의 노랫소리는 촛불 켜놓은 아늑한 방에서 밖으로 새어나가 애수를 띠고 압록강 물결위로 사라져갔다. 밤이 깊어 노랫소리는 멎고 강 건너 중국 땅에서 개 짖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나는 담요를 덮고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은 피곤하였으나 중국 쪽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덮었던 담요를 젖히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적막이 가득한 어둠 속을 헤치며 강으로 내려갔다. 군화 끝이 강물에 젖었다. 만물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강 건너 개 짖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온다. 옛 일들이 생각났다. 그 옛날 고구려, 우리 조상들은 기마민족이면서도 성을 많이 쌓았다. 수도 평양성은 물론이고, 난공불락의 유명한 큰 성만도 요동평야의 안시성(安市城), 요동성(遼東城), 그리고 까마득히 저 멀리 북쪽의 부여성(扶余城), 그리고 남으로 내려와서 지금의 중국 장춘(長春) 남방의 졸본성(卒本城), 또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 중류 지점인 만포(滿浦) 건너편의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다.
바로 이 신도장 마을에서 강변 따라 60킬로미터를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국내 성 옛터가 나온다. 고구려 전성기에 우리 조상들이 달리는 말굽소리와 개선의 북소리가 1천 5여년의 시세(時歲)를 넘어 후손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용감무쌍한 조상들은 후손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떠한 나라도 내부분열이 일어나서 사분오열이 되면 끝내는 멸망하는 법이니 너희들은 이를 명심하라”고. 어두운 밤은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꽤 오래 강가에 서있던 나는 발길을 돌려 초옥에 들어가서 누웠다. 한밤이 가고 날이 밝았다. 박태숙과 정정훈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종알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밖에 나가 강 기슭에서 아침 맨손체조를 하고 강물로 세수를 했다. 물은 차지만 깨끗하고 기분이 산뜻했다. 강 건너 중국 쪽에서는 감색 누비바지, 누비저고리를 입은 중국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나와서 강물을 마시게 하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난 후 보초를 제외한 군인들은 팬티, 러닝셔츠, 양말 등을 세탁했다. 최전방에서 전투하는 소총 중대장병들이 목욕이나 세탁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면 그것이 세탁이 되고 목욕이 된다. 그러나 압록강변 신도장 마을에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 압록강변 벽동읍은 국군 제2연대가 곧 점령할 것이고, 위원읍과 만포읍은 국군 제8사단이 곧 점령할 것이다. 벽동읍 서쪽의 압록강변 주요 시나읍은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점령할 것이다.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자유가 오고 평화가 온다. 그 첫테이프를 우리가 초산, 신도장에서 끊은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 50분경에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압록강변에 배치되어 있는 우리 제1중대 지역에 왔다.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국군 제2연대가 온정 북진(北鎭)에서 새로 나타난 중공군과 교전 중인데, 상황이 국군 제2연대에게 불리하여 조금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온정 부근에는 국군 제19연대가 있고, 그 서쪽에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있다. 그래서 이들 아군 부대들이 중공군을 압록강 저편으로 쉽게 밀어버릴 것이라 가볍게 여겼다. 하늘은 맑고 기온이 온화해서 빨래와 고기잡이 하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씨였다.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만끽하면서 군인들은 10월 27일 낮을 즐겁게 보냈다. 저녁식사는 가장 성찬이었다.
압록강 물고기 반찬 외에, 초산읍에 있는 대대본부로부터 쇠고기 특식이 보급되어 참으로 오래간만에 불고기 맛을 보았다.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축음기 노래를 또 듣고난 후, 따뜻한 온돌방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정정훈과 박태숙은 절친한 친구였으나 성격은 정반대였다. 생김새도 정반대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정정훈은 키가 1미터 65센티 가량이며, 얼굴은 긴편이고 웃으면 두 볼에 보조개가 얕게 패었다. 살색은 검지도 희지도 않은 중간이고, 가지런히 난 이는 박씨처럼 희고 예뻤다.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집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어서, 큰 오빠는 일본에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취직을 했다. 그녀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학비는 오빠가 대주었다. 부모가 아닌 오빠로부터 학비를 받아써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이 그런것인지 말이 별로 없이 내성적이면서 한편 감상적이었다.
박태숙은 키가 작달만하고 얼굴은 동그랗고 말이 또랑또랑했다. 손은 조그맣고 피부색은 희고, 정의감이 강하며 재치가 있었다. 태어난 곳은 중국 만주이며, 8·15 해방 후에 부모를 따라 서울에 와서 정착했다. 오빠와 동생들이 있고 아주 명랑했다.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교 학예회때 이솝우화에 나오는 거북이와 토끼의 연극을 했는데, 토끼 역을 맡는 바람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흰토끼라는 애칭으로 불린다고 했다. 박태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나오면 생긋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은 화사한 봄날의 벚꽃을 연상케 하고 티 없이 맑아 보였다. 재미난 대화시간은 밤이 깊어지자 끝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처녀 간호학생들은 윗방에, 남자 군인 셋은 아랫방에서 잤다. 이날 밤도 늦게까지 중국 땅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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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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