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운동권이었다. 인하대를 졸업했다. 인하대라, 공업입국에 이바지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1954년 인하공과대학으로 출발한 대학이다. 총학생회장도 지냈다. 부선망독자(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아들)라 군에 안 가도 됐다. 그런데 고집스레 군에 갔다. 그것도 ROTC를 해서 장교로 갔다. 국민으로 할 도리는 하겠다는 의지였다. ROTC 지원도 ‘독자’라서 불합격될 것을 시쳇말로 ‘빽’ 써서 갔다.

    막내 고모부가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중위 시절 기갑부대 교관을 지냈다. 탱크를 맡아 교육을 시키는데 이 탱크가 매일 말썽이었다. 소총도 제대로 못 만들던 시절이었다. 부품 하나만 없어도 탱크는 기동을 못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탱크? 이건 뭐 아예 50톤짜리 고철이었다. 덩치나 작아야 엿 바꿔먹지. 고장이 나면 매번 미군에게 부품 앵벌이를 해야 했다.

    “야! 이건 정말 큰일이다.” 그래서 제대하자 바로 국방과학연구소 문을 두드렸다. 1970년 문을 연 국방과학연구소는 국산 무기 연구개발이 임무였다. 국산 탱크 만드는 게 소원이었다.

    운이 좋았다. 자주국방이 소원이던 박정희 대통령과 국산탱크 만드는 게 소원이던 전 운동권은 그렇게 이어졌다. 대구경 포와 포탄, 수륙양용전투장갑차를 개발하고 한국형 전차 흑표의 설계까지 마치고 정년퇴임했다. 역시 간절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조남태 대명병원 부회장이 그 사람이다.

  • ▲ 국산무기 개발에 헌신했던 조남태씨. ⓒ 뉴데일리
    ▲ 국산무기 개발에 헌신했던 조남태씨. ⓒ 뉴데일리

    무기라곤 국산이 없던 시절이었다. 제 2차세계대전 때 쓰던 M1소총에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LMG(M1919경기관총)가 주 전투장비였다.

    M1소총은 한국인의 체형에 맞지 않는다. 길고 너무 무겁다. 지지할 팔 힘이 충분히 없으면 쏴봐야 표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월남전 참전 대가로 미국이 인심 쓰듯 준 M16소총은 70년대 후반에나 구경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과 산업화 두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신 분입니다.” 방위산업은 중공업이다. 무기 개발과 양산 기술은 바로 산업기술로 이어진다.

    조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 전력증강 8개년계획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에 추진하게 한 것은 ‘일석이조를 노린 혜안’이었다고 말했다. 전력증강 8개년계획은 율곡사업으로 불린다. 1973년 4월 국방부 을지연습 상황을 점검하던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한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전력증강계획을 발전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국방부가 1974~1981년 8년 동안 자주적인 전력증강계획을 수립해 박 대통령이 재가를 한 것이 1974년 2월 25일. 사업 명칭은 ‘10만 양병’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 선생의 호를 빌렸다. 율곡의 ‘유비무환 사상’을 본받자는 의미다.

    이 율곡사업을 통해 M16소총, 한국형 미사일, 한국형전차(K-1전차), 경훈련항공기 제공호(制空號) 등이 국산화 되었고 해군은 고속정(함), 호위함, 초계함, 기뢰탐색함, 군수지원함, 상륙함, 잠수함 등을 건조하여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또 상륙장갑차(LVT 7A1) 등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자주국방을 위한 기술은 산업화를 위한 기술로 뻗어나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우리나라에 중공업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조 부회장은 자주국방을 위한 기술이 중공업 발전의 모태가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 ▲ 국군의 차세대 전차 흑표의 위용. ⓒ 뉴데일리
    ▲ 국군의 차세대 전차 흑표의 위용. ⓒ 뉴데일리

    그는 남다른 감회로 26일을 맞는다. 박 대통령의 서거 30주기인 때문이다.

    “역사를 안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를 모르니 현상(現狀)을 모른다는 얘기다. 누가? 요즘 한국 사람들이다.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관과 사회관, 가치관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의 경제대국이 있게 만든 박정희 시대를 외면하면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는 뒤늦게나마 KIST 출신 과학자들이 박대통령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대전으로 옮겼지만 국방과학연구소나 KIST나 같은 ‘홍릉 식구’ 아닌가.

    조 부회장은 북한이 핵위협을 하는 것은 ‘공포의 균형’을 무너트리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일본 이후 세계 어디서도 핵무기가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핵무기를 두려워합니까? 핵이 주는 공포 때문입니다.” 핵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차이는 ‘공포의 균형’이 깨졌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한 방이면”이라는 생각은 한없는 자신감과 한없는 낭패감을 각각 선물한다. 있는 자의 자신감, 없는 자의 좌절이다. “탱크 몇 대 만들어봤자”라는 좌절감은 군이나 국민의 사기와 이어진다.

    그래서 조 부회장은 ‘숨어서라도 핵을 가지려 했던’ 박 대통령의 결연했던 눈매가 그립다. 그 단호했던 의지가 가슴을 파고든다. “이제 우리도 핵 농축재처리시설을 가져야 한다고 외국에 당당히 요구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위협 앞에 선진국들 눈치만 보는 오늘의 한국이 너무 안타깝다. 더구나 세계 5대 원자력국가인 한국 아닌가?

    “평화란 전쟁에 대비하라고 적과 아군에게 똑같이 나눠준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정말 알뜰하게 썼던 분은 30년 전 유명을 달리했다. 조 부회장은 그런 그 분이 오늘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