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안중근, 대한 독립정신 대표 두 거인이승만은 안중근을 최고로 칭송했다두 영웅 모두 미국독립 상징 워싱턴 흠모했다
  • ▲ 안중근 의사 동상에 헌화하는 이승만 대통령 ⓒ <우남 이승만박사 서집>
    ▲ 안중근 의사 동상에 헌화하는 이승만 대통령 ⓒ <우남 이승만박사 서집>
    ■ 이승만 대통령의 안중근 의사 추모

    오늘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149주년이며,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4주년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두 영웅과 관련, 흥미로운 사실은 이 대통령이 1960년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기 1년 전인 1959년 5월 23일, 서울 남산(숭의여자대학교)에서 개최된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식에 맞춰, 다음과 같은 치사(致辭)를 발표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역사(歷史: 삶의 발자취)를 아는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후에 나올 사람이나 간에 한국의 피와 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다 고개를 숙여서 숭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4천 년 역사를 가졌는데, 과거 40년 동안 외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고 남의 노예가 된 것은 처음 겪는 통탄할 일이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민중이 얼마나 타락이 컸던지, 조정안에서 자기 목숨을 끊어서 충정을 표시한 사람은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한 분이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이름 없는 많은 애국지사가 경향(서울과 지방)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충성은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다 없어진 한국의 이름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며, 안중근 의사의 공훈이 천추만대(千秋萬代: 몇천 년의 긴 세월, 후손 만대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기간)에 미쳐서 우리 모든 후세 자손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번에 애국 동포들이 힘과 재력을 합해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워, 오늘 제막식을 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만든 것은 우리가 모두 감사히 여기며, 이날을 세세(世世: 대대)로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 1959년 5월 24일 <조선일보> 보도

    이날 제막식에는 장면 부통령이 참석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했으나 얼마 후 사진처럼 안 의사 동상에 엄숙히 헌화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때 세워진 안 의사 동상과 기단(基壇; 받침대)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같은 조각가(김경승 교수)가 나중에 다시 제작한 동상과 기단이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교정에 서 있습니다.

    어쨌든 “안중근 의사가 다 없어진 한국의 이름을 다시 살아나게 했으며, 그의 공훈이 천추만대에 미쳐서 후세 자손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이승만 대통령의 칭송은 지금까지 알려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그 어떤 찬사보다도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동상 제막 4년 전인 1955년 10월 27일 전남 장흥의 <만수사> 부지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사당에 <海東明月>(해동명월 : 우리나라의 밝은 달)이라는 친필 휘호를 보냄으로써, 사당 이름이 <海東祠>(해동사)가 되도록 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안 의사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천체인 [밝은 달]에 비유했다는 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 ▲ 이승만 대통령 글씨 ⓒ <해동사> 제공
    ▲ 이승만 대통령 글씨 ⓒ <해동사> 제공

  • ▲ <해동사>의 현판 글씨 ⓒ <해동사> 제공
    ▲ <해동사>의 현판 글씨 ⓒ <해동사> 제공
    ■ 이승만과 안중근은 살가운 형제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은 안중근 의사(1879-1910) 보다 나이가 4살 많고, 두 분 모두 황해도 출신입니다.
    두 영웅은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앞의 에피소드 이외에도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김말란 여사(1833-1896)는 용꿈을 꾼 후, 3월 26일 이승만을 낳았고, 안중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1862-1927)가 보내준 수의를 입고 3월 26일 순국했습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토 히로부미 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하자, 청년 이승만안중근은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특히, 안중근은 16살부터 삶의 네 가지 즐거움 중 하나가 술 마시는 것이었는데, 26살 때 끊은 후 31세 때 순국할 때까지 단 한 잔의 술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를 [자기 절제]라는 위대한 덕목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청년 이승만안중근은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숭모했습니다.

    이승만은 옥중 저서<독립정신>에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의 기초를 놓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워서, 미국인들은 그 빛나는 이름을 기리려고 자기네 나라 수도의 이름을 워싱턴이라고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나아가 “워싱턴은 세계정치개혁의 근본을 기초한 분으로 만국의 추앙을 받고 있다”면서, 자신도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이와 관련,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을 숭모하고, 독립한 지 겨우 130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을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언젠가 미국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미국으로 갔던 1904년부터 1965년 하와이에서 타계할 때까지 미국의 천학비재(淺學菲才)하고 정의롭지 못한 위정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이승만의 학식과 지혜는 그들보다 월등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의 위정자들이 1882년에 우리나라와 맺은 <조미우호통상조약>을 23년 만에 일방적으로 팽개치고,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 을 맺은 후, 일제의 대한제국 강탈을 도왔으며, 194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불의(不義)에 대해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 6.25전쟁,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자유 통일에 도움을 준 것보다는, 분단을 고착시킨 책임이 크다는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보면, 그분의 롤모델은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인 조지 워싱턴이 7∼8년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독립전쟁을 하며,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떻게 참고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걸출한 영웅이로다.
    내가 만일 뒷날에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특히 워싱턴의 위업을 되돌아보고, 숭배하며, 그분의 뜻을 기릴 것이다!”

    ④ 청년 이승만안중근은 동학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입니다.

    “1894년 말, 각 지방에서 동학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나의 부친은 70여 명의 동지와 가족을 모았으나, 2만 명 동학당과의 세력 차이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지 6명과 선봉이 되어 적장이 있는 곳에서 싸워 적들은 도망갔고, 결국 우리가 이겨 전리품을 챙겼다.”

    <우남 이승만전>(서정주 지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정부가 썩을 대로 썩어서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가 동학당의 힘을 빌려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함)이라는 구호로 폭발하고, 각지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전주(全州)를 완전히 점령해버렸다.
    조정은 청나라에 병력을 요청했는데, 이는 일본이 바라던 기회였다.
    이로써 드디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썩은 정부가 민중의 봉기를 촉발했지만, 외세의 개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 정신(精神)혁명이 정치(政治)혁명보다 우선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자유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지적인 혁명이 몸으로 싸우는 혁명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동양의 문헌 중에서, 청년 안중근은 <논어>, 이승만은 <맹자>를 읽고 삶의 지혜를 많이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중근이토 를 처단한 후, 옥중에서 글씨를 써서 약 200여 점을 일본인들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소재가 밝혀진 것은 70점 내외입니다.
    그중에는 <논어>에 등장하는 글귀가 약 10점이나 됩니다.
  • ▲ 안중근 의사 글씨. <견리사의 견위수명>
    ▲ 안중근 의사 글씨. <견리사의 견위수명>"이로움을 보거든 의로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친다" <논어> ⓒ 사진 문화재청
    반면에, 이승만<독립정신>에서 서양의 책들을 읽으라고 권장하면서도, 동양의 고전 중에서 유일하게 <맹자>를 여러 번 인용합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2,200년 전의 고리타분한 생각에 안주하지 말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정신혁명]을 해야 한다고 독려했습니다.

    ■ “엄마는 항상 너와 함께 할 거야”

    아시나요?
    이승만 대통령과 25살이나 어린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가 서로를 ‘마미’와 ‘파파’로 부르며 의지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이는 별꼴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정겨워 보입니다.
    두 분의 행적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고, 실제로 둘은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 ▲ 1962년 3월 22일 AP통신은 위 사진과 함께 이승만 박사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귀국이 취소되자, 낙담한 채 일그러진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보도했다.ⓒ 사진 이현표 소장
    ▲ 1962년 3월 22일 AP통신은 위 사진과 함께 이승만 박사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귀국이 취소되자, 낙담한 채 일그러진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보도했다.ⓒ 사진 이현표 소장
    한편, 옥중의 아들에게 “네가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따라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며,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낸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우리가 아무리 존경해도 모자랄 자랑스러운 대한의 어머님이셨습니다.

    조마리아 여사, 김말란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안중근 의사를 위해 노래 한 곡을 준비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처녀 시절에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했던 <엄마는 항상 너와 함께 할 거야> (Deine Mutter bleibt immer bei dir)라는 노래이며, 당대 최고의 오스트리아 테너 리하르트 타우버(Richard Tauber, 1891-1948)가 부릅니다. 
    https://sonichits.com/video/Richard_Tauber/Deine_Mutter_Bleibt_Immer_Bei_Dir?track=1

    Deine Mutter bleibt immer bei dir
    엄마는 항상 너와 함께 할 거야

    Ein guter Stern gab dir mit auf die welt das Mutterherz, das zu dir hält.
    착한 별이 너를 세상에 보내주었으니, 엄마 마음은 네 곁을 꼭 지켜줄 거야.

    Wenn dich das Schicksal verlässt irgendwie ein Mutterherz verlässt dich nie!
    운명이 짓궂게도 너를 떠날지라도, 엄마 마음은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아!

    Wenn früh oder spät dein Schatz von dir geht deine Mutter bleibt immer bei dir.
    네 사랑이 어느 때든 네 곁을 떠날지라도, 엄마는 항상 네 곁에 머물 거란다.

    Sie teilt deinen Schmerz, sie teilt auch ihr Herz und will keinen Dank dafür.
    네 고통을 함께하고, 마음을 네게 주어도, 엄마는 결코 고맙다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

    Was es gibt auf der Welt, das tut sie gern für dich!
    Einen Druck deiner Hand, den sie verlangt für sich.
    세상에 무엇이든 엄마는 기꺼이 너를 위해 할 거야!
    엄마가 바라는 것은 네 손을 꼭 잡아주는 거야.

    Und schliesst sie zur Ruhe ihre Augen einst zu, ihre Sorge, die letzte bist du.
    그리고 엄마가 눈을 감고 영면할 때, 엄마의 걱정은, 마지막 걱정은 바로 너란다.

    Sie teilt deinen Schmerz, sie teilt auch ihr Herz und will keinen Dank dafür.
    네 고통을 함께하고, 마음을 네게 주어도, 엄마는 결코 고맙다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

    Was es gibt auf der Welt, das tut sie gern für dich!
    Einen Druck deiner Hand, den sie verlangt für sich.
    세상에 무엇이든 엄마는 기꺼이 너를 위해 할 거야!
    엄마가 바라는 것은 네 손을 꽉 잡아주는 거야.

    Und schliesst sie zur Ruhe ihre Augen einst zu, ihre Sorge, die letzte bist du.
    그리고 엄마가 눈을 감고 영면할 때, 엄마의 걱정은, 마지막 걱정은 바로 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