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로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하루에 30여명씩 죽어나가는 ‘인간 지옥’이었다.”
    2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2010 서울대회’ 선포식에 이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 증언에서 수용소 탈북 탈북자들은 아직도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잡혀 요덕관리소에 수감된 김광일씨(가명)는 “수감자들이 배가 고파 농약 섞인 감자종자를 먹기도 했다”며 “내가 있는 동안 250명 중에 80명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중국을 다녀와 국경이탈죄로 수용된 이옥화씨(가명)은 “기독교를 접했나?”는 질문에 부인하자 얼굴을 때려 이빨도 다 부서졌고, 손톱도 뽑았다고 증언했다.
    다음은 이들의 증언 요약이다.
     
    김광일 (가명)
    <제15호 요덕관리소 혁명화 구역(1999-2002)>
     
    먹고 살기가 힘들어 중국에 왔다 갔다 했었는데, 한 번은 중국에 넘어가서 관광 온 한국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삼촌이 보내준 성경책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그것이 성경책인 줄은 처음에 몰랐고 그저 읽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한국방송도 들었고, 결국 보위부가 집에 와서 수색을 했는데, 사진, 성경책, 라디오가 나와 보위부로 끌려갔다.
    1999년 4월에 잡혀서 무산군 보위부 구류장에 8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조사 받는 시간 외에는 무릎 꿇고 있는데 하루 중에 딱 15분만 일어서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1999년 12월에 요덕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농산반에 배치되어 농사 일을 했는데, 배고픈 수감자들이 종자를 먹으니깐 보위부원들이 종자에 농약을 뿌려 주었다. 그래도 배고픈 수감자들은 농약 섞인 종자를 먹기도 했다. 내가 있는 동안 250명 중에 80명이 죽었다. 주로 허약으로 영양실조로 죽는 경우가 많았고 설사를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탈출하다 공개 처형되는 것도 보았다.
    출소하고 중국 청도에 한동안 있다가 한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이금난 (가명)
    <제15호 요덕관리소 혁명화 구역(2000-2002년)>
     
    2000년 12월, 8명이 함께 한국행을 시도하다 몽골 국경에서 잡혀 강제송환되었다. 온성 보위에서 6개월 있었다. 나는 3일 만에 취조가 끝났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남한에 가려고 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바람에 평양 보위부 사람들이 와서 또 심문하여 기간이 길어졌다.  몽골에 돈 벌러 가려고 했지 남한에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죽을 각오로 얘기했지만, 결국 요덕수용소 3년형을 받았다. 요덕이라는 지역은 알았지만 그곳에 수용소가 있는 것은 몰랐다. 나는 요덕 수용소에서 독신자들을 격리시키는 금천리에 있었다. 
    금천리에는 남자가 200명 정도 있었고, 여자는 20명 정도였다. 그곳에서 주로 옥수수 농사, 콩 농사를 했다. 축산도 하는데 돼지, 오리, 염소, 양 등을 키웠고 다 보위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 끼에 죽 밥을 조금 주는 3-4 숟가락 정도 되는 양이다. 그날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반만 준다. 5시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1시간 학습하고 계속 강제노동을 했다. 조직별로 열흘에 한 번씩 생활 총화, 월에 한 번씩 마을 전체 총화, 분기에 한 번씩 문답식 공부(김정일 정치사상 학습)을 하는데, 문답을 못하면 잠을 재우지 않고 5일 간 더 공부를 시켰다.
    일년에 10명 정도 죽었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영양실조로 설사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하다 죽으라는지 아파도 현장에 끌려가서 일해야 했다. 수용소 안에 또 구류장(감방)이 있는데 말 잘 못하면 그곳에 끌려간다. 구류장에서는 두 숟가락의 죽을 주고 계속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구류장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죽는다.
    배고파서 도망친 사람과 배고파서 도둑질 한 사람을 공개총살했다. 공개총살은 조그만 강 다리 밑에서 행해졌다. 8월에 퇴소할 여성과 3월에 퇴소할 여성이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다.  8월에 퇴소하는 여성의 경우에는 그와 관계 맺은 남성은 완전통제구역으로 갔고 그 여자는 6개월 연장 되었다. 3월에 출소할 여성은 6개월 연장되었고 그와 관계 맺은 남자는 3개월 연장되었다. 아기는 둘 다 산에 묻었다.
    3년 후에 풀려났다. 나갈 때 보위부원들이 나가서 생활 잘 하고 다시는 그런 데 갈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풀려나도 감시 대상이기 때문에 다시 탈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혜숙 (가명)
    <2005년 개천여자교화소, 2003년 온성군 노동단련대> 
     

  • ▲ 개천여자교화소 출신 신혜숙씨 ⓒ 김상엽 기자 
    ▲ 개천여자교화소 출신 신혜숙씨 ⓒ 김상엽 기자 

    1998년 먹을 것이 너무 없어 중국 가서 돈 좀 벌어서 돌아오려고 딸과 남편을 두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서 장사를 다녔는데, 물건 팔러 중국사람 집에 갔다가 개밥을 보고 놀랐다. 왜냐하면 개밥에 닭고기와 닭뼈가 있는 것을 보고 중국은 잘 산다고 생각했다. 1년만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죽었고, 딸은 미나리만 먹어 이빨도 다 빠지고 배만 불룩하게 나와 어렸을 때 예쁜 모습이 다 사라져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중국에도 개도 닭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에 자주 강을 넘어 중국으로 다녔고, 그런 중에 중국 남자와 살았다. 그리고 중국 남자의 본처가 내가 얄미워 중국공안에 신고를 하여 매년, 어떤 해는 두 번 강제송환 당했다.
    보위부 구류장에 사람이 꽉 차서 복도에 4줄로 서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맨 끝에 서 있었다. 보위부원이 배 나온 여자를 불러내어 발로 차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숨이 막히고 같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결국 그 여자는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하자 밤 10시경 군의가 와서 데려갔다. 그 이후론 그 여자를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감옥에서 나오면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붙듯이 우리도 북한에서 마찬가지라 살 수가 없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또 탈북하여 목숨 걸고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이유로 친딸과 친구의 딸을 데리고 경비대원들에게 4500원 주고 두만강을 건너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옥화 (가명)
    <함흥시 9호 교화소>

  • ▲ 함흥시 9호 교화소에 수감됐던 이옥화씨 ⓒ 김상엽 기자
    ▲ 함흥시 9호 교화소에 수감됐던 이옥화씨 ⓒ 김상엽 기자

    중국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회령시 보위부 구류장에서 8개월 동안 조사받았다. 말이 조사지 고문만 받았다. “기독교를 접했나?”는 질문만 계속 했고, 계속 부인하자 얼굴을 때려 이빨도 다 부서졌고, 심지어 나의 손톱도 뽑았다. 그리고 국경이탈죄로 교화소 4년형을 받았다.
    교화소 생활은 끔찍했다. 18시간의 노동과 식사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한 반에 150명 정도 있었는데 내가 있던 교화소에는 여자 반만 7개가 있었다. 5시 30분에 기상하면 바로 차를 타고 80리 (약 31km) 떨어진 산에 가서 작업을 한다. 처음 작업장에 도착해서 땅을 팠다. 우리는 그 땅 속에서 잠을 잤고 일어나면 나와서 바로 작업을 해야 했다. 7시 30분 아침, 12시 점심, 그리고 저녁 7시에 저녁을 먹는데 가져다 주는 밥이라고는 강냉이 죽과 맹물뿐이었다.
    하루에도 30여명씩 죽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굶어서 뼈가 튀어 나와 보기 흉측했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나도 우연히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너무 배가 고파 개똥 속에 있는 강냉이를 골라내어 먹는 것도 보았고, 어떤 할아버지가 밥을 먹는 중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 입 속에 있는 밥을 먹으려고 싸우기까지 했다.
    겨울에는 나무를 했는데, 너무 추워 사람들이 비닐을 덮어 씌고 일한다.  일렬로 줄을 서서 40리 되는 길을 걸어 나무를 하러 갔는데, 그 때 두 명이 도망치려다 잡혔다.  수감자들 앞에서 너희도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때려 두 사람 다 눈알이 터졌고 결국 죽었다.
    그 이후에 집도 없어지고 먹을 것 없어 꽃제비로 지내다가 답답하면 중국에 가서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체포가 두려워 다시 북한으로 와서 꽃제비 생활을 했고, 다시 또 중국으로 갔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송환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큰 아들도 병으로 잃고, 결국 2007년 6월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비자를 받자마자 큰 아들 시체라도 찾으려고 중국 연길 병원으로 갔지만 끝내 시체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직도 첫째 아들이 꿈에 나타나면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찢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