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양에서 유성까지 다시 이동해야 했다.

    생각해보니까 청양경찰서는 올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최득구라는 경사가 목격자고 그를 만나봐야 하는 거라면, 애초부터 유성경찰서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김요삼에게 올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김요삼에게는 올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도 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지만이도, 김요삼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화는 곧 사그라들었다. 김요삼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전후사정 얘기를 꼼꼼히 듣지 않고 너무 서두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래도 청양까지 올 필요가 없는데 온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기름값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요즈음은 기름값이 너무 비쌌다. 기름값을 생각하면, 단지 짜증스러운 걸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청양까지 오지 않고 다이렉트로 직접 유성으로 갔으면 그만큼 기름값을 절약할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아쉬움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도로 김요삼이 미워지기도 하고, 성규의 성급함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예산을 통과하는 길에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또 들려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다행히 예산을 돌아나오는 길에서는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이 딴 데로 갔거나 아니면 그 사이에 어리숙한 놈팽이들을 이미 꼬여 덕산온천으로 떴거나 한 듯 했다. 그도 아니라면, 내가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에 이제 내성이 생겼거나 아까 내가 들은 노랫소리가 환청이거나 했을 거였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지만이는 여전히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모양이었다.

    예산에 들어서는데 지만이가 갑자기 "라디오 소리 좀 크게 높여요. 이 소리 좀 듣지 않게" 하면서, 허겁지겁 내게 요구해온 탓이었다. 나는 지만이의 그런 요청이 기이하고 당황스러웠다.

    "너,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리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만이가 그렇다고 할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만이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지만이는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으므로 지만이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만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탓 같았다. 갑자기 지만이가 차를 세우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 노랫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가야겠다고 했다. 노랫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자기를 부르고 있어,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고 확인하고 가야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거야." "이 노랫소리요, 이 노랫소리가 안 들린단 말예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어떻게 안 들린단 말예요."
    "넌 환청을 듣고 있는 거야. 그건 진짜 소리가 아니라 가짜 소리야. 네 마음이 약해서 널 시험에 빠뜨리려고 하는 가짜 소리란 거야."
    "그런 소리 말아요. 이 노랫소리는 가짜가 아녜요. 날 시험에 빠뜨리려는 소리도 아니구요. 이건 분명한 현실의 소리라구요. 가짜는 오히려 형과 성규예요."

    갑자기 지만이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발버둥치는 지만이는 무서웠고, 넋이 나간 듯 했다. 내 차는 충분히 널찍하지만 발버둥치는 지만이를 두고서는 넓다는 실감이 현격히 감소했다. 발버둥치는 지만이를 그냥 방치해 두다가는 운전을 할 수 없었고, 차가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성규에게 소리쳤다. 발버둥치는 지만이를 좀 제압해보라 고. 그러나 성규는 내가 다급하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벌써부터 발버둥치는 지만이를 제압하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성규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듯 했다. 성규가 지만이보다 훨씬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을 게 분명한데도, 오히려 발버둥치는 지만이에게 밀리고 있었다. 발버둥치는 지만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평소의 자기 힘보다 몇 배는 더 큰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분명히 내가 도와야 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발버둥치는 지만이를 제압하기 위해 성규를 도울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여기서 차를 세워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여기 예산을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지만이를 가라앉히자고 차를 세우면, 오히려 지만이의 발작은 가라앉지 않고 심해져만 갈 것이었다. 예산을 빠져나가지 않는 한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지만이의 귀에 들려올 테고, 지만이가 그 노랫소리를 듣는 한 지만이의 발작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세우는 대신 악셀을 밟은 오른발에 더욱 힘을 주어 차의 속력을 높혔다. 어서 빨리 예산의 경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뒤에서 억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성규였다. 성규가 지랄하는, 제정신이 아닌 지만이의 일격을 턱에 받고 그 충격에,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내지른 소리였다. 성규가 아픈 턱을 감싸쥐면서, 순간 지만이를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고 있었다.

    성규의 제지로부터 풀려난 지만이가 이번에는 운전석의 나에게로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지만이는 어떻게든 차를 세워 자신을 부르고 있는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로 달려가겠다는 목적인 것 같았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지만이가 뒤에서 나의 목에 팔을 감고, 헤드록을 걸어왔고, 나는 숨이 콱 막혔다. 아무래도 차를 세워야 할 것만 같았다. 지만이의 헤드록 때문에 숨이 막혀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지만이의 헤드록에 견딜 수 없어 차를 세우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나의 목을 죈 지만이의 팔 힘이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어느결에 풀리는 것이었다. 나는 백미러로 지만이를 살폈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지만이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나는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차를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고나자 곧바로 지만이가 갑자기 발작을 멈추고 정신을 잃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의문은 곧 풀렸다.

    나의 차가 지만이의 헤드록에 견딜 수 없어 차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에 예산의 경계선을 지나왔던 것이었다. 예산의 경계선을 넘어오자마자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게 된 지만이는 갑자기 힘을 잃게 됐고, 힘을 잃은 지만이 정신마저 잃게 되었던 것이었다. 지만이의 좀전의 괴력은 지만이 자신의 것이 아닌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되자 즉시로 힘을 잃고 무력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강의 상황을 정리한 나는 나의 차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나의 차는 훌륭하고, 멋지게 달린다는 것이었다. 맞지 않는가. 정신나간 지만이가 나의 목을 조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삶의 영역으로 데려와 준 게 바로 나의 차였다.

    나 뿐만이 아니라 성규와 지만이까지도 나의 차가 살린 것이었다. 지만이 나를 죽이려 한 게 맨정신에 저지른 게 아니고 맛이 가서 저지른 행동이었으므로, 제정신을 찾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지만이 역시 나의 차가 살린 거라고 하는 게 맞는 논지였다.

    "역시 내 차는 엑설런트야."

    나는 성규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괜찮다는 성규의 대답을 듣고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렇게말을 했던 것이었다. 성규의 대꾸를 듣자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그런 바램도 없지는 않았었다고 할 수 있는 건데, 그러나 성규는 나의 이 말에 대해 아무런 응대가 없었다.

    나의 차에 매료되어 만족해하는 순간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는 걸 보지 못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방에 신호등이 있다는 것조차 보질 못했다. 전방에 신호등이 있고, 빨간불로 바뀌고 있다는 걸 알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는, 그러나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예산읍을 빠져나오는 데 정신이 없었던 탓인 것 같았다. 노래 부르는, 유혹하는 여자들의 노랫소리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너무 깊이 시달린 탓 같기도 했다. 제정신을 잃고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린 지만이의 발작 때문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여하튼 변명의 여지는 충분한 일이었다.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지만 브레이크를 밟은 게 너무 늦었고, 앞 차와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그래도 급히나마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대형사고가 날 뻔한 일이었으니까.

    나의 차가 빨간 신호등을 받고 정거해 있던 앞 차의 뒷꽁무니를 여지없이 들이받았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충격이 극심했다. 사실 에어백이 터지는 바람에 나는 별 충격이 없었지만, 뒷좌석의 성규와 지만이는 엄청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충돌로 정신을 잃었었던 지만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걸 보면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의 차는 앞이 고물처럼 찌그러져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속도로 서 있는 앞 차를 들이받은 거니까. 그러나 앞 차는 내 차가 고물처럼 찌그러진 데 비하면 멀쩡했다. 너무 멀쩡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차가 들이받은 앞 차는 거대한 레미콘 트럭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미콘 운전사가 우리에게로 왔다. 차창을 두들겼고,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레미콘 운전사가 뒷덜미를 움켜잡고 몹시 아프다고 했다.

    나는 레미콘 운전사의 뒷덜미가 몹시 아프다는 그 투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차가 뒤에서 들이받긴 했지만 레미콘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멀쩡했고, 별 충격을 받지 않은 듯 한데, 레미콘 운전사가 아프다고 하는 건 엄살처럼 여겨져서였다.

    그러나 나는 레미콘 운전사에게 엄살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레미콘 운전사는 자신의 레미콘 만큼이나 기형적인 거구였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다간 레미콘 운전사가 크게 화가 나고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사고를 낸 건 나고 잘못은 내게 있다는 생각에서였기도 했지만.

    경찰들이 왔고, 사고처리를 했다. 백프로 나의 과실이었으므로, 사고처리는 별 트러블 없이 일사천리로, 금세 끝이 났다. 경찰들이 사고처리를 하는 동안에 내내 레미콘 운전사는 뒷덜미를 잡고 몹시 아프다는 시늉을 하였는데, 보기에 참 민망했다. 그의 차 레미콘 만큼이나 거대한 체구를 지닌 레미콘 운전사가 마치 어린애처럼 아프다는 시늉을 하는 게 보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다.

    사고처리를 끝낸 우리는, 나와 정신을 차린 지만이와 성규는, 견인차를 불러 내 차를 유성까지 견인해가기로 하는 데에 합의했다. 어차피 유성에 가는 길이었고, 유성까지 가야 했으니까, 합리적인 합의였다. 여기서 유성까지 견인비가 결코 만만치 않겠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내 차를 예산에 남겨두고 가는 것은 더 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성에 가서 차를 고치는 게 바람직한 일이었다. 차는 지방에서 고치지 말고 대도시로 가져가라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이었으니까. 게다가 얼마나 오래 유성에 머무르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최득구라는 경찰이 본 게 진짜 성규의 몽골 아내 오르그뜨가 맞다면 체류기간은 의외로 길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규의 몽골 아내 오르그뜨를 찾아서 만나야 하고, 만나서 그녀를 설득해야 하고, 그녀로 하여금 다시 성규의 품으로 돌아오겠다는 확답을 받아내는 데까지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이 들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강제로 그녀를 소환해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만일 강제로 그녀를 소환해간다면, 그녀는 얼마 지나지않아 또 성규 몰래 성규의 곁을 떠나 도망갈 것이었다.

    견인차는 부른 지 한 십 오 분쯤 뒤에 왔다. 유성까지 가자는 데에 너무 멀다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으나,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해서인 듯은 해도 가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지만이가 견인차에 타고, 나와 성규가 나의 차를 탔다.

    달리지 못하고 견인차에 견인되어 가는 나의 차 안에서 나는 문득 서글퍼져,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많은 상념에 붙들리고 시달려야 했다. 수많은 상념에 붙들리고 시달렸지만, 그 골자는 딱 하나,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들어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남의 딱한 사정은 외면할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이건 외면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도 지나치게 넘어선 일이었다. 게다가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도모하다가, 내 차마저 박살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내 차가 박살나는 재산적 피해마저 감수해 가면서까지 이래야 되느냐 하는 거였다. 이타심이란 게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일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이타심의 과잉이었다. 이타심의 과잉은 정상을 벗어난 거였고, 이타심의 결여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타심은 내게 맞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나는 평생을 이기주의자로 살아왔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아왔고, 이타심에 흥분하거나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타심은 내겐 낯선 풍경이었는데, 지금 내가 왜 이러느냐 하는 거였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나의 행동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짓은 못하겠다고 성규에게 화를 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게 나다운 행동이었다. 물론 성규가 남인 것은 아니었다. 오촌 조카였으니까.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기심의 바운더리 안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친척이란 별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었다. 형식은 있되, 그 내용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숙, 차 수리비는 내가 댈께요."
    "보험 처리가 되는데 왜 니가 수리비를 대."
    "아니, 그래도 내가 대겠어요. 견적이 나오면 그에 대한 비용은 별도로 내가 당숙한테 드리도록 하겠어요. 괜히 나 때문에 이리 된 일인데....."

    나는 성규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쓸데없는 상념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어서 빨리 유성에 당도하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망가진 내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수리할 수 있게 되기를, 그것만을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