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3~26일 타이베이시 국가희극원 실험극장서 낭독공연
  • ▲ 뮤지컬 '유진과 유진' 대만 낭독공연.ⓒC뮤지컬
    ▲ 뮤지컬 '유진과 유진' 대만 낭독공연.ⓒC뮤지컬
    "낯선 언어로 진행되는 극이기에 소통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대만 관객들과 함께 웃고 우는 저 자신에게 놀랐어요. 언어를 뛰어넘는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동받았습니다."(소설 '유진과 유진'의 이금이 작가)

    낭만바리케이트의 창작뮤지컬 '유진과 유진'이 지난 달 23~26일 총 5차례에 걸쳐 대만 타이베이시의 국가희극원 실험극장에서 낭독공연을 가졌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뮤지컬 배우 두 명이 각 역할로 분해 작품 속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냈다.

    '유진과 유진'은 이금이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2인극 뮤지컬이다. 2021년 초연돼 2022년 재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첫날,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이름이 같은 두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동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금이 작가(61)는 "제 작품이 뮤지컬로 창작된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기쁜 일인데, 외국에서의 공연은 더 놀랍고 흥미로웠어요"라며 "한국·대만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정식 공연이 꼭 이뤄지길 바라요. 마침 대만에서 책도 출간됐으니 뮤지컬과 책이 현지 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합니다"라고 밝혔다.
  • ▲ 지난달 24일 진행된 뮤지컬 '유진과 유진' 대만 낭독공연 관객과의 대화(왼쪽부터 장심자 C뮤지컬 대표, 다미로 낭만바리케이트 대표, 이금이 작가).ⓒC뮤지컬
    ▲ 지난달 24일 진행된 뮤지컬 '유진과 유진' 대만 낭독공연 관객과의 대화(왼쪽부터 장심자 C뮤지컬 대표, 다미로 낭만바리케이트 대표, 이금이 작가).ⓒC뮤지컬
    주인공인 두 유진은 같은 유치원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 그 뒤 각자의 삶을 살다가 15살에 해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기억, 예상치 못한 후유증을 직면하는 과정 등이 흡인력 있게 전개된다. 작품은 범죄 가해자에 대한 고발이 아닌, 피해자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해나가는지 공을 들이며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를 건넨다.

    뮤지컬은 '사이코드라마' 형식을 빌려와 어른이 된 큰유진과 작은유진이 번갈아가며 자신들의 과거를 재현한다. '큰유진' 따티엔(Da Tian)과 '작은유진' 역의 리링웨이(Lee Ling-Wei)는 엄마·남자친구·동급생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소재가 주는 어두운 분위기보다는 발랄한 여중생의 일상을 친근하게 표현해냈다.

    공연 막바지에 다다르자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려왔다. 관객들은 SNS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오슝에서도 공연했으면 좋겠다", "낭독공연은 처음 접했는데 감동적이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픔을 함께 걸으며 치유하는 것 같다" 등의 평을 남겼다.

    박병성 뮤지컬 평론가는 "'유진과 유진'은 아픔과 상처를 우정으로 극복해내는 과정이 감동적인 뮤지컬이다. 두 명의 배우만으로 연극의 놀이성을 강조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밝으면서도 진지하게 풀어냈다. 작품성이 뛰어나고 시의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대만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뮤지컬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다미로는 '유진과 유진'을 뮤지컬로 만들고 싶어서 제안서를 들고 공연 제작사들을 찾아갔지만 여성 2인극, 아동 성폭력, 대중성이 없다 등의 이유 때문에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자신이 직접 회사 낭만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제작에 나선 것이다.
  • ▲ 장심자 C뮤지컬 대표.ⓒ본인 제공
    ▲ 장심자 C뮤지컬 대표.ⓒ본인 제공
    이번 대만 공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주관하는 'K-뮤지컬 로드쇼' 해외유통 지원사업에 선정되며 성사됐다. 중국어로 진행된 공연은 제작사 C뮤지컬의 장심자(36) 대표가 현지 정서에 맞게 대본 번역뿐 아니라 음악감독을 맡았다.

    2016년 창립한 C뮤지컬은 한국의 '어린왕자', '라흐마니노프' 등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내년에는 '렛미플라이'를 레플리카 라이선스 방식으로 공연한다. 장심자(張芯慈) 대표는 대구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선보인 '넌 리딩 클럽'(2015년), '맨 투 밋'(2018년), '원 파인 데이'(2019년) 등에 참여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장 대표는 2012년 여름방학 때 한국 여행을 하면서 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져 작곡가의 꿈을 키웠다. "당시 11편의 뮤지컬을 봤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홍광호 배우가 출연한 '지킬앤하이드'에요. 홍광호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배우였어요."

    이후 2012년 8월 중앙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고, 2013년 2월까지 공연 영상창작학부 수업을 들었다. "6개월 동안 뮤지컬만 100여편 본 것 같아요. 대만에선 '오페라의 유령', '캣츠', '라이언킹, '노트르담 드 파리' 등 대중적이고 인지도 높은 내한공연을 자주 해서 다채로운 소·중·대극장 뮤지컬을 접하기 어렵죠."
  • ▲ 뮤지컬 '유진과 유진' 한국공연 장면.ⓒ낭만바리케이트
    ▲ 뮤지컬 '유진과 유진' 한국공연 장면.ⓒ낭만바리케이트
    C뮤지컬이 올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3000여 명의 관객 중 49.4%가 이미 한국 뮤지컬을 경험했으며, 클래식이 가미된 뮤지컬에 대한 흥미(68.4%)와 한국 뮤지컬에 대한 좋은 인상(45.8%)이 주된 응답으로 나타났다.

    장 대표는 "작년에 레플리카 공연으로 '어린 왕자'를 올렸는데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이를 계기로 C뮤지컬이 만들거나 초청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유진과 유진'은 첫 공연 후 입소문이 나서 관객들이 많이 찾아와주셨죠. 대만 관객은 배우보다 작품성을 더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라고 했다.

    대만의 뮤지컬 시장은 과거보다 공연장 수가 늘어나는 등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약한 편이다. 대만 극장은 대부분 국립이다 보니 형평성을 고려해 길게 대관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장기 공연이 어렵고, 대학에는 뮤지컬 전문 학과가 없다. 

    2018년 초청 공연을 통해 한국 뮤지컬로는 처음 대만에 진출한 '팬레터'의 박현숙 작곡가는 "대만은 생각보다 뮤지컬 콘텐츠와 인프라가 부족하지만 창작뮤지컬 시장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의가 높았고, 굉장한 마니아들을 양산할 것 같은 DNA를 느꼈어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대만에서 공연하고 싶어요"라고 전했다.
  • ▲ 뮤지컬 '유진과 유진' 한국 및 대만 포스터.ⓒ낭만바리케이트
    ▲ 뮤지컬 '유진과 유진' 한국 및 대만 포스터.ⓒ낭만바리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