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의 당면 과제는 크게 세가지다. '노영(勞營)방송', '방만경영', '불공정방송' 이란 꼬리표를 떼는 것이다. 엄기영 사장이 9일 자사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김우룡. 이하 방문진)에 해법과 이행 일정표를 제시했다. 방문진은 그의 거취에 대한 최종 판단을 유보했다. 기회를 준 것이다. 엄 사장 스스로 "제대로 안하면 사임하겠다"며 강한 추진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문진은 엄 사장이 제시한 해법이 썩 내키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노영방송 꼬리표]
    "해법 구체적으로 나왔지만 과연 시행할 수 있을지"

  • ▲ 엄기영 MBC 사장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 참석하고자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빌딩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엄기영 MBC 사장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 참석하고자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빌딩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당초 해임 쪽에 무게를 뒀던 방문진이 엄 사장에게 기회를 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사실상 노조가 장악한 기형적 경영구조를 개선할 해법을 갖고 왔기 때문이다. 노조의 인사권 개입을 규정하고 있는 단체협약을 개정하겠다는 게 그가 한 약속이다.

    회의에 참석한 이사 다수가 "노사관계 개선은 구체적으로 나온 것 같다"고 평할 만큼 엄 사장은 이 문제에 있어 준비를 단단히 했다. 문제는 "과연 엄 사장이 이를 시행할 수 있을지"다. 한 이사는 "시행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어려움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했다. 가장 영향력이 큰 노조의 입지를 대폭 축소시키는 것이어서 반발이 거셀텐데 엄 사장이 이를 추진할 만큼 강단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우려에서다. 방문진이 엄 사장을 MBC 개혁의 "적절한 캐릭터가 아니다"고 보고 그의 거취 문제를 고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관계자는 엄 사장에 대해 "좋게 말하면 착한 사람,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방만경영 꼬리표]
    "임기 절반 지났는데 27명 명예퇴직 한 것밖에 없다"

    방만경영 문제는 인적쇄신으로 귀결된다. 또 불공정·편파보도와도 맞물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엄 사장은 이 문제를 내년 2월에 있을 주주총회로 넘겼다. 여당 추천 이사 뿐만 아니라 야당 추천 이사까지도 "인적쇄신안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할 만큼 구체적이지 않고 미흡하다는 게 방문진의 판단이다. 회의에서도 즉각 "인적쇄신을 주주총회에 미루는 것은 경영진으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고진 이사)는 비판이 제기됐고 김우룡 이사장도 "이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이사는 "결국 주주총회가 있는 내년 2월까지 현재 사람들을 안고 가겠다는 의도"라고 꼬집었다. 이 이사는 "그렇게 하는 건 신뢰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인적쇄신 방안을 내달라"고 거듭 요구했지만 엄 사장은 "믿어달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경영문제 역시 엄 사장이 중장기 인력계획안과 미래비전 등을 제시했지만 이 이사는 "솔직히 (엄 사장이 취임한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이런 계획안이 없었단 말이냐"고 지적하며 "앞으로 남은 임기가 1년인데 그동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임기 절반이 지났는데 지금껏 한 것이라곤 27명 명예퇴직한 것 밖에 없다"고 했다.

    [불공정방송 꼬리표]
    "지금도 PD수첩 광우병 보도 잘못했다 생각 안하는데"

    어마어마한 국가적 손실을 일으킨 PD수첩의 광우병 왜곡보도는 MBC 경영악화의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한 이미지 손상은 간판 뉴스프로그램 시청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광고수익 절감이란 악순환을 낳았다. 엄 사장은 경영진으로 구성한 '리뷰 보드'와 '공정성위원회' 설치, '심의제도 강화'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지만 정작 방문진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고 반박한다.

    이미 PD수첩의 광우병 왜곡보도 사건 이후 MBC 스스로 공정방송 방안을 제시했지만 지금껏 달라진 건 없다는 게 방문진의 판단이다. 한 이사는 "그럼에도 올 상반기 미디어법에 대해 공정방송은 커녕 가장 노골적으로 편파방송을 했다"면서 "이 문제는 제도보다 내부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엄 사장이 제시한 해법은) 시스템에 많이 치중했다"고 주장했다.

    엄 사장이 제시한 리뷰보드와 공정성위원회 설치 등도 "양날의 칼"이라며 "사전검열을 하겠다는 것인데 오히려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 뒤 "한시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만 이 자체가 공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고 제도로서 완성도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공정방송 실현 여부는 결국 PD수첩 문제로 귀결되는데 엄 사장은 '광우병 보도' 재조사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홍재 이사가 회의에서 9월 내 조사 시작을 요구했지만 엄 사장은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 이사의 요구에 답이 없자 다른 이사들도 "진상조사를 적극 검토하라"고 주문했지만 이 역시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이사는 "지금도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하는 데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라며 "공정성위원회 등이 제대로 될 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엄 사장이 진상규명을 약속한 것은 '100분 토론' 프로그램에서 발생한 '시청자 의견 조작'사건이다.

    엄 사장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그가 제시한 이행 일정표를 놓고 봐도 앞으로 한 두달 안이면 MBC 개혁에 대한 엄 사장의 실행의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게 방문진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