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향군인회(향군)가 대한민국 정통 보수의 이념을 가진 인물을 새로운 수장으로 선택했다.

    21일 서울 잠실 향군회관에서 치러진 향군의 제 31대 회장 선거에서 박세직 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이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전체 대의원 365명중 359명이 참가한 이번 선거에서 박 신임 회장은 204표(56.8%)를 얻어 113표를 얻은 천용택 후보와 42표를 얻은 노무식 후보와의 표차를 크게 벌이며 승리했다. 

    당초 이번 선거는 박 신임 회장과 천 후보간의 박빙이 예상됐었다. 대표적인 여권 인사로 알려진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 향군 선거에 나설 뜻을 밝히면서 이번 선거에서는 ‘코드인사’ 논란도 불거졌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국고 지원을 받는 향군이 안보를 명분으로 시민 대상의 대규모 집회를 열어 반정부 활동이나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향군의 안보 관련 예산 재검토를 보훈처에 요구한 바 있다. 향군에 대한 여권의 실질적인 압박이 시작된 것이다.  

    향군 정체성 고수냐, 변화냐 분수령에서 박세직 선택

    이런 상황에서 친여 인사로 알려진 천 후보의 등장은 큰 이슈였다. 천 후보를 선택할 경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는 향군에 실질적인 정부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향군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만큼 이번 선거는 향군이 그간의 정체성을 고수하느냐, 변화하느냐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향군 대의원들은 이날 박 신임 회장을 선택함으로서 향군의 정체성을 어디에 둘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오후 3시 20분 경 박 신임 회장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향군회관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박빙이 예상된 승부에서 박 신임 회장의 압승 가능성이 알려지자 그의 지지자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눴다. 향군의 한 직원은 “박 후보와 천 후보간 박빙이 예상돼 2차 투표까지 갈 것 같았다”며 “그런데 의외로 쉽게 끝나버렸다. 역시 향군 정서에 천 후보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열린당 정동영 갑자기 방문취소 "천용택 될줄 알았다가 박세직 됐기 때문"추측

    오후 4시부터 향군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회장 이취임식 광경도 흥미로웠다. 당초 이날 이취임식에는 정동영 열린당 당의장이 기념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정 의장이 일정을 이유로 방문을 취소했다. 결국 조성태 열린당 의원이 정 의장의 기념사를 대독했다.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는 “천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예상했다가 낙선하니 안온 게 아니냐”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조 의원이 정 의장의 기념사를 다소 싱겁게 대독하고 물러선 후 이방호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섰다. 이 정책위의장은 준비된 원고 없이 막힘없이 축사를 해 나갔다. 그는 “왜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는지 가슴이 아프다”며 코드인사 논란이 인 천 후보를 염두에 둔 듯 “그동안은 향군회장 선거에 별 관심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 안보가 흔들리고 이념적으로 편향되면 나라를 못 구한다”며 “친북 좌파 정권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에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또 향군이 여권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지난 수년간 향군이 제약을 받아온 것을 알고있다. 가슴이 아프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위해 향군이 걸어온 행보에 대해 한나라당을 대표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정책위의장은 3분여의 짧은 축사 시간동안 무려 세번의 박수를 받았다. 

    이상훈 전 회장 "향군을 보수꼴통이라고 매도하지 말라"

    29대, 30대 향군 회장직을 수행하고 물러난 이상훈 전 회장은 이날 이취임식에서 그동안 향군에 쏟아진 비난과 압박과 관련해 소회를 풀어나갔다. 이 전 회장은 “향군은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원들의 복지와 권익만을 추구하는 이익단체도 아니다”며 “향군은 조국 수호의 일선에서 신명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안보를 최고로 하는 애국 친목단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안보 단체로서 보수 성향을 띨 수 밖에 없다”며 “정치지도자들은 우리 향군의 구국, 호국, 애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고 보수꼴통, 반개혁, 반통일 세력으로 매도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박 신임 회장은 이날 취임사에서 “우리는 앞으로 전진할 것이냐 후퇴할 것이냐의 기로에 서있다”며 비장한 심경을 밝혔다.

    그는 “향군의 가장 큰 전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 체제에 있다”며 “향군은 정치적으로 엄정한 중립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행위나 이를 방해하는 집단이 있다면 전 회원이 나서서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발언이 끝나자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은 큰 박수를 쳐 동의의 뜻을 표했다.

    박세직 "향군은 국가의 쓴 약이 될 것"

    이취임식 직후 이뤄진 기자간담회에서 박 신임회장은 “향군은 현역 군 사기의 지표가 된다. 그래서 향군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향군을 둘러싼 여권의 압력에 대해 “향군은 정관에 안보를 지켜나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향군은 안보를 제일로 하는 단체”라며 “정치인들은 모든 단체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따라주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쓴 약을 먹어야 하듯 향군은 정치권에 때때로 쓴 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약이 쓸지는 모르지만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심임회장은 난제로 떨어진 향군의 재정문제에 대해 “지금 향군 회원들은 회비를 안 내고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향군을 위해 회비를 내는 풍토를 조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향군신용금고' 등을 만들어 이자수입을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며 “650만 향군 회원이 조금씩만 돈을 맡기더라도 자산 증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평군'이 사상적 저의 갖고 있다면 용납못해"

    지난해 향군에서 이탈한 평화재향군인회(평군) 문제에 대해서는 “평군이 많이 무력화 되고 회원들이 많이 이탈한 것으로 안다”며 “평군 회원들이 향군에 가진 서운한 마음을 쓰다듬는 방안을 생각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군이 일부 언론에 보도된 대로 향군을 와해시킬 저의로 시작했다면 경계할 것”이라며 “단순히 향군에 대한 불만으로 다른 단체를 만들었다면 이해하지만 사상적인 저의를 갖고 시작했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참여정부의 안보관에 대해 묻자 “여러가지 전략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만 대북정책 등에서 안보 대비를 하지 않고 앞서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답했다. 그는 “자동차 하나를 몰더라도 정비를 잘하고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남북관계도 정신적, 물리적, 군사적인 방어태세를 공고히 하면서 푸는게 옳다”고 말했다. 박 신임회장은 “안보 면에서 향군은 전문가”라며 “정치권이 안보 전문가인 향군의 소리를 들어주는 게 정치적으로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