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김구와 홍명희, 김일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인공기'를 만들어놓은 북한은 이때까지도 태극기를 사용하며 남한인사들을 기만했다.
    ▲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김구와 홍명희, 김일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인공기'를 만들어놓은 북한은 이때까지도 태극기를 사용하며 남한인사들을 기만했다.
    ★레베데프 “김구가 말을 안들으면 미국의 간첩으로 폭로”

    경교장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4월20일 오후2시, 소련이 연출한 남북연석회의는 이미 19일 김일성이 개막하여 진행 중이었다. 
    상수리 호텔에 나타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두봉이었다. 그는 “손님이 먼저 주인을 찾아가야지요”라며 김구를 김일성에게 데려갔다. 김구-김두봉은 임시정부에서 함께 했던 사이지만 북한의 ‘새로운 주인‘ 김일성은 김구보다  37년아래 아들 같은 36세 애송이로 첫 대면이다. 

    이들의 만남과 대화를 지켜 본 레베데프는 ’김구가 평양에 왔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만약 김구가 연석회의 참가를 거부한다면 그 대리인이라도 참가시켜야 한다. 문제는 그들이 회의를 결렬시키고 퇴장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퇴장하라하고 예정대로 회의를 계속한다. 그리고 김구를 ’미국의 간첩‘으로 폭로한다...」 ([레베데프 일기] 앞의 책).
    이렇게 ‘만약’의 대비책도 세워놓은 레베데프는 뜻 밖에 ‘순종적’인 김구와 측근들의 행동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모란봉 극장에서 진행된 회의에는 남북한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남한쪽 대표 백남운-홍명희 등 중진급 말고도 200여명은 김일성 직속공작원 성시백이 선발, 인솔하여 왔다. 

    ★김일성 “이승만은 매국노”...타도대상 공식화

    김일성이 개막식에서 회의 목적 ‘4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 유엔위원단 추방 및 유엔 결의 무효화. 2) 단선 단정 반대. 3) 미-소 양국군 철퇴. 4)자주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다. 
    첫날 28명의 주석단을 선출한 회의는 김구가 도착한 하루를 쉬고 21일 속개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정세보고’에서 이승만을 집중 비난한다.
    “이승만 등 배족적 망국노들이 남조선에서 미국철거를 반대하여 매국적 반동분자들의 정체와 진면목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이승만 도당들이 미제국주의에 우리 조국과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는 미제국주의 충견임을 보여주었다...(중략)...매국노 이승만은 근40년 동안이나 미제국주의자들이 길러낸 그들의 주구이며 자기의 미국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무엇이든지 감행하려고 한다...” 
    레베데프는 참석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연설이 ‘36차례 박수’를 받았다고 일기에 썼다.
    날마다 회의 진행과 결과를 슈티코프에게 보고하고 코치를 받는 레베데프, 왜냐하면 김일성의 연설원고는 모두 슈티코프가 직접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연설만이 아니다. 김일성의 ‘정세보고’에 대한 토론내용도 딱10분씩 시간에 맞춰 사전에 작성, 결재한 것들이다. ([레베데프 일기] 앞의 책).
    남북연석회의 목적 그대로 “이승만을 미국의 충견 매국노로 만들어 선거를 봉쇄하자”는 캠페인을 소련과 그 선발된 연기자들이 날마다 열을 뿜는 ’인형극‘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이 김일성을 시켜서 이승만을 ’타도대상‘으로 낙인찍은 첫 공식대회이다. 
    평양에서 이날 시작된 ’이승만 죽이기‘는 바로 ’대한민국 건국봉쇄 전술‘인데 이것을 건국후 지금까지 75년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부 지도층과 일부 지식인들이 계속 이어가고 있다.  
  • ▲ '단선단정 반대' 회의에 참석, 축사하는 김구.
    ▲ '단선단정 반대' 회의에 참석, 축사하는 김구.
    ★김구의 축사 “우리 공동목표는 단선단정 분쇄”

    스탈린이 남한의 선거 저지를 위해 벌여놓은 정치쇼 남북연석회의 셋째 날 22일, 호텔을 나선 김구는 회의장 모란봉극장에 갔다. 박헌영이 나타나 "김구선생을 주석단에 추대하자”고 제안,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김구는 주석단에 앉았다. 새로운 참석자들이 차례로 인사를 한 뒤 김구가 연단에 올라 인사말에 이어 ’축사‘를 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 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해야할 것이며,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우진, 앞의 책).

    23일 김원봉(인민공화당)의 사회로 이어진 회의에서는 ’전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결정서‘의 요지는, 남조선을 미국 식민지로 만들려는 이승만, 김성수 등을 ’매국노‘로 낙인, 타도하자는 것이었으며, 북조선은 소련이 광범한 자유를 주어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한다고 대비시켜 “남조선 제정당-사회단체들은 총집결하여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한다”고 결정, 이는 가장 정당한 구국투쟁이라 규정하였다. ([레베데프 일기])
  • ▲ 안창호의 동생 안신호. 김구가 28세때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첫 사랑. 40여년만에 평양서 다시 만난 73세 김구의 호텔수발과 안내를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옛추억의 영천암을 찾은 김구와 안신호 일행.
    ▲ 안창호의 동생 안신호. 김구가 28세때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첫 사랑. 40여년만에 평양서 다시 만난 73세 김구의 호텔수발과 안내를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옛추억의 영천암을 찾은 김구와 안신호 일행.
    ★김구, 옛 약혼녀 안신호 만나 17일간 지내다

    김구가 평양의 호텔에 들었을 때 뜻밖에도 무척이나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슈티코프의 ’김구 이용작전‘은 치밀했다. 김구가 28세 총각시절 약혼했던 안신호(安信浩, 1884~1963)를 수배하여 72세 김구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여동생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서 살고 있는 64세 과부였다.  

    평생 잊지 못하는 옛사랑을 만난 남녀의 감회가 어땠을까. 그들은 좋아하면서도 헤어져야 했던 젊은 날의 연인들, 왜 결혼하지 못했던지 그 사연을 김구의 글로 돌아보자.
    「평양 예수교회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호를 만났다. 숭실중학교 학생이면서 애국자로 나와 뜻이 맞았다. 최광호는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도산(안창호)의 영매로 스무살, 극히 활발하고 신여성중의 명성(明星)이라고 말했다. 나는 안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회견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줄 믿고 있었는데 곧 혼약이 깨졌다고 알려왔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안도산이 미국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 학생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 혼인하라 말하고 신호에게도 양주삼이 졸업하면 혼인을 결정하라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후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신호에게 왔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한 안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양주삼과 김구를 다 거절하기로 하고 동네 친구 김성택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얼마후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흠모하였다」 (김구 [백범일지] 1979).

    무려 45년만에 다시 만난 연인들, 안신호는 김구의 호텔방 수발을 도맡았다. 
    청년시절 추억을 더듬는 김구는 중노릇할 때 머물던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의 영천암을 찾았다. 안내역 안신호가 앞장섰다. 누가 봐도 부부 같은 남녀는 신호의 오빠 안창호가 말년에 휴양하던 송태산장도 돌아보았다. 
    북로당의 열혈당원이자 간부인 안신호는 말끝마다 김구에게 김일성을 추켜세우기 바빴다고 한다.(선우진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김구가 북한을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 했던 안신호는 여성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스탈린의 남한선거 저지작전 ’평양 쇼‘ 덕분에 옛사랑과 보름 넘게 생활하게 된 김구는 모처럼 청춘시절의 행복에 젖었던가. 특히 김구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제삿날(4.26)까지 챙겨  푸짐한 제수를 차려주는 북한 측에 김구는 감격하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옛 여인과 옛날로 돌아간 듯, 소위 ’혁명유가족학원‘도 시찰한다. ’혁명유가족‘이란 남한 공산화 폭동에 참여했던 사망자들의 가족을 말한다. 
    돌아오는 길엔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찾아가 둘러보고 김일성의 조부도 만났다.

    ’우리민족끼리‘ 통일독립을 논하겠다며 38선을 넘었던 김구, 사전에 빈틈없이 짜여져 시계처럼 돌아가는 남북연석회의에는 비집고 들어갈 기회도 없었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북측은 김구를 구워삶는 심리전술 코스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다. 김구는 회의에 딱 한번 참석한 5분 축사뿐, 그것으로 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스탈린에게는 김구의 ’쓸모‘가 이제부터이다. 

    “내가 회의에 참석치 않은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나대신 대표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여러 결정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찬동한다. 남북요인회담이 선행되었어야 할 것을 그리 되지 못하고 장차 있을 예정인데 내 본의는 이 회담에 있는 만치 그 결과를 보아서 공적 의사표시를 하겠다.” (김구 기자회견, 평양, 1948.4.27.)
  • ▲ 오늘의 모란봉극장. 해방 이듬해 소련군정이 1946년2월 북한정권을 세운후 건립한 모란봉극장은 1948년4월 남북연석회의를 열고 김구-김규식 등을 참석시켜 '통일전선' 정치쇼를 벌였다.(자료사진).
    ▲ 오늘의 모란봉극장. 해방 이듬해 소련군정이 1946년2월 북한정권을 세운후 건립한 모란봉극장은 1948년4월 남북연석회의를 열고 김구-김규식 등을 참석시켜 '통일전선' 정치쇼를 벌였다.(자료사진).
    김구, “남북공동성명에 만족” 서명...김일성과 ’망명 논의‘까지

    ’매국노 이승만 타도‘와 ’남한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결의한 ’결정서‘ 채택까지 너무나 순조로운 회의 결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가 있다. 바로 총지휘자 슈티코프.
    남북연석회의 마지막날 슈티코프는 긴급지시하여 ’남한단선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 홍명희-백남운울 비롯하여김구의 최측근 엄항섭 등 남쪽 참가자들 50여명으로 조직한다. 이 투쟁본부는 황해도 해주에 두기로 했다.

    이어서 슈티코프는 ’남북지도자협의회‘ 구성을 지시한다. 김구가 요구했던 ’요인회담‘을 슈티코프식으로 조직하여 김구를 확실하게 얽어매려는 수법이다. 
    그는 남북지도자회의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방침을 지시하였다.
    “지도자회의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외국 군대 철수 뒤에 내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권력을 접수해서 선거를 실시하고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만일 이상의 합의사항에 반대하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느냐고 따진다. 신망과 주도권을 장악한다...” ([슈티코프 일기] 1948년 4월24일자)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엄항섭, 박헌영, 백남운 등 남북요인 15명으로 구성된 지도자협의회는 4월30일 모란봉 극장에 모였다. 김구가 주장하는 요인회담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도 빠짐없이 열었고 오후 4시부터 별관에서 ’공동성명서‘를 확정하였다. 
    이어 밤9시, 남북연석회의 전체회의를 열어 공동성명을 채택, 남북의 참가단체 대표들이 단상에 올라 차례로 서명을 마쳤다. 
    성명 내용은 물론 슈티코프가 지시한 ’스탈린의 명령‘ 그대로였다. 
    외국군대 철수, 특히 미군 즉각 철수, 내전 발생 방지,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남조선 단독선거 무효 등이다. 

    김구는 서명 후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만족한다. 통일 전에야 어찌 만족할 수 있으랴만, 다만 우리 과업이 하나의 난관을 개척해 나가는 것 같아 매우 유쾌한 일이다.”
  • ▲ 대동강 하류 쑥섬에 세워진 '통일전선탑'앞면. 뒷면엔 남북회의에 참가한 김구와 김규식 등 이름을 새겼다.
    ▲ 대동강 하류 쑥섬에 세워진 '통일전선탑'앞면. 뒷면엔 남북회의에 참가한 김구와 김규식 등 이름을 새겼다.
    ★메이데이 군사 퍼레이드 참관...대동강 쑥섬회동 ’통일전선 기념탑‘ 세워

    공동성명 서명 이튿날 5월1일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 평양역 광장, 노동자 농민들을 비롯한 대규모 행진에 이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인민군 부대의 사열행사가 진행된다. 
    따발총을 든 보병부대, 학생부대, 장갑차와 각종 포대가 소련제 트럭을 타고 지날 때마다 김일성이 손을 흔들었고, 그 옆에 김구는 막강한 무력에 위압당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30만 군중이 비를 맞으며 4시간 넘게 계속된 퍼레이드엔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초상화가 춤을 추었다.
    「남쪽 대표 모씨는 "새 젊은이들이 상하결속, 강력한 조직체로 밀고 나아가니 이런 씩씩한 힘이란 남조선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을...“ 혀를 내두르며 경탄하였다」 ([조선일보] 1948.5.8.)

    다음날 일요일 김구는 안신호와 함께 평안도 기독교의 요람 장대현(章臺峴)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이날 오후 김일성은 대동강 하류 ‘쑥섬’에서 남북요인들의 ‘뱃놀이 회담’을 벌였다. 
    북로당 대남연락부장 임해(任海)와 남조선 공작책 성시백(成始伯)이 꼼꼼히 챙긴 행사에는 남쪽요인들의 수행비서들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유명한 대동강 어죽 잔치 회식을 2시간 넘게 계속하며 나눈 대화는 평양의 역사와 추억을 곁들여 ‘남북공동성명’을 재확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날의 회담을 기념하여 김일성은 1980년대 후반에 ‘쑥섬 통일전선 탑’을 세운다. 스탈린이 꾸민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참여시켜 대성공을 거둔 ‘통일전선 공작’을 김일성은 뒷날 두고두고 이를 인용하며 자신의 공적을 치켜세웠다. 거기엔 ‘김구-김일성의 단독회담’ 성공이 빠지지 않는다. 아들 김정일 역시 이때의 ‘김-김 밀담’과 이를 성사시킨 거물공작원 성시백을 ‘영웅1호’로 받들었다.
  • ▲ 단독회담을 위해 김구(오른쪽)을 북한정부청사 사무실로 안내하는 김일성.
    ▲ 단독회담을 위해 김구(오른쪽)을 북한정부청사 사무실로 안내하는 김일성.
    ★김구, 김일성과 단독회담...망명 타진...”과수원서 여생 보내겠다“

    김구가 원하던 김일성과의 회담은 5월3일 오후 3시, 북한인민위원회(정부) 청사 김일성의 방에서 두 시간쯤 이어졌다. 회담 내용을 전해주는 김구 쪽의 기록은 없다. 비밀을 유지하고 싶었을까. 
    대신에 소련군정 [레베데프 일기]와 당시 북로당의 회담 기록을 전해주는 북로당 고위직 박병엽(朴炳燁)의 증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2010)이 남아있다.

    ◉[레베데프 일기] 요약=「김구는 북한에 수감된 한국독립당 당원의 석방을 요구. 김일성은 ‘테러분자’들이라고 대답하다. 김구는 ”선물을 달라“면서 조만식 석방과 ‘북한 전기의 남한송전’ 문제를 꺼냈다. ”남조선은 지금까지 북조선에 전기료를 지불하는데 전기가 모자란다. 미군정이 돈을 어디 쓰는지 모르겠다. 북조선에서 남쪽이 전기료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방송을 통하여 자주 보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남조선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다.“
    김구는 자신의 장래에 관하여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조선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망명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고 물었다.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레베데프는 이날의 일기 말미에 “남조선에 보내는 전기는 당장 끊어야한다”고 적어놓았다. 

    ◉박병엽의 증언 요약=김일성은 남북연석회의 성공이 김구의 지도력 덕분이라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선생께서 남조선에 내려가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탄압하면 어느 때라도 북으로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서울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북조선 공산당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해야 할 뿐 아니라 이북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워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구는 김일성의 신변걱정에 대하여서는 “남쪽에서 어려워지면 올테니까 그때는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의 진술=회담 당사자 북한 김일성이 뒷날 직접 진술하는 김구와의 회담 내용이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문고 그룹이 발행하는 좌익잡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가 평양에서 ‘해방40주년 기념’ 김일성을 인터뷰하여 게재했는데, 김일성의 답변 내용중 김구 부분은 다음과 같다. 

    “김구는 나를 만나기 위하여 북조선에 오기 전에 재차 자기 비서를 보내와 과거의 자기 죄과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어왔다. 나는 과거의 일은 모두 백지로 돌리자고 하였다. 그는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들어와 우리들이 소집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김구와 수차례 만나 담합하였다.
    그는 나에게 과거에 자신들이 중국의 상해에서 공론(空論)으로 밤낮을 보내고 있을 때, 장군은 무기를 손에 들고 싸웠으며, 승리하여 나라의 독립을 찾았다. 자신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반대하였지만 용서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김구는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이전에 자기가 보아온 공산주의자와는 다르다면서, 장군 같은 공산주의자라면 손을 맞잡고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함께 싸울 수 있다고 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김구는 남조선으로 돌아갈 무렵, 자기는 북조선에 체류하고 싶지만 오래있으면 북조선에서 자신을 억류하였다고 반동분자들이 데모할지 모르니 돌아가야겠다고 말하고 몇가지 부탁을 했다. 황해도 연백평야(38도선 이남)의 농민을 위해 관개용수의 공급을 재개해달라 제기하였고, 또한 남조선에서 투쟁하다가 활동을 못하게 되면 다시 올 생각이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과수원이나 하나 주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전부 해결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세카이] 1985년8월호).
    [세카이] 야스에 편집장은 김일성을 10여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북한 찬양-대한민국 비난을 지속한 인물이다. 그때 김대중의 일본-미국 망명 행각을 돕고 장문의 인터뷰를 거듭하여 지원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세 가지 자료에서 김구의 ‘북한망명 타진과 과수원’ 발언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망명 이야기는 뒷날 증폭되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으라”고 요청했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이에 김일성은 “그냥 가져가시오. 내가 그 걸 무엇에 쓰겠습니까?” 거절했다는 북한의 공식 기록이다.(‘김일성저작집’(4), 김구와 한 담화,1948년 5월 3일).
    무엇이 진실이든 김구의 북한행은 이렇게 끝났다. 
    '남한단선단정 반대' 합의를 제외하고는 남북통일에 대한 실천방안 제시도 협상도 전혀 없었다.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살려고 평양에 온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2)며 웃던 북한 지도층, “김구는 쓸모있는 바보”라며 남한선거 저지에 활용했던 소련 스탈린의 심복 슈티코프의 모란봉극장 정치 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김일성은 죽는 날까지 이때의 ‘김구 공작’을 ‘통일운동의 공적’으로 자주 거론하였으며 [김일성 저작집]에 수록하고, 북한공산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때만 되면 이 ‘수령님의 공훈’을 특집으로 보도하곤 했다.
  • ▲ 평양 을밀대를 돌아보는 김구와 김규식 일행.
    ▲ 평양 을밀대를 돌아보는 김구와 김규식 일행.
    ◆김구의 귀환 성명 “우리민족끼리 단결”...김일성, 세가지 약속 즉각 파기

    김일성은 김규식도 만나준다. ‘만나준다’는 말은 ‘김구만 우대’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200여명의 남쪽 좌익인사들은 북한이 정해준대로 공장 시찰이나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조선에서 간 대의원들은 활기에 차 있었지만 동시에 '정치건달'들은 가련했다. 그들은 일단 회의에 출석하는 것은 인정받았으나 각종 분과위원회의 중요토의에는 박헌영 일파에 의하여 참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여관방 하나에 두 사람씩 배정되어 아침부터 명산품이라는 평양소주와 닭고기, 돼지 고기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전용버스로 회의장으로 실려가서 찬성 거수를 하였고, 밤에는 조선의 무희로 불리는 최승희(崔承姬) 무용단 춤을 관람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남한의 반파쇼투쟁위원회 대표로 참석했던 고준석(高峻石)의 증언이다. ([조선 1945~50: 혁명사의 증언] 1985. 손세일, 앞의 책)

     남한대표들 가운데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등 70여명이 북한에 남겠다고 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에게도 ‘잔류’를 권유하였다. 김구는 측근들이 반대하여 단념했다고 전해진다. (선우진, 앞의 책)
    평양을 떠나기 전 김구는 ‘기분 좋은 얼굴’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레베데프 일기])
    “북조선에서는 벌써 기초가 많이 건설되었고 또 건설되고 있으나 남조선에서는 아무 것도 건설되지 못했다”는 김구는 “미국인들이 남조선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여 인민들의 불만이 많다”고 했다. 특히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어떠한 자유로운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고 강조하였다.
    두 김씨가 서울로 귀환하는 계획은 갑자기 변경된다. 남한의 반공청년들이 북한에 잠입하여 두 김씨의 귀환열차를 폭파하려는 음모가 들통났다며 북한 측은 열차 대신 승용차를 배정, 비밀리에 38선을 넘어야 했다.(송남헌의 증언, [신동아] 1983년 9월호).
    두 김씨 일행은 17일간의 ‘우리민족끼리’ 회합을 마치고 5월5일 저녁 서울에 도착하였다.

    ★“북한은 단전 안한다” 두 김씨의 자랑...1주일만에 물 먹다

    다음날 5월6일,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귀환성명을 발표한다. 
    그 성명서는 평양에서 미리 작성해온 것이었다. 
    “이번 우리 북행은 우리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각국과 다수 동포들에게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남북회의는 남조선 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 요구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신발전이며 큰 서광을 주는 바이다.”
    두 김씨는 자신들이 서명한 남북공동성명서의 내용을 남북협상의 최대성과로 꼽았다.
    “우리는 어떤 험악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공동성명에 명시된 바와 같이 동족상잔(同族相殘)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고 두 김씨는 장담하였다.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斷電)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남행도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두 김씨는 마치 남북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자신에 찬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북조선이 단정을 수립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듣는 이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2년전 북한엔 이미 단독정권(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토지개혁과 민족세력 숙청 등을 비롯한 공산화 작업이 다 끝나 있지 않은가. 
    ‘동족상잔은 없다’는 대목은 슈티코프가 특별지시로 집어넣은 사실을 두 김씨가 알 턱도 없다.
    살인을 준비 중인 살인범이 “너희는 안 죽이겠다”고 문서로 안심시키는 꼴, 이 다짐은 도둑이 제발 저리 듯 2년 후 소련이 감행하는 6.25 전면남침을 스스로 예시하는 ‘신호’였음을 누가 알겠으랴.
      
    요컨대 두 김씨가 내놓은 ‘성과’는 ‘단선단정 반대’와 김일성의 세가지 약속, 즉 단전 안한다, 송수(送水)도 해준다, 조만식도 보내준다 등이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그날부터 1주일 뒤, 일거에 깨지고 만다. 
    5천년 민족사 최초의 국민 총선거 5월10일 투표에 이어 개표가 끝나자 5월14일, 북한은 압록강 수풍발전소에서 보내주던 전기를 전면 단절한다. 남한 전국은 암흑천지가 되었고 연백평야에 송수는커녕 두 김씨만 배불리 물을 먹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