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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0일자에 이 신문 김차수 정치부장이 쓴 '개헌정국 읽기'라는 분석기사 <여권 핵심부 ‘재집권 프로그램’ 가동됐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1년 만에 개헌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꿨다. 지난해 2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개헌을 주도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했던 노 대통령이 9일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추진 계획을 밝혔다.
한나라당은 즉각 개헌에 반대하고 나섰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정략적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게 한나라당의 판단이다.
노 대통령도 이런 반발을 예상한 듯하다. 그는 이날 담화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개헌을 제안하는 것은 어떤 정략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개헌 추진의 정치적 함의
정략적 의도에 대한 비판이 예상되는 데다 현재로서는 개헌 성사 가능성이 극히 불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갑자기 개헌을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노 대통령은 2005년 8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데 이어 ‘임기 중 사퇴 가능성’과 국회의원 중·대선거구제 도입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잇달아 정치적 승부수를 내놓고 있다. 노 대통령 개헌 카드의 1차 목표는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을 막기 위한 승부수라는 관측이 많다. 궁극적으로는 개헌 논의를 통해 대선에도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예정대로 2월 이전에 개헌안을 발의할 경우, 여야는 개헌안을 놓고 갑론을박하며 두 달(개헌안 공고일 60일 내 국회 의결)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야당들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 조성에 신경을 쓰느라 국정 감시를 소홀히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다 4년 연임제 개헌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질 경우 한나라당도 여러 가지 가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 시점을 ‘늦지 않은 시기’라고 밝힌 것도 한나라당을 의식한 것일 수 있다. 한나라당은 현행 당헌 당규대로라면 대선 180일 전인 6월 22일 전에 대선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강력한 대선 후보가 등장할 경우 개헌 논의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 내부의 유동성이 극대화되는 시점에 개헌 논의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진로를 놓고 사분오열된 열린우리당 역시 개헌을 통한 새판 짜기의 유혹에 끌려 노 대통령과 한배를 타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노 대통령을 배제한 신당 창당을 추진하던 열린우리당의 통합신당파도 노 대통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 개헌안 부결 시 선택은
그러나 현 상황에서 보면 노 대통령의 개헌 구상이 그의 계산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개헌 저지선인 국회 의석 3분의 1 이상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127석)이 개헌 논의에조차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통해 올 상반기에 정치적 이슈를 선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탄핵정국 못지않은 정치적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개헌안 발의 자체가 워낙 고도의 정치행위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상응하는 책임을 추궁하는 여론이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개헌안 부결 시 노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까. 노 대통령이 그동안 계산된 승부수를 띄워왔다는 점에서 개헌 카드가 물거품이 될 경우에 대비해 후속 카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은 이와 관련해 2005년 8월 흥미로운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다가 부결될 경우 대통령직을 중도사퇴하고 대선 조기 실시 수순을 밟아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맹 의원의 전망은 노 대통령이 ‘식물대통령’으로 남은 임기를 보내느니 개헌안 부결을 계기로 중대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을 깔고 있다.
○ 재집권 프로젝트 가동 서막?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개헌이 이루어질 경우 노 대통령은 망외의 전리품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개헌으로 다음 총선 일정이 앞당겨져 대선과 총선이 동시에 실시될 경우 노 대통령은 임기 말이지만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퇴임 후에도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힌 노 대통령이 정치적 기반을 조성해 놓고 물러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엄청난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개헌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대선을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노 대통령이 예고 없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안 발의 계획을 발표한 것 자체가 여권 핵심부의 재집권 프로그램 본격 가동을 알리는 서막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권 처지에서 보면 현재의 판을 흔들지 않고는 재집권 가능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치권에는 ‘개헌 추진→6월민주항쟁 20주년 이벤트→남북정상회담→부동산 중과세에 의한 양극화 논란 촉발’ 등 다양한 재집권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여권 핵심부는 개헌 카드에 이어 6월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6월 전후에 대대적인 행사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정부 안팎에서 다양한 6월민주항쟁 2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야권 인사는 “여권이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계기로 갖가지 ‘푸닥거리’를 통해 6월민주항쟁을 경험한 40대뿐 아니라 20,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남북정상회담도 히든카드
남북정상회담도 노 대통령의 히든카드 중 하나다.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대북 지원 재개 가능성 등 북한을 의식한 발언을 계속하는 것도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총력 투쟁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과 명분을 줄 경우, 김 위원장도 한나라당의 집권을 방해하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에 응할지 모른다는 게 여권의 기대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가시적 조치를 이끌어내 대선에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대선 직전 중산층이 버거워할 정도의 종합부동산세가 부과되면 세금 논란이 대선 쟁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종부세 부과 때도 ‘세금 폭탄’ 논란과 함께 납세 거부운동이 일었다. 여권은 종부세로 거둔 돈을 서민 지원용 재원으로 쓰겠다면서 서민들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라는 얘기다.
임기 1년을 남겨둔 노 대통령 앞에는 실업 문제를 비롯한 경제난, 북한 핵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헌에 집착하는 것은 정치적 동기를 빼놓고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우리 헌정사의 9차례 개헌 대부분은 집권세력의 정치적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개헌 카드는 결과적으로 대선 정국을 크게 앞당긴 셈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