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토와 국민 있는 것은 국내 '한성 임시정부' 뿐

    무릇 어느 국가에게나 건국의 역사는 있게 마련이고 그 역사는 나라마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반만년이라는 우리의 민족사에서 현대국가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는 그것이 오랜 독립운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나, 해방 후 온갖 국제간섭과 공산당의 악랄한 방해를 이겨낸 힘찬 건국운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훌륭한 창업임에도 건국60년이란 말에 시비를 걸고 경축식 참여를 거부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요, 이것을 국가 정체성의 위기(idendity crisis)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승만, 1919년 일본천황에게 '즉각 철수하라' 국서 보내

    1. 대한민국은 국가이다. 국가가 성립하기에는 당연히 건국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이 되었는가? 그것을 상해임정이 선포된       1919년 4월13일이라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첫째 4월 13일에 상해임정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단체이다. 그것이   정통성을 갖기에는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노령·상해·한성의 세 임정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을 이룩한    9월6일 다음의 일이다.
      둘째 영토와 국민이 없는 건국은 관념상의 개념일 뿐 건국이 아니다.      미국이 연방정부 수립 전 1776년 7월 4일에 선언한 독립을 건국일로        삼는 것은 영토와 국민이 있는 상태에서 행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셋째 1948년 5월 31일 이승만 제헌국회의장이 말한 건국일은 상해임정    이 아닌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1919년 4월 23일이며 일제하이지만    국민과 영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와싱턴에 집정관총재부    를 설치하고 서울에서 세워진 정부의 국가원수(집정관총재를 그는 국제적으로 알기 쉽게 President라고 영역하였다) 자격으로 6월 18일 일본천황에게 국서를 보내 적법한 한국의 정부가 세워졌으니 일본군대 및 일본관리와 일본인을 철수하라고 요구하였었다.

    임정 수반된 이승만, 'Republic of Korea' 탄생을 세계각국에 통보

    2.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라는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1919년 6월 14일 英·美·佛·伊 등 열국에 국서를 보내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정부가 탄생한 것을 통고하고
    이 공문에서 그 나라마다 과거에 대한제국이 수호조약을 맺었던 사실을 적시하여 이 정부가 그 우호관계를 지속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이것으로 정부대표인 이승만은 신생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한국인의 정통적 민주국가임을 알린 것이며 우리나라의 국제적 명칭인    Republic of Korea는 이 때 이승만집정관총재가 외국에 보낸 이 첫 공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여 확정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대한제국을  승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원수이었다. 여기에 역사의 단절이란 없었다. 그리고 9월 6일 상해에서 세 개의 임정이 통합되면서 그의 국가원수명칭도 대통령으로 확정이 되었다.
     
    이승만, 태평양전쟁 나자 특수부대 참전시켜

    3. 이승만은 임정의 초대대통령으로 1925년까지 재직하였고 그 후에도  1932년에 임정의 전권대사로 국제연맹에서 활동하였으며 태평양전쟁중에    는 임정의 구미위원부위원장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홍보와 임시정부의    국제승인 및 대일참전을 위해 활약하여 국내에 침투시킬 한국인 특수부대를 미군과 광복군내에 조직하는 등 조국광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전시를 통해 친소정책을 일관한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분단은 소련과 조선 공산당 책임

    4. 해방기념일로 알려졌던 1945년 8월15일을 오랜 세월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한 독립운동의 성과로 재평가하여 광복절로 경축하고 있지만 이날은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날이 아니며 얄타밀약으로 한반도는 장차 미·소·영·중의 신탁통치를 받게 할 예정지역 이었다. 그리하여 그 후 3년간을 이승만의 영도로 우리의 민족진영이 모스크바 3상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소련군점령하의 북한에 이미 공산단독정권을 만든 공산당의 한반도 적화음모를 분쇄하고 탁월한 외교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시켜 현대국가 성립의 정칙(正則)인 총선거를 UN관찰 하에 시행하도록 하여 마침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승인 받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현대국가 성립의 정통화 과정을 모두 충직하게 따랐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임정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이 오랜 독립운동을 마무리한 건국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2차대전 후 우리 민족이 반탁과 반공이라는 피나는 건국투쟁으로 어렵게 자유독립을 쟁취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매우 자랑스러운 건국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건국투쟁으로 주권을 회복한 1948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국가 대한민국을 국민과 영토 및 주권을 갖추어 나라를 건국한 날인 것이다.
    남북분단의 책임은 민족해방과 함께 북한을 공산화하여 공산정권을 세우고 UN관찰하의 남북한통일선거를 거부한 소련과 조선공산당 및 이에 동조한 아류정치인(亞流政治人)들에 있는 것이다.

    소련, 북한에 1946년 이미 단독정부 세워

    5. 그러면 광복직후부터 누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였는가?
       첫째가 소련과 조선공산당이다. 그들은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오자 인민위 원회를 조직하고 스탈린이 지명한 김일성을 수반으로 1946년 2월8일에는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공산화를 가속하였으며 남한까지 적화하려고 공산군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기간중 북한에 공산국가 조직을 끝내고 그것을 굳게 지키기 위해 38선을 국경화 하고 평화적 남북통일을 가져오게 할 UN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거부하여 남북분단을 영속화시켰으며 남한공산화를 막게 될 대한민국의 건국을 폭력으로 반대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1948년의 제주4·3폭동이었다. 그리고 4월19일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북한에 불러 이른바 4·30성명을 공동성안 해서 두 김을 대한민국 건국반대의 앞잡이로 삼았으며 그 후 1950년에는 6·25남침으로 동족을 살상하며 남한을 적화하려고 하였다.
     
    김구 "붉은 군대 휩쓸텐데..." 건국 무용론 일관

    두 번째가 김구의 변신(変身)이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대체로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따르다가 1947년 12월 2일 장덕수(張德秀) 암살로 한민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후 완전히 변심하여 UN감시하의 선거를 반대하며 소련과 조선공산당의 한국공산화정책에 합류해 버렸다. 그는 1948년 4월 김규식과 북한에 가서 이른바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4김이 공동성안한 한반도 공  산화안인 4·30성명에 도장을 찍고 남한에 돌아와 대한민국 건국반대에 나선 것이다.
      한때 민족진영의 영수로 알려지기도 하였던 두 김씨의 변신의 말은 이러하였다. 김규식은 1948년 1월 27일, UN한위(韓委)가 북한이 UN선거를 거부하니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서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를 묻는 말에 선거를 반대하며 “---남한에서 정부가 수립된다 해도 50만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공산군 앞에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김구는 7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개석(蔣介石)총통의 뜻을 전하는 유어만(劉馭萬)공사에게 “ ---내가 요인회담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    대의 확장을 중지한다고 해도 남한이 전력을 다해서 붉은 군대의 현재병력    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인들은 책잡힐 일 없이  쉽게 남쪽에 대한 급습을 할 것입니다. 당장 여기에 정부가 세워지고 인민    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고 말하였다.
    두 김씨는 이렇게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곧 공산당에 의해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건국무용(建國無用)의 일치된 신념으로 건국반대를 한 것이    다. 두 김씨는 이와 같이 공산당 앞에 완전한 패배주의자(敗北主義者)가 되어 김일성이 남한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좌익정당·단체를 불러들여 북의 공산당과 그 휘하의 단체들을 합친 56개 남북 정당사회단체에 끼어서 민족진영을 배제한 (공산)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구, 김일성에 "과수원 하나 마련해달라"

    6. 두 김씨는 5월 1일 메이·데이 데모로 평양에서 펼쳐진, 소수의 중공 팔로군이 참가한 북한공산군의 성대한 열병식을 참관하고 3일에 김구는 김일성   과 단독면담을 해 남한에 가서 투쟁을 하다가 다시 오게 되면 여생을 보내    게 과수원을 하나 달라고 청하여 약속을 받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世界 1985年, 8月號 p.195) 
    5월 5일 서울에 돌아온 두 김씨는 6일에 공동성명   을 발표해 북에 가서 결의한 남한선거반대와 외군철수 요청이 그 성과라고 하여 4·30성명을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성명서에 표시된 바  와 같이 동족상잔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고 거짓을 말하며 이제  남한정부수립 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기미년 서울서 수립된 임정 국민대회를 계승한 대한민국

    7. 한국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1948년 5월10일 총선거로 소집된 3l 일의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의장은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다.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는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련의 공의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이 민국은 기미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 날이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임을 이에 공표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한 한국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공포하는 바입니다. ···"

    8.  이승만의장이 이 개식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적이며 민주적인 정통성이다. 그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서울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13도 대표가 모여서 조직한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 국회에서 탄생할 새 정부가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권회복은 독립운동의 소산이며 따라서 군정 3년간의 민족자결원칙에 따른 자율적 정부수립운동이 독립운동인 동시에 건국운동인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29년의 긴 역사를 마무리한 1948년의 건국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따라서 명실 공히 국민과 영토를 갖추어 주권이 확립된 1948년이 사실상 대한민국 건국의 원년인 것이며 그것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만큼 건국을 완성하기까지 독립운동의 역사가 길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승만의장은 건국에 앞서 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강조하여 한국민족사의 계속성을 지켜낸 것이다. 이렇게 이승만은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고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우리 민족사상 처음인 현대국가 대한민국건국에 그 맥을 잇게 한 대통령이기에 그가  이룩한 건국기의 절대(絶大)한 공로와 함께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다.
     
    북한, 김구 평양 있던 날 '인민공화국 헌번' '인민국기' 채택

    9.  한편 김구는 1948년 6월7일 기자에게 “현 국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  통을 계승할 아무 조건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7월 1일에는 “대한민국의 국호나 법통도 반 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 는 통일정부를 세우게 할 UN감시하의 남북한선거를 못하게 한 것이 소련과 김일성의 공산당이고 그들에 합세를 하고 있는 것이 김구 자신임을 망각한 발상이었다. 김구는 자기가 북한에 가서 서명한 4·30성명으로 만들게 될 공산정부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할 자격이 있고 대한민국의 국호도 쓸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구가 평양에 있던 1948년 4월 28일에 인민회의(특별회의에서)가 이미 제정된 인민공화국기를 채택하였고 2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었다. 그리고 북한공산집단은 본래 임정의 법통을 부정해온 것이 사실이니
    김구의 이 같은 주장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반대를 위한 억지발언일 수 밖에 없었다.
     
    김구, 남침 예감하고 와서 "전쟁은 없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  왔다. 그러면서 두 김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건국반대이었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 이었다. 이 건국무용론은 그 후 남한에서 종북좌파(從北左派)에 의해 계승되어 대한민국이 태어나서 안 될 나라로 선전이 되고 미군철수와 반미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구는 1948년 7월19일 정가의 소문인 이승만의 김구포용설을 묻는 기자에게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완강히 부정하였으며 건국전야 8월14일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 말하였고 그 후 대한민국의 UN승인을 방해하려 했으며 4·30성명을 금과옥조로 미군철수를 끝까지 주장하였다. 머지않아 북한공산군이 남쪽을 쳐내려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미군의 조속한 철수를 재촉하는 일이야말로 북의 공산정권을 돕는 길이었고 이어서 공산통일을 실현하는 방법이었다.
      김구는 서산대사의 한시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애송 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김구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나라 우리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대한민국 부정한 김구는 임정을 스스로 부정한 것"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 해방 때까지 혁혁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치에 어두워 민족의 장래를 내다볼만한 식견이 없어 해방정국의 정치적 미아(迷兒)가 되었다가 마침내 북한공산집단의 하수인격으로 전락(轉落)하고만 것이었다. 우직한 성품의 대중영합주의자인 김구는 한국인의 무비판적 감정에 잘 어울리는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것은 바로 임정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제헌국회의장의 자격으로 이것을 정식으로 계승하게 한 것이니 그것을 부정한 김구는 지금 자기가 대한민국에서 받는 예우에 대하여 저승에서 이승만에게 감사할 일이다.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사회가 지금도 김구예찬론 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김구 우상화의 함정...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

    10. 반세기를 북한의 선전공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역대정권과 신문·방송이 만들어낸 반이승만(反李承晩)의 시대는 아직도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분수령이기도 한 해방 후 3년간 대한민국 건국의 혁혁한 역사가 이 나라에서 팽개쳐 버린 지 오래인 2008년에 건국60년이라는 말에 좌파의 눈치를 봐 가며 경축식을 거행한 이명박정부는 그래도 용기가 있다고 하겠다. 대한민국에서 좌파는 진보와 민주 그리고 평화라는 말을 자주 전용(專用)하지만 본질적으로 반대한민국(反大韓民國)세력이며 반이승만(反李承晩)의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좌·우파나 진보·보수의 개념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특혜를 누리고 잘 살면서 대한민국이 태어나서 안 될 나라라고 우기며 이 나라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을 매도하고 김구를 우상화한다. 그러니 북한에 편을 들고 대한민국에 해를 끼치는 그러한 존재들이다. 북한의 김일성화폐에 맞추어 그에게 신속(臣屬)한 김구의 초상을 대한민국화폐 10만원권에 넣자는 발상이 그것이다.
      
    광복절에 '건국'이란 말 쓰지 말자는 광복회

    2008년 7월 28일에 “금년 8·15행사에 건국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광복  회의 공식입장” 표명이 있었다. 광복회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하는 성명 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건국회를 “지난 날 반탁운동과 친일부역 행위로 일관했던 세력” 이라 규정하였다. 우리는 1945년의 일제패망 후 3년간을 이승만영도하에서 민족진영이 미·소의 국제간섭을 배제하며 공산당의 방해를 물리치고 어렵게 대한민국을 건국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족진영은 반탁운동과 반공운동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며 그 때 건국운동자들의 조국애와 투쟁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건국이 될 수 없었고 그 때에 월남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이 건국운동자들은 호국세력으로 남아 국가안전에 크게 기여하면서 당연한 일을 한 듯 공을 내세우지 않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 오고 있다. 광복회원들은 국가보훈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 건국운동자들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때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던진 광복회원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 ? 그 때 이승만, 이시영, 신익희, 이청천, 이범석 등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반탁전선에서 민족진영을 이끌고 건국투쟁에 앞장을 섰다. 임정요인중 공산주의자들은 월북하여 김일성에 합류하였고 한때 반탁운동의 지도자로 알려진 김구는 뒤늦게 변신하여 소련과 김일성의 편을 들었다. 이와 같이 혼란하였던 해방정국에서 건국투쟁에 참여했던 광복회원 이라면 이렇게 건국회를 모독하는 자가당착의 언사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젊었던 건국운동자들이 어떻게 친일부역으로 일관했다는 증거라도 있다는 말인가 ? 나라가 어려울 때 솔선하여 애국심을 발휘해야 할 광복회원이 나라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게 할 이렇게 맹랑한 행위에 앞장을 선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광복회원중 일부의 잘못으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으로 생각한다.

    "고군분투로 나라 세운 이승만, 건국대통령 복권돼야"

    11. 오랜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으로 완성되었다. 대한제국을 잇는 민주공화국으로 자랑스런 독립    운동의 역사와 함께 국민과 영토를 갖춘 주권회복이 금년으로 61년이 되는 것이다. 나라에는 건국과 건국일이 있는 법이다. 우리에겐 8월 15일이  건국일이며 광복절과 겹친다. 지금까지는 광복절의 의미를 건국을 빼고 1945년 8월 15일만을 말해 왔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에서 임정의 초대대통령이며 그 오랜 독립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게 한 후 다시 민족진영을 이끌고 국제간섭을 물리치며 험난하였던 건국투쟁으로 건국을 완성한 제헌국회의장이요, 건국의 대통령이다. 그의 한 몸에는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영도한 영예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이승만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의 독립운동과 건국투쟁 없이는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이다.
     모름지기 건국운동자는 광복운동자를 존경하여야 하고 광복운동자는 건국운동자를 경애하는 날이 광복절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광복운동과 건국운동의 성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운동에 종사한 분들을 건국의 원훈으로 대접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좌파의 득세로 광복절의 의미를 독립운동에 국한한 잘못을 반성하여 이제부터는 국권을 회복한 건국운동이 진정한 우리의 독립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광복절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굳이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의 시비가 없을 것이다. 김구는 임정의 역사상 많은 공로자중의 한분으로 광복의 공로자 일뿐, 말년에 공산당과 같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그동안 왜곡된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로잡히고 정체성이 확실하게 살아난다.
      바야흐로 우리 대한민국은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에 당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건국 초 이승만대통령 때 이   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알았는데 계획적이고 오랜 북한의 선전과 문화공산주의의 침투와 역대정부의 잘못된 교육으로 날로 그 위기가 크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라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것이 이 정체성의 위기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통일을 위해서 이러한 위기가 빨리 극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위기를 조장해 온 것이 몰지각한 역대정부와 언론·매체의 김구 우상화이고 그것을 증폭시킨 것이 좌파정부 10년이었다. 이러한 정부 밑에서 건전한 국민정신은 절대로 소생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미흡하지만 이명박정부가 작년에 건국60년을 명제로 삼은 것은 참으로 용기 있고 잘한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진실에 접근해야 하고 정직하고 용감할 때 광명한 앞날이 보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이명박정부가 어서 이 정체성의 위기를 슬기롭고 씩씩하게 극복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