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침묵의 시간'을 간파한 나의 구원자,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방 소장과 악수를 나누었으나, 원래 입이 무거운 분이라 말이 없었다. 그 다음 나와 악수 할 때 비로소 입이 열리며 무쇠소리가 섞인 듯한 가라앉은 음성이 차가운 설상(雪上)의 공기를 흔들었다.
“이 장군, 지금 어디있나?” 나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 어른이 나에대해 무관심 했구나.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도 모르고......” 하면서 “네, 제6군관구 작전부사령관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박 대통령이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며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에 발걸음을 티 그라운드 쪽으로 돌려 공타선에서 티샷을 하고 내려왔다. 김진만 의원, 정재호 회장 순으로 티샷이 모두 끝나자 박 대통령은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뚜벅뚜벅 되돌아오더니 내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이 장군”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네, 각하.” “왜, 보직을 받지 않았나?” 불과 몇 분 전에 내가 제6군관구 작전부사령관 보직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큰 소리로 대답했는데도, 왜 보직이 없느냐고 물으니 갑자기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질문의 참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즉 돈에 깨끗하고 피흘리면서 싸운 전투 경험 풍부하고,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가서 군의 선구자적 교육을 받고 왔으며, 나라 위해 일편단심 충절밖에 모르며, 지성을 다하여 일에 열중하는 너 같은 일꾼이 왜 개도 물어가지 않을 빛바랜 남루한 감투를 쓰고 초라하게 낙오자의 쓴 맛을 보고 있는지, 그 사연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늦은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사단장을 시켜주시면 분골쇄신, 헌신적으로 일하여 천하에서 제일 전투력이 우수한 사단으로 육성하겠습니다. 꼭 한번 사단장을 시켜주십시오!”라는 말이 목구멍 위에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고 말 문을 닫아버렸다. 엽관 운동을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또 “기왕지사 군에서는 낙오되었으니 슬픈 일이지만, 군복을 벗고 대사(大使) 자리라도 하나 주시면 대사관 무관 경험과 공사 경험을 살려 힘껏 일해보겠습니다”라는 대안(代案)의 말도 머리를 스쳤으나 이 역시 엽관 운동이라는 기분이 들어 지워버렸다.
그러는 가운데 10여 초가 지나갔다. 나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내 앞 1미터 80센티미터쯤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박 대통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감사와 충성과 경의를 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박 대통령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내 앞에 묵묵히 서서, 내 입에서 말문이 열리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20초쯤 흘렀을 것이다.
이 답답한 광경을 바라보던 방경원 소장이 내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더니 부동자세를 취하고 “각하, 이 장군은 제가 작전부사령관으로 데리고 있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나보다도 더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 없이 한참 서있다가 “이 장군!” 하고 또 무쇠소리 같은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네, 각하.” 박 대통령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는듯, 10여초를 또 묵묵히 서있더니 “나 먼저가”하고 시선을 떼면서 내 앞을 떠나 김진만 의원들과 어울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방 장군과 나는 거수경례로 그 분을 떠나 보냈다.
며칠 후, 나는 유재흥 국방장관으로부터 “대통령 각하의 특별지시에 의거, 이대용 장군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예편시킨 후, 주월 한국대사관 부대사로 임명하여 월남에 가서 월남 전후복구사업에 한국 기업인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음”이라는 면담 구두메시지를 받았다.
-
- ▲ 제3대 주한 베트남대사로 부임한 수사관 즈엉징 특(좌)과 이대용 전 주월공사(우)의 재회
◆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
얼마 뒤, 외무부는 주월 한국대사관은 인원 감축조치에 따라 부대사 직책이 없어졌으므로 나를 주월 한국 대사관 경제협조실장(=경제공사)으로 임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건의를 올렸다. 경제협조실장은 외무부 참사관 1명과 서기관1명, 노동청이사관 1명과 서기관 및 사무관 각각 1명, 건설부 부이사관 1명, 상공부 서기관 1명으로 구성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협조실을 지휘하는 1급 공무원이며, 정부 어느 부서에서 임명돼 나가도 상관없는 융통성 있는 자리였다.
나는 예편조치가 취해지지 않은채 사복을 입고 태완선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에게 신고를 하고, 업무지시를 받아 1973년 2월 12일 사이공에 부임하였다. 수개월 근무 후, 외무부 외교행낭을 통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나의 예편조치 및 새로운 민간공무원 신분 등에 관한 의견을 담은 편지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청와대 이모 비서관이 찢어버리고 박 대통령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의 귀와 눈을 가리는, 청와대 비서실의 두터운 차단 횡포의 벽은 그런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박 대통령이 알았다면 그런 못된 비서관은 청와대에서 추방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종찬 장군은 모두 벽돌같이 네모반듯한 독특한 성격을 지닌, 정의감·청렴성·성실성·근면성·인내성·불굴의 투지·용기 등을 가진 진취적 지도자였으며, 모든 사물의 가치판단의 자(尺)를 공유한 지도자들 이었다. 하지만 현역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문제에대해서만은, 두 지도자의 생각은 정반대로 엇갈렸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도 이종찬 장군과 생각을 같이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간 후 부터 나는 박 대통령의 시정(視程) 밖, 아득히 떨어진 곳에서 근무했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일에 대해서 바른 길을 밟고 지성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했을 뿐, 박 대통령에게 보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근무처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묘하게도 나의 벽돌 인생 길이 세파에 밀려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을 때, 박 대통령이 홀연히 나타나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구원해준 다음, 또 홀연히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차단하고 있는 장막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내가 베트남 공산정권의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5년간, 박 대통령은 나를 살려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다가 뜻이 이루어질 무렵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정치관여 문제만을 빼놓고는 모든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한참 아랫사람에게 그렇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 세상에 있기 드문 일이었다.
진해에서 만나 서로 뜻을 함께하고 나의 존경을 받던 박정희 장군과 이종찬 장군, 모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이제는 없다. 나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일생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태어나서 서로 만나 인연을 맺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상대에게 주는 영향의 총량(總量)이 그 사람의 일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종찬 장군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분들이다.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있고 들국화도 핀 어느날, 오래간만에 진해를 찾아 갔더니 드높은 하늘과 군항을 동쪽에서 멀리 에워싸고 있는 바위산의 연봉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으며, 반세기 전의 옛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산천은 그대로이며 계절은 해마다 돌아오건만, 멀리 떠나가신 분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구나. 인생이란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주소 : 서울 종로구 동숭동 1-49 동숭빌딩 301호
전화 : 02-763-8996 (편집부)
홈페이지 : http://www.guiparang.com/
E-mail : info@guipar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