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경제초점'란에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흔히들 사람마다 팔자가 다르다고 한다. 어떤 부모세대는 평생 동안 곳간을 만들고 곳간을 채우느라 바빴다. 화장은 사치였고,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는 세대였다. 어떤 자식세대는 평생 동안 부모세대가 만들어 놓은 곳간을 비우느라 바쁘다. 화장하는 것이 생활이고, 하는 일이라곤 화장을 고치는 일이 대부분인 세대이다.

    팔자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도 있는 듯하다. 경제적으로 볼 때 건국 이후 이 땅의 정부들은 대개 곳간을 만들고 채워 나가는 정부들이었다. 물론 문민정부의 끝 무렵에는 외환위기로 인하여 외화곳간이 텅 비는 시기도 있었다. 이 외환위기도 한국경제가 그동안 곳간에 쌓아놓았던 수출이라는 저력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 기간은 곳간을 새로 만든다면서 있던 곳간을 흔들고 비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지금의 참여정부 기간은 본격적으로 곳간을 부수고, 곳간을 비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세대의 곳간마저도 빠른 속도로 비워나가는 시기이다.

    참여정부의 곳간비우기는 참여정부의 화장비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참여정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화장술은 ‘자주(自主) 외치기’라는 이름의 가장 값 비싼 화장기법이다.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감안하면 자주를 외쳐대기만 하는 것은 자주의 본질과는 관련이 적은 일종의 화장술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주는 든든한 곳간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주’라는 화장품으로 한반도를 덧칠한다고 달성되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가장 귀히 여기는 화장술 중의 하나가 ‘복지 늘리기’라는 화장기법이다. 시간이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는 한반도 경제의 미래를 감안하면 새로운 복지제도를 계속 만든다는 것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일종의 화장술에 불과하다. 진정한 복지는 곳간을 채우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양극화 심화라는 경고와 장밋빛 공약 그리고 백화점식 복지제도 도입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가 그들만의 화장에 취해 있는 동안, 지난 시절 어렵게 지켜왔던 국가경제의 곳간은 이미 빠른 속도로 부실화되고 있다. 금년도만 해도 관리대상수지의 적자가 14조 9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예산정책처에 의하면 추경 재원 마련을 위한 적자국채를 감안할 경우 올해 연말 국가채무는 282조 5000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에 국가부채는 133조 6000억원이었다. 불과 4년 만에 국가부채가 2배가 넘게 되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곳간 비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비전2030에서는 향후 25년간 세금을 1100조원만 더 내면 ‘함께하는 희망한국’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는 2010년까지 추가적인 증세 없이 세출구조조정과 세정 합리화 등을 통해 소요재원이 충당가능하며, 2011년 이후에는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곳간은 누가 어떤 식으로라도 채워 놓아라, 나는 곳간에서 내다 쓰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참여정부 기간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이제 막 늦가을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화장을 고치고, 곳간을 비우느라 그토록 바빴던 참여정부를 생각하면, 이 늦가을에 추수할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화장은 환상을 자극할 수 있으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참여정부가 훗날 화장술에 취해 곳간을 비운 신용불량정부로 기록되지 않으려면 남은 기간만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높은 산 위에서 자주, 복지의 거대 담론을 외쳐대며, 자신들만의 산울림에 심취하지 말고, 산 아래로 내려와 국민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기업을 키우고,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개방화를 확대하고 복지제도의 내실화를 달성하는 일이 곳간을 채우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