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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로 창당 3주년을 맞는 열린우리당이 하루 앞선 10일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당의 현주소가 말해주듯 ‘축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어두운 당내 표정인데, 일각에선 “사실상 해당(解黨) 기념식이 아니냐”는 반응이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열린 이날 기념식에서도 소속 의원의 3분의 1을 겨우 넘는 50여명이 참석했다. 창당주역 중 한명인 정동영 전 당의장은 비공개 일정을 이유로 불참했다. 화환도 노무현 대통령과 임채정 국회의장, 한명숙 국무총리, 이용희 국회부의장이 보낸 달랑 4개가 전부였다. 관례상 다른 당이 보내는 '의례적' 화환도 찾아볼 수 없었다.2003년 오늘, 47명의 당시 의원으로 ‘새로운 정치, 잘 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며 내세운 창당 강령은 이미 헛구호가 된 지 오래다. 한때 50%대까지 솟구쳤던 지지도는 어느새 10%대 밑바닥으로 떨어져 헤어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50만명에 이르던 기간당원 수도 이젠 그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창당 주역들도 일제히 ‘창당실패론’을 언급하며 나섰고 의원들의 후회섞인 자기반성도 여기저기서 봇물터지듯 나온다.
김근태 의장도 이날 기념사를 통해 “어려운 상황”이라고 착잡한 심정을 내보이면서 “오늘은 우리가 이미 이룬 것과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확인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출발하자”고 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법”이라며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남은 산봉우리를 넘어 창당정신을 실현하는 그 길로 함께 가자”고 했지만 당내 표정은 ‘이미 반성할 때조차 늦었다’는 모습 일색이다.
당초 열린당은 이번 3주년 창당기념식을 소속 의원들과 당직자, 당원들이 참가하는 북한산 등반으로 진행하려고 했었다. 소위 ‘으쌰으샤’로 각오를 새롭게 다질 계획이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았다. ‘해당 기념식이 될 지도 모르는 판에 뭘 기념하자는 것이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타계한 구논회 의원의 추모 분위기 속에서 등반은 적절치 않다는 말도 나왔다. 핵심 당직에 있는 한 의원은 “국민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느냐”면서 “산에 가면 ‘으쌰으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국민들에게 주는 피해를 어떻게…”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잖아도 싸늘한 국민들 시선 마주치기가 두려운데 뭐가 좋다고 그것도 토요일날 등반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국민을 두 번 죽이는 꼴‘이라는 반응이었다.
■‘열린당 꼬라지 왜 이 지경까지 왔나’ = 열린당의 현 주소에 대한 소속 의원들의 반응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당 꼬라지가…”라며 연신 머리만 조아리는 모습이다. ‘열린당 간판으로 안된다. 당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에 토를 다는 의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그런 당원마저 전무한 상황이다. 50만명에 이르던 기간당원 수도 10만명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 창당 주역들은 앞다퉈 ‘창당실패’를 자인하고 나섰으며 향후 당 진로를 놓고서도 ‘해체’를 전제로 한 통합신당추진이냐, ‘사수’를 통한 재창조냐를 놓고 설전이 벌어진다. ‘100년정당을 만들겠다’던 창당 각오는 헛구호가 돼버렸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않고 정계개편 논의 등을 둘러싼 각 계파간 신물나는 싸움이 또 벌어지고 있다.
'당 꼬라지'에 대해 정동영 전 의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언론개혁, 과거사 진상규명 등 이른바 4대 쟁점법안 추진을 우선 꼽았다. 정 전 의장은 “그동안 실용, 개혁과 같이 쓸데없는 공리공담을 해왔던 것이 정말 통탄스럽다”고 했다. “국민이 과반 의석을 줬으면 그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는데 우선순위를 맞췄어야 하는데 마치 4대 개혁입법이 당이 지향하는 전부인 것처럼 모자가 씌워져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부겸 의원도 “계파간 노선 차이를 조화시키지 못했다. 선명성 경쟁이 집권당 안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사태도 빈번했다”고 한탄했다.
새천년민주당 분당 과정에서부터 쌓여왔던 해묵은 ‘난닝구 대 빽바지’ ‘개혁 대 실용’ 등 이른바 계파간 갈등이 당 꼬라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해묵은 논쟁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으며 ‘친노 대 반노’의 대결구도와 당청간 갈등도 정책보다는 이념논쟁 가속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직설적인고 자극적인 어법과 갈등 조장을 통한 문제해결 등 ‘노무현식’ 정치가 정국 갈등을 부채질했다는 설명이다. 무능에다 오만과 독선의 혐의까지 덧씌워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개혁만을 앞세운 나머지 엄연히 존재하는 지역주의 등의 현실정치를 무시해 지지텃밭인 호남의 맹주자리마저 내주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소위 중산·서민층을 위한 정당임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문제를 외면했다. 김 의장도 이날 기념사에서 “IMF 외환위기 이후 조성된 환경을 돌파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저성장 구조를 돌파할 새로운 성장방식을 찾아내지 못했고, 서민경제 활성화를 통해 양극화를 극복할 대안을 찾아내고 실현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면서 뼈아픈 반성을 했다. 김부겸 의원도 “정부 여당은 경제 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뤘다. 민생과 이데올로기를 분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 꼬라지에 대한 반성은 있으되 ‘책임은 왜 내가?’ = 국정운영의 총체적 난맥상과 당의 현주소에 대한 열린당의 반성은 구구절절하다. 그러나 반성만 있을 뿐, 책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열린당이 정계개편 주도권을 잡더라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뼈저린 자기 반성에 대한 책임지는 자세가 있어야만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열린당 내부에선 “당의 공과를 꼼꼼히 따져보자” “지금은 반성과 고백이 필요한 시기”라고 한 목소리를 내지만, 정작 관심은 딴 데 있다. 정기국회에는 당면한 국정현안에 몰두하고 정계개편 논의는 국회 이후에 하자는 합의에도 불구하고도 정계개편 논의는 사실상 ‘물밑 전쟁’ 수준이다. 당의 진로를 놓고서까지도, 당을 이 지경까지로 몰고 온 계파 갈등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반성과 책임을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정치권 새판짜기를 통해 또다시 정권잡기에 혈안인 것으로 비친다. 그런 와중에도 김 의장은 이날 창당기념식과는 별도로 열린 국정자문위원회의에서 "우리가 실패했다는 말 대신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은 9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열린당의 정계개편 논의에 대해 “이거야말로 무책임, 무원칙, 무소신”이라면서 “17대 총선때 표 찍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조 의원은 “아무리 어려워도 남은 국정에 힘써 5년간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게 정치의 정도가 아니냐”며 "반성과 사과도 않고 정계개편을 주도할 수 있느냐. 정치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국민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라"고 비난했다. 국정운영 총체적 실패에 따른 반성과 책임도 부족할 판에 또 '정권 잡겠다‘고 정계개편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지적이다.
한편, 열린당은 이날 창당 3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열린당이 국민에게서 지지와 신뢰를 상실한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한다”며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열린당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열린당은 어떠한 상황이 와도 집권여당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열린당은 이어 “창당 3주년에 당이 국민에 약속하는 미래는 ‘평화와 번영의 새시대’를 국민과 함께 만들겠다는 것이다. 빈 손으로 출발해 오늘에 이르렀듯이, 우리당은 또다시 역사의 기적을 창조할 것”이라며 “화마로 폐허가 된 낙산사에 돋아난 ‘새싹의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환골탈태 심정으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민 여러분의 동행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진정한 반성과 함께 책임지는 자세가 없는 열린당 창당 3주년 기념식이, 이래서 더 조촐하고 초라하고 씁쓸하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