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신문 하단에 빽빽하게 글을 박아 넣은 의견광고가 났다.

    〈김대중은 5억달러, 노무현은 600만달러! 달러를 좋아하는 대통령이 主敵(주적)에게 국익과 안보를 팔았다. 오는 4월 27일 오후 2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노무현 斷罪(단죄)를 위한 국민궐기대회'가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애국투사' '아스팔트 우파'로, 맞은편에선 '보수골통' '극우세력'으로 불리는 '국민행동본부' 서정갑(69) 본부장의 작품이다.

    지난 '좌파 정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리로 뛰쳐나와 투쟁했던 그는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국민궐기대회'를 나서서 열 일인가. 사법당국에 맡겨 법에 따라 조사하고 처벌하면 되지 않는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600만달러를 받은 걸 조사하는데, 덧붙여 우리가 일년 전 고발한 '내란·외환죄'에 대해서도 조사해달라는 것이다. 북한에 쌀을 지원해 군량미로 들어간 것, 대한민국 군(軍)의 무장해체나 다름없는 한미연합사 해체, 남파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인정한 것 등에 대해 왜 아직까지 조사하지 않는가."

    ―지난 10년간 반정부 집회 및 회견만 219회 열었다. 이제 노무현 전 정권은 '죽은 권력'이지 않는가?

    "좌파 쪽에서는 '반정부 집회'라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헌법을 수호하는' 애국적인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아직 좌파 정권이 종식된 게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 각 부처에 들어간 많은 좌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상의를 벗었다.

  • ▲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 (사진 제공: 조선일보)
    ▲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 (사진 제공: 조선일보)

    ―일각에서는 선생을 극우세력의 '두목'처럼 본다.

    "어떤 이들은 날 '괴물'로 보는데…. 나는 대령으로 예편했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다. '극우'란 테러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200여회 집회를 했지만 불법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작년 촛불시위 때 좌파들에 의해 경찰버스 100여대 파손, 경찰 5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우리나라에는 '극좌'가 있을 뿐 '극우'는 없다."

    ―선생은 2004년 '국가보안법 사수 집회'에서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상 혐의'로 고발된 적이 있지 않은가?

    "30만명이 시청 앞 광장에 모였던 집회에서 '자동차 백미러가 84만원어치 파손되고 경찰이 손가락과 손등에 찰과상을 입었다'는 이유였다. 그 집회 후 3년쯤 지나 정권이 바뀌었는데 검찰이 기소를 했다. 법원은 '징역 1년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마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독립 운동한 사람을 법정에 세운 격이다. 법원이 촛불시위 좌파들에 대해 온정적인 것과 비교해보라. 좌파 정권은 종식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재판에서 변호사가 차고 넘치는 한나라당은 쭉 외면했다. 문제는 선생의 이념 쪽에도 있지 않을까?

    "지금 한나라당은 예뻐서 표를 받은 게 아니라, 반사이익을 얻었을 뿐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스팔트 위에서 우리가 '좌파정권 종식'을 내걸고 싸워왔기 때문에 국민들이 호응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일부 세력은 우리를 가까이하면 표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이에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이 "정권교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시위 등을 했던 우파 인사에 대해 당이 방치하고 있다"고 촉구한 적이 있다. 그 뒤로 현 정권의 지원이 있었나?

    "우린 그런 보상을 받겠다는 게 아니다. 좌파정권이 정말 종식됐는지 우리를 안심시켜 달라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자칫 관변단체로 전락하면 안 하는 게 낫다. 지난 총선 때 정당에서 비례대표 서류를 보내왔다. '아예 봉투를 뜯지도 마라'고 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 '정치하려고 그랬다'는 말을 듣겠는가. 우리를 지지한 애국시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도도하고 깨끗하게 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이런 식의 광고를 주요 일간지에 525회나 냈다. 광고 경비는 어디서 나왔나?

    "시민들이 후원계좌에 부쳐온 1, 2만원으로 광고비를 충당해왔다. 광고 문안이 좋을 때면 '오늘 기분 좋다'며 더 많이 보내온다. 광고 횟수로 계산하면 지금껏 후원금이 50억원쯤 들어온 셈이다. 정권이 바뀌고 난 뒤로는 뜸해졌다."

    ―어쩌다가 광고를 시작하게 됐나?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온 뒤 김정일의 서울 답방설이 떠돌았다. 나는 '예비역 대령연합회' 회장의 자격으로 '국민의 정부는 더 이상 국민을 우롱하지 말고 그 정체성을 밝혀라'는 성명서를 냈다. 아마도 좌파에 대한 대한민국 우파의 첫 선전포고였다.

    이를 본 전우신문 편집국장이 '공짜로 1면에 5단 광고로 실어주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 광고의 반응이 좋았다. 언론이 우리를 보도도 잘 안 해주니, 직접 광고해서 알리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부산 대구 쪽의 호응이 가장 좋았다. 부자라는 사람들은 긴박한 상황을 잘 느끼지 못한다. 자신에게 직접 닥치지 않는 한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이다. 지난 10년 동안 김정일을 추종하는 좌파들이 득세한 원인에는 우파 보수층에게도 있다. 깨끗하고 정직하고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안 됐을 것이다."

    ―선생이 여는 집회 참석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일반 청년이나 중년세대에게는 왜 어필하지 못한다고 보나?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도 아들이 있지만 집회에 못 나오게 한다. 집회에 나올 시간에 젊은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인은 열심히 일해라. 집회에 나오는 것만 애국하는 것이 아니다."

    ―나오지 말라고 해서 젊은이들이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이념의 과잉이 지금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세대는 지금 60대 이상의 소위 늙은이들이다. 애국심의 발로로 나온 것이지, 할 일 없어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 같은 세대가 있어 대한민국이 건전하다고 자부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적으로는 좌우(左右)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나는 누구보다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친북좌파야말로 '수구골통'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와 우리나라의 좌파는 다르다. 개혁개방을 거부해 주민 300만명을 굶겨 죽이는 김정일을 추종하는 것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은돈 수사를 보면서 내가 욕먹어가면서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좌파정권이 종식되지 않았다면 나라가 거덜났을 것이다."

    ―2003년 8월 30일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시위 군중에게 둘러싸였을 때 선생은 가스총을 쏴 '뉴스'가 됐다.

    "그날 꿈자리가 뒤숭숭했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처음으로 선물받은 가스총을 찼고, '공포탄'을 앞에 넣었다.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을 만나 점심을 하러 가는데, 명계남 일당이 '조갑제 잡아라'며 둘러쌌다. 내가 '젊은이들 어른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리자, '저 새끼는 서정갑이다, 죽여라'며 확 달려들었다. 그때 가스총을 쐈는데, 다들 진짜 권총인 줄 알고 흩어졌다."

    ―가스총을 휴대하고 여차하면 쏜다는 생각은 보통 사람 같으면 하기 어렵다.

    "어느 날 미8군 헌병사령관이 '북한 중앙방송에서 반통일세력 서정갑이를 남한의 인민들 손으로 제거하라고 나왔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우리가 늘 당신을 경호해줄 수는 없지만 정말 다급한 상황이면 미8군으로 들어오라. 집회할 때는 우리 요원들이 보호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엘리베이터 혼자 타지 마라. 밤에는 외출하지 마라'고 했다. 한번은 그 사령관 사무실에 간 적이 있는데, 당시 우리가 봉변당할 뻔했던 테러 현장 장면을 다 찍어서 갖고 있었다."

    ―그 사건 뒤로 계속 가스총을 차고 다녔나?

    "한동안 시끄러워 안 찼는데, 미(美)대사관에서 내게 '감사장'을 준 적이 있었다. 이를 북한 노동신문에서 사설로 '미제앞잡이'라고 공격했다. 또 테러할지 몰라 자위적 수단으로 차고 있다."

    이날도 그의 허리춤에는 가스총이 있었다.

    ―지금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나?

    "여전히 좌파 추종자들이 있으니까. 이를 안 차고 나온 날에는 뭔가 찜찜하다."

    ―국민행동본부를 이끌면서 선생이 대령 출신이기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과 갈등은 없었나?

    "어떤 예비역 장성은 '장군이 대령 밑으로 가서 대령 지시를 받느냐'고 하기도 했다. 난 계급장을 달았다고 다 군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군인으로서 어떤 소신을 갖고 복무했느냐, 소신 없는 군인은 영혼이 없는 것이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여긴다. 전쟁에서 죽지 않았으니까, 이제 덤으로 사는데 나라를 위해 멋있는 죽음을 하자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군에 있을 때 내 별명이 '독일 장교'였다. 30년을 깐깐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안 바뀐다. 나도 마음을 좀 수양해야 하는데…. 어쨌든 내가 장군이 안 된 게 천만다행이다. 장군이 됐으면 이런 운동을 못했다."

    ―선생은 지금의 자리를 맡을 때 "전권(全權)을 달라, 안 그러면 안 맡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2004년쯤인가 다들 이 자리를 안 맡으려고 했다. '역대 장관이나 장성들이 다 안 하겠다니까, 당신이 맡으라'고 했다. 내가 무슨 찌꺼기냐. 처음부터 하라고 해도 시원찮을 텐데. 나는 전권을 주면 맡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한번 집회를 하려면 호텔 다니며 회의를 수십번씩 했다. 회의할 돈으로 집회를 열고 광고를 내는 데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회의 없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 곧바로 '남파 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인정한' 의문사진상위원회로 쳐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우리 나이로 일흔인데 언제까지 할 계획인가?

    "요즘 내 몸 상태가 심각하다. 한의원에 가니 '화병'이라고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말리지만 후임자를 찾는 중이다. 내가 학식이 많고 리더십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신문광고에 '서정갑' 이름이 나와야 광고비를 건질 수 있다고 농담한다."

    ―정권 교체 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적 있나?

    "없다."

      서정갑 본부장은 1964년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5·16 직후 서울 시내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육사 생도들을 보고서 군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하고 인사행정 및 의전 등 부관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장군 진급을 못하고 1992년 말 예편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율곡 비리' 등으로 군 수뇌부들이 구속되는 걸 보고 "실추된 군의 위상과 명예를 지키겠다"며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대령연합회'를 조직했다. 장성들이 뇌물 비리에 연루될 때 "똥별"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가차없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좌파 정권'과 대결해 20건 넘게 고소·고발 당해

    그 뒤로 '반핵반김국민협의회' 운영위원장을, 그 후신인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좌파 정권'과 대결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해 "머뭇거림이 없이 결정과 행동이 빠르다"고 평한다. 우파(右派)에 행동이 요구되는 시절에 그가 적임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껏 20건 넘게 고소·고발을 당했다. 검찰에 출두해 같은 날 이 방 저 방으로 옮겨가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1남2녀를 두었고, 아들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 출신으로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보식 선임기자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