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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가 쓴 시론 <최재성 의원의 '애국'과 '매국'의 잣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대북 삐라(전단) 살포 단체를 "매국 단체"라 비난했다. 아마 최 의원은 삐라 날리는 행동이 국민 지지를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막말을 해도 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 여론 조사 결과는 '삐라 규제' 찬성 의견이 61.4%, 반대 의견이 22.2%로 나타났다.
사실 '삐라'에 대한 한국인들의 과거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과거 북한의 삐라는 "남한은 거지로 득실거리고 북한은 지상 낙원"이라는 식의 황당무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때문에 삐라가 한국민들에게 주었던 이미지는 '거짓'과 '왜곡'이었던 것이다.
물론 탈북자 단체들의 삐라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삐라가 과거 북한이 남으로 보냈던 삐라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충분히 힘을 쏟지 않은 듯하다. 삐라 살포 단체들은 주로 탈북자 단체들이어서 한국인들의 오래된 정서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한국 현대사를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매국 단체" 발언을 한 최 의원은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했음에도 우리들의 또 다른 역사적 기억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것도 훨씬 더 불유쾌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을 말이다.
최재성 의원은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 단체 주요 간부를 지낸 뒤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형적인 '386 정치인'이다. 애국과 매국이란 두 단어는 386들이 가장 자주 쓰던 단어들이다. 이 두 단어는 386들을 가장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386들, 그중에서도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L(민족해방)파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뿐만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까지 '친미사대 매국노'라고 불렀다. 그에 반해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주도 세력들은 미국에 강점된 한국을 해방하려고 노력하는 '반미 애국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 대다수 386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이런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다.
이제 기성세대가 된 386 다수는 과거 대학생 시절 품고 있었던 '애국'과 '매국'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최 의원도 박정희를 사대매국노, 김일성을 애국자로 보는 가치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애국과 매국의 기준이 뒤바뀐 80년대 운동권의 가치관은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학생 중 과반수가 보는 한 역사 교과서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미국에 종속된 사회로 묘사했다. 대한민국을 실패한 역사라고 규정하며 자기의 조국을 저주한 대통령까지 있었다. 이게 한국 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게다가 최 의원은 탈북자들의 희망이었던 미국의 북한인권법 통과시 이를 강력히 반대한 전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 의원이 탈북자 단체를 매국 단체라고 비난한다면 그 탈북자들은 최 의원이 말하는 애국과 매국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의심해 보기에 충분하다.
삐라를 뿌리는 탈북자들의 마음은 독재자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은 망명객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삐라는 북한을 좀 더 민주화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려는 충정의 발로이다.
애국, 매국 논쟁을 최 의원 스스로 초래한 이상 최 의원은 애국과 매국을 구분하는 자신의 잣대가 무엇인지 명백히 밝혔으면 한다. 더불어 최 의원은 공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잣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변했다면 왜 변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함께 하는 것이 좋다. 한국인들의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는 최 의원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