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국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영신.
    ▲ 건국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영신.
    “임영신 의원, 민주의원을 대표해서 그대가 미국에 가시오”
    막바지 무더위가 뜨거운 8월 중순, 돈암장 집무실에서 부채질도 잊은 이승만이 말한다.
    “이번 유엔총회를 놓치면 우리나라 독립은 기회를 잃게 되오. 엘리너 루즈벨트나 로물로 장군이나  루이스도 잘 아는 사람들이잖소. 승산은 충분하니 최선을 다해주기 바랍니다.”
    루이스는 임영신의 미국 이름, 남캘리포니아 대학(USC) 유학후 이승만과 20여년 독립운동을 함께 한 임영신(任永信)은 이승만의 이름 승(承)자를 따서 ’승당(承堂)‘이란 호를 지을 정도로 일심동체의 애국동지, 여성독립당 당수로서 민주의원 구성에도 전력을 기울여 이승만을 도왔다. 이승만처럼 영어에 능통한 임영신은 이미 ’정읍선언‘을 영문으로 작성해 두었고 유엔 로비에 필요한 인물 리스트도 뽑아놓았다. 

    이승만이 ’건국전략‘을 ’정읍선언‘에 담아 공표한지 두 달, 선언으로 끝날 선언이 아니다.
    필자가 앞에서 규정했듯이 그것은 미-소가 흥정하는 한반도의 난국을 돌파하는 전략카드, 즉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내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구상은 곧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독트린‘이기 때문이다.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것‘--임시정부 또는 과도정부가 국제기구 유엔의 승인을 받아 자유세계와 힘을 합쳐 북한의 소련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전략으로서 ’국제승인‘은 국제법박사 이승만의 오래된 독립원칙이었다. 6월말 민통총본부(민족통일총본부)를 출범한 이승만은 그해 10월에 열리는 유엔총회에 이 안을 제안하여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절박한 시간에 몰려있다. 

    그동안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등 늙은 반탁세력은 은퇴시키라”는 본국정부 훈령에 따라 소위 중도우파 김규식(金奎植)과 중도좌파 여운형(呂運亨)을 묶어 ’좌우합작 위원회‘를 7월 23일 출범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지난 2월 미군정과 함께 설립한 ’민주의원‘을 남한의 과도정부로 이용할 계산아래, 믿을 수 있는 임영신을 유엔에 파견하는 것이다. 
  • ▲ 유엔 총회에 참석한 임병직과 임영신(1946년10월)
    ▲ 유엔 총회에 참석한 임병직과 임영신(1946년10월)
    ★임영신, 유엔 사무총장 만나 성공...한국문제 본회의 상정예정 공표

    ’민주의원 주미의원 겸 대한민국 전권대표‘로 임명받은 임영신은 9월1일 배를 타고 인천을 출항한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 학비를 대준 사업가 오빠 임일(任一)로부터 활동비를 얻어 가지고 뉴욕으로 달려가 임병직(林炳稷)과 합류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이승만의 지령에 따라 눈코 뜰 새 없이 뛰고 또 뛰었다. 
    임영신은 10년 넘게 친분을 쌓은 엘리너 루즈벨트(Anna Eleanor Roosevelt: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에 부탁하여 유엔 사무총장 리(Trygve Lie)를 만나 설득작전을 편다. 그 결과 리 총장은 한국문제를 11월2일 유엔 총회 본회의에 상정하겠다고 공표하기에 이른다. ([승당 임영신 박사 문집] 임영신전집 편찬위원회, 1986)

    임영신과 임병직으로부터 ’성공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때가 이르렀도다”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직접 유엔 총회에 참석하여 목적을 관철할 계획을 짠다.
    그러면서 유엔 사무총장 리(노르웨이 출신), 유엔총회 미국대표단 엘리너 루즈벨트, 벨기에 대표단장이며 유엔 총회 의장인 스파크(Paul H. Spaak), 중국대표단장 웰링턴 구(Wellington Koo), 필리핀 대표단장 로물로(Romulo) 장군, 뉴욕교구 스펠먼(Spellman) 추기경 등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한반도에는 중대 상황이 급속히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적색 테러리스트들이 북에서 침투하여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전국 각지에서 방화, 살인 등 잔학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부디 유엔 총회가 한국의 과도정부를 승인하도록 요구해주기를 간청한다. 승인만 받으면 우리는 유엔과 직접협상할수 있는 지위를 얻게 된다. 중립을 표방하는 미국인들은 사태수습이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승인된 정부를 갖지 못한다면 남한을 지킬 수 없다”

    동시에 이승만은 친분 맺은 [뉴욕타임스] 발행인 설즈버거(Arthur Sulzvberger)에게 “미국의 중립적 태도가 우리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전보를 치고, 존슨(Richard Johnson) 기자를 한국에 다시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가장 중요한 사람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에게 “개인적으로 한국에 와달라”면서 형편이 안되면 자신을 일본에 초청하여 단독회감을 갖자“고 요청하였다.
    (하지 정치고문 랭던이 번스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Langdon to Bynes, 1946, 12.10 수신. FRUS 1946 vol.Ⅷ]). 
    미군정은 9월쯤 이승만에게 미육군특수우편(APO) 이용 특혜를 베풀면서 이승만의 국제우편을 빠짐없이 검열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 알면서도 ”너희가 보고 각성하라“는 듯이 솔직한 외교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임병직의 전문이 국내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9일과 12일의 전보는 다 잘 받아 임영신에게 바로 전했습니다. 임은 다대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접촉하는 이마다 극력 협력해줍니다. 필리핀 대통령의 답전을 받은 바, 뉴욕의 자기나라 대표에게 훈령하여 한국의 제의를 응원하라 했는데, 유엔총회 순서에 우리 문제를 넣어야 되는 고로 이를 도모합니다. 국내동포들이 우리 활동을 듣고 흥분한다니 기쁩니다. 전보로 보내주신 선언이 극히 도움이 됩니다. 모든 신문들이 열정으로 후원하여 우리 소식을 알려고 합니다.“(’조선문제 UN상정 내정‘[조선일보]11.23)

    이처럼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에게 유엔의 각국대표단에 배포할 선언문까지 직접 작성하여 보내는 등 서울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미군정의 입법의원 설립에 즈음하여 이승만은 워싱턴 한국위원부에 홍보와 로비활동도 강화시키며 독려한다.
    ”미군정이 신설한 입법의원을 한국정부로 인정하라고 미국무부에 강력 요청하라“
    이와 함께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의 폐기를 주장하라는 전보는 열두번이나 보낸다.
    때마침 영국 베빈(Ernest Bevin) 외상이 의회연설에서 ’38선은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고 발언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조선일보] 1946, 10.26), 이승만은 임병직에게 ”얄타회담 비밀협정 전문을 공개할 것을 미국무부에 요구하라고 재촉하였다.
    동시에 카이로 선언,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결정을 즉시 최소하라고 이승만이 직접 나서서 주장하였다.
  • ▲ 미군정의 입법의원 개원식. 의장 김규식이 개회사를 읽고있다. 장소는 옛 일본총독부.
    ▲ 미군정의 입법의원 개원식. 의장 김규식이 개회사를 읽고있다. 장소는 옛 일본총독부.
    ▶미군정, 입법의원 선거...이승만 지지자들 압승...김규식, 재선거 요구

    스탈린의 지령에 따른 10월폭동이 전국을 휩쓸던 10월7일, 미군정은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고 12일엔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법령118호)을 공포하였다. 소련과 신탁통치를 위한‘임시한국민주정부’를 합의하여 수립할 때까지 “남한 미군사령관의 정책을 도와주는 입법자문기구를 설치하라”는 본국의 새로운 대한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공산당의 반대는 물론, 모든 정파의 찬반 격론 속에 한국최초의 국민참여선거(간접선거)가 진행된다. 이승만은 이미 국민대표기관 민주의원이 건재한데도 자신을 포함한 우익진영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좌우합작용 입법의원’ 설립에 대하여 “민족통일총본부와 독촉국민회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 그러나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은 각자에게 맡긴다는 기본 입장을 밝혔다.
    입법의원 의원수는 선거로 민선 45명, 미군정이 임명하는 관선 45명으로 90명이다.
    10월 30일까지 치러진 선거결과는 이승만 계열의 압승이다. 45명중 34명(독촉국민회 17명, 한민당 14명, 한독당 3명) 당선, 무소속 9명, 좌익은 제주도 2명뿐이었다. 공식적으로 ‘단체 불참’을 밝혔는데도 국민은 이승만 지지임이 드러났다. 이승만도 당선되었다. “누가 추천했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불참한다”며 당선을 거부하였다. ([서울신문] 1946.10.31)
    기대이상의 선거결과에 흐뭇한 이승만은 선거를 취재하러 온 미국기자 게인(M. Gayn)과 [뉴스위크]의 여기자 에브너(Charlotte Ebener)를 돈암장에 초청, 하지의 부관과 한민당 김성수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게인이 “두 지역에서 이박사 지지자들이 당선되는 것을 보았다”며 축하하자 이승만이 답했다. “우리 인민은 나와 함께 있소이다.” 
    선거에서 자기사람이 단 한명도 당선되지 못한 김규식은 뒤늦게 뿔이 났다. “이번 선거는 사기다. 좌익 지도자들이 감옥에 있어 출마도 못했으니 공정하지 않다. 서울과 강원도가 특히 편파적인 결과이므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대거당선에 실망이 큰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하지 사령관을 닦달하였다. 
    하지(John R. Hodge)는 11월25일 “서울과 강원도 선거 무효”라 선언하고 재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관선 45명에 김규식파와 민주동맹 김약수 등 좌파 일색으로 구성한 명단을 발표한 미군정은 12월11일 미군정청(옛 일본총독부) 대회의실에서 의장에 내정한 김규식을 선출시키고 입법의원 개원식을 열었다. 한민당이 “비민주적”이라며 불참하자 미군정은 ‘정족수 규정’(전의원 4분의 3)을 ‘과반수’로 바꾸면서까지 밀어붙인다. 오로지 ‘좌우합작을 위한 입법기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입법의원의 첫 공식 업무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 일동’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친 것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전 민족이 단결하여 미소공위 재개 촉진과 남북통일임시정부의 조속 수립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자” ([조선일보] 1946.12.14.)   
  • ▲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15일 건국정부 선포 경축식때 모습.
    ▲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15일 건국정부 선포 경축식때 모습.
    ◆이승만 미국행...맥아더와 단독회담...미국에 ‘한국 해결책’ 제시

    미국정부가 한국의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까지 실시하는 등 좌우합작을 강행, 소련에 일방적 구애(求愛)를 벌이는 추태를 보자 이승만은 격분한다. 미군정의 비굴한 모습은 스탈린이 좋아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의 행태 그대로였다. 
    11월22일 하지를 방문한 이승만은 “한국문제가 유엔에 제출된 마당에 좌우합작을 포기하라”고 요구, 불응하면 하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가 화를 내며 거부하자 이승만은 “내가 당장 미국에 달려가 미군정의 실책을 폭로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어 방미계획을 발표한다. ([동아일보]1946.11.23.)

    ★도쿄에서 맥아더와 장시간 대좌...“가장 중요한 밀담”

    이승만의 도미 환송회는 가히 국민적 행사였다. 미국과 소련에 막혀 출구를 모르는 한국독립문제의 돌파구를 뚫어 유엔 총회에 상정하게 만든 이승만이야말로 ‘국민 영웅’이 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국민족대표 외교후원회가 잔치를 베풀고 전국학생총연맹이 지지집회를 열었다. 민통총본부는 여비를 마련하고 국민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승만에게 모아준 방미활동비는 후원회 147만4,820원(미화 약 3만5천달러)와 민주의원 50만원(미화 약1만달러), 그동안 받은 정치자금 중 최대금액인데 이 액수의 증빙자료는 이승만이 여행중 꼼꼼하게 기록한 영수증철이다. 이승만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부터 그런 ‘기록의 왕’이었다.

    이승만은 12월4일에야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이 주선해준 미군용기를 타고 김포를 떠났다. 
    가장 중요한 회담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단독회담이다. 오후 5시30분에 만난 두 사람은 장시간 한국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뒷날 미국정부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비밀회담이었다고 연구자들이 평가하고 있다.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6권, 앞의 책.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출판부,2003)
    이런 평가는 이승만의 평소 주장을 모아보면 필자도 넉넉히 공감한다.
    ▶미국의 좌우합작 추진은 헛수고다. 공산독재 소련은 좌우합작을 수용하지 않는다.
    ▶북한에 이미 단독정권을 세운 스탈린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남한까지도 미소공둥위를 이용하여 공산화하려고 반탁세력의 남북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지 않는가.
    ▶소련이 분단을 고착시키고 미군이 물러나면 무력침공도 불사할 것이므로, 미국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려면 지금 미리 미국이 소련에 ‘선전포고’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미소공위 협상은 포기하라. 내가 정읍선언에서 말한 과도정부를 미국은 빨리 세우도록 지원하고 국제지지 확보를 위해 유엔이 과도정부를 승인케 하여 자유세계의 힘을 합쳐 소련을 추방해야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임을 명심하라.
    참고로 이승만의 소련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 또 있다.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의 글이다.
    “소련문제의 경우, 이 박사는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는 길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각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미국이 어리석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는 만약 지금 소련의 야망을 이대로 묵과하면 조만간 과거 일본을 키워준 것과 같은 종류의 침략세력을 키우는 꼴이 될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견해가 맞을 지도 모른다는 것, 이곳의 미국인들도 한결같이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상권, 비봉출판사, 2013)

    ---이상과 같은 주장은 이승만의 책 [JAPAN INSIDE OUT] 이래로 이승만이 펼친 일관된 지론이다. 맥아더와의 회담내용을 알 수 없다 해도 반공주의자 맥아더는 상당부분 동의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것은 한 달 뒤 1월 국무장관에 임명된 마셜(George C. Mashall Jr.) 장군이 친구 맥아더 장군의 요청을 수용하여 몇 달 지난 가을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데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10시 맥아더와 헤어져 일본을 출발한 이승만은 하와이에 들러 헐(John E. Hull) 장군(뒷날 주한 유엔군사령관) 휘하의 의장대를 사열한 뒤 12월7일 워싱턴에 도착, 각국 정부요인들이 많이 투숙하는 칼튼 호텔(Carlton Hotel)에 숙박, 대미 여론전을 개시한다. 
  • ▲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의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 표지와 올리버의 두 모습.
    ▲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의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 표지와 올리버의 두 모습.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이 결정해야”...이승만 활동을 미국무성이 차단

    미국 기자들이 호텔로 몰려와 왜 왔느냐고 질문공세를 펴자 이승만은 말한다. 
    첫째, 긴급한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에서 토의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미국정부가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한국인자신의 정부를 즉시 수립하도록 도와주고 승인하도록 요청하러 왔다. 
    이에 애치슨 국무차관이 재빨리 반응했다. “대한정책은 달라진게 없으며 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다” 그러자 그러자 이승만은 도착성명이란 이름으로 반박문을 발표한다. “통일도 없이 미군이 머문다면 한국은 미국의 점령국인가. 나는 한국문제가 미국의 힘에 의하여 해결되리라는 희망아래 한국인들의 궐기를 억제하고 있다” ([조선일보]1946.12.12.)

    유엔 총회의 참석을 신청하고 기다리던 12월10일 미국무부는 한국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이 ‘공식자격’을 갖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 유엔 총회참석을 봉쇄해버린다.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의 길도 막혀버렸다. 이에 개의치 않는 이승만은 본래목표 미국정부, 의회, 언론을 통한 여론작전 팀을 구성한다. 
    칼튼 호텔 이승만의 스위트룸은 작전사령부, 유학시절부터 멘토인 해리스(Frederick B. Harris) 상원 목사, 오랜 친구 스태거스 변호사, 언론인 윌리암스(Jay Jerom Williams), 굿 펠로 대령, 우달(Emory Woodall) 대령, 올리버(Robert Oliver) 교수, 임병직, 임영신 등은 전략회의를 구성하고 로비 대상 인물들을 분석 점검하며 작전 스케줄을 짰다.
    특히 이승만은 트루먼의 부통령때 절친 상원 원목 해리스를 통하여 트루먼과의 면담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마셜이 국무장관에 임명(1.21)되자 면담신청을 하고 유엔의장 스파크등과 만나려 하였으나 미국무부 알저 히스등 친소세력은 반소주의자 이승만이 ‘공적자격’(official status)이 없다는 핑계로 번번이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문제 해결책’ 6개항을 작성하여 올리버로 하여금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John Vincent)에게 건네주도록 시켰다. 그 6개항은 다음과 같다.
    1)분단된 한국이 통일되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을 다스릴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를 선거를 통하여 수립할 것.
    2) 과도정부를 유엔에 가입시킴으로써 미-소 양국군의 철수 등 주요문제를 직접 협상.
    3) 한국 경제 복구를 위해 일본의 배상청구를 서두를 것.
    4) 모든 나라와 평등하고 전면적인 통상권을 한국에 부여할 것.
    5) 한국의 통화 안정을 위해 국제외환제도를 수립할 것.
    6) 미-소 양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국 안보군(security troops)을 주둔시킬 것.
    이 가운데 주요한 1-2-6항은 바로 ‘정읍선언’을 영문화한 것이었고, 특히 3개항이 경제항목인 점이 뒷날 이승만 집권시 대일협상과 외환관리를 직접 총괄한 것과 관련하여 눈길을 끈다.(손세일, 앞의 책). 

    올리버로부터 ‘한국문제 해결책’을 받은 빈센트는 마셜 장관과 국무부 점령지역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H. Hildring) 소장에게 전달하였다. 힐드링은 맥아더와 가까운 사이로 이승만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올리버(시라큐스 대학교수)를 불러 ‘개인 대변인’(personal representative)이 되어주기를 요청, 월1,000달러 고용계약을 맺었다. 1월중순 가족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이사한 올리버는 그때부터 1960년 이승만의 자진사퇴 때까지 13년간 대통령의 외교-홍보 보좌관으로 일하였고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의 대미투쟁] 등 현장역사 증언과 기록을 남겨 대한민국 현대사의 귀중한 사료로 남겨주었다.
  • ▲ 임영신의 유엔외교를 도와준 엘리너 루즈벨트(왼쪽)과 한국문제 유엔 사정을 약속했던 초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
    ▲ 임영신의 유엔외교를 도와준 엘리너 루즈벨트(왼쪽)과 한국문제 유엔 사정을 약속했던 초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
    ★하지, 이승만의 신년사 보도금지...이승만은 “미국이 변하고 있다” 

    1947년 새해 아침, 미군정은 이승만이 보내온 ‘신년사’를 가로채어 보도를 금지시켰다.
    이승만 소식이 궁금한 독자들은 신문에 유독 이승만 신년사만 빠져 어리둥절 더 궁금해졌다. 
    이승만은 민통총본부로 신년사를 타전했는데 그것을 본 하지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미국과 거의 모든 유엔국가들의 여론이 한국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즉시 독립하겠다는 한국인의 결심을 보고 트루먼대통령도 한국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한 나머지 
    어떤 새로운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맥아더 장군도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국무부 안의 몇몇 유화주의자들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과 독립을 위한 우리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해보
    일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승만 신년사 주요내용, 하지가 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Hodge to Byrnes] 1946.12.31. FRUS 1946, vol Ⅷ)

    국제정세를 꿰뚫는 예리한 선견지명자 이승만은 이런 편지도 보냈다.
    “미국의회가 반공주의적인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으므로 미국의 대소련 정책도 변경될 것으
    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대한 정책도 바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바라는 쪽으로 달라
    지도록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 국내 모든 언론기관과 단체들은 맥아더 원수로 하여금 한국 방
    문 시찰토록 요구해서 그가 일본에서 햄함과 같은 시정을 우리에게도 해달라고 요구하라.....
    마셜 원수가 국무장관에 피임된 결과 미국 내의 여론은 장차 극동정책에 일대 변동이 있으리
    라...” 이 편지 내용은 국내신문들에 크게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47.1.11.)
  • ▲ 미육군 동료이자 친구인 맥아더 사령관과 마셜 국무장관.(오른쪽)
    ▲ 미육군 동료이자 친구인 맥아더 사령관과 마셜 국무장관.(오른쪽)
    ★마셜, 한국 정부수립에 긍정적...힐드링, 이승만 제의에 적극적

    2월15일 마셜 국무장관은 애치슨 차관에게 3부 정책조정위원회(국무부-육군부-해군
    부:State-War-Navy Coordination Commission:SWNCC) 산하에 ‘한국문제 특별위원회’를
    설치 가동하고 그 결과를 보고 하라고 지시한다. 이어서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게 남한
    에 확정적인 정부(a definite government)를 수립하고 이 정부를 일본에 연계시킬 방안을 강
    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남실록],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앞의 책).
    이때 올리버는 힐드링을 거의 매일 만났는데 힐드링은 “나도 생각이 있다. 이승만 박사의 ‘한
    국문제해결책’과 아주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서 힐드링은 이
    승만을 직접 몇차례 만나 서로의 구상을 논의하였다. ([Interview between Dr Syngman
     Rhree and General John Hildring]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소장문서, 올리버 [이승만의 대
    미투쟁] 상권, 비봉출판사, 2013).

    ★김구의 두 번째 ‘쿠데타’...임시정부 집권 승인 요구 해프닝

    이 무렵 서울에서 또 하나의 ‘정변’이 일어난다. 
    이승만의 신년사에 화가 난 하지 사령관은 미소공위 재개문제에 대하여 북한의 치스차코프 소
    련 사령관과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하였는데, 이것은 끝난 줄 알았던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미
    를 보임으로써 우익단체들에게 ‘반탁 시위’ 불을 지른 셈이었다.
    김구 또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위가 시작되자 이승만의 기세에 한동안 눌려있던 ‘임
    정봉대론’(臨政奉戴論)이 고개를 들고 아예 ‘임정봉대운동’을 또 다시 전개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민통총본부, 독촉국민회, 비상국민회의 3개단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 그중에 비
    상국민회의가 수십년래의 독립운동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니 세 개를 단일화하여 독립운동의 최
    고기구로 개조하기를 주장한다.”(2월8일 김구 성명서)
    요컨대, 김구의 비상국민회의로 단일화하여 임시정부가 집권하자는 말이다.
    김구는 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창덕궁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어 ‘3개단체 통합’을 결의하고 
    명칭도 ‘국민의회’로 바꾼다. 바로 임시정부시절의 임시의회를 부활시킨 것이다.
    3월1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는 “임시정부를 법통정부로 추대”한다고 선언, 3월3일 국민
    의회는 ‘이승만 주석, 김구 부주석’으로 추대한 정부를 구성하여 발표하였다. 김구는 5개연합
    국에 자주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5일천하’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김구에게 급전을 보낸다. “내가 귀
    국할때까지 기다리시오. 섣부른 행동은 삼가시오.”
    미국 CIC와 군정 경찰은 경교장과 운형궁의 국민회본부를 수색하고 김구와 이시영등 4명은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불려가 장사간 추궁을 받았다. ([조선일보]1947.3.6.~9)
    이렇게 하여 김구의 ‘미군정타도-임정집권’ 집념은 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김구의 의도와 달리 임시정부를 저항단체가 아닌 하나의 정치정당으로 조용히 바꾸
    어 나갔다. 이승만과 김구는 두 번 다시 서로 합작하지 않았다.” (올리버, 앞의 책).
  • ▲ 트루먼 미국대통령(가운데)이 떠나는 국무장관 번스와 신임 국무장관 마셜(오른쪽)과 함께 하고 있다.
    ▲ 트루먼 미국대통령(가운데)이 떠나는 국무장관 번스와 신임 국무장관 마셜(오른쪽)과 함께 하고 있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마셜 국무장관은 “남한에 독자정부 수립 용의” 

    3월12일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미국의 소련정책을 지금까지의 유화적인 협력정책에서 봉
    쇄정책으로 전환한다는 연설을 했다. 소련이 공산화 혁명을 시도하는 그리스와 터키에 4억달
    러의 경제-군사 원조 승인을 요구하는 연설에서였다. 곧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는 미
    국의 대변신, 바로 이승만이 두 달 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예견한 ‘미국의 변화 그것이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이승만은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각하께서 행하신 역사적 연설에 대해 충심으로 공하(恭賀)합니다. 각하께서는 자유를 애호하
    는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용감한 입장을 선택함을 
    계기로 남한의 미군정당국이 각하의 정책을 받들어 ’좌우합작‘ 운동을 포기하도록 지시해주기 
    바랍니다. 한국은 그리스와 같은 전력적 위치에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들은 
    각하의 감동적인 연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미군 점령지역에 과도적 독립정부가 수립된다
    면 그 정부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방파제(bulwark)가 될 것이며 남북한의 통일을 앞당
    기는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Syngman Rhree to Harry Truman, March 13, FRUS 1947 
    vⅠ)

    이제야 소련의 침략주의에 눈을 뜨고 행동에 나선 트루먼에게 이승만은 감사와 함께, 좌우합
    작이 시간낭비임을 깨우쳐주고 싶어 한반도의 지정학적 전략 가치를 ’반공 방파제‘라고 강조
    해 가르쳐준다. 
    다음 날, 마셜 국무장관이 한국문제를 거론하면서 소련이 협조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처음 
    공언하였다. 그리고는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우남실록]
    유영익, 앞의 책). 이승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서한을 받은 트루먼으로부터는 반응이 없었다. 국무부에서 이승만의 편지에 
    “응답하지 말라”는 꼬리표(notation)을 붙여 백악관에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 ▲ 트루먼 독트린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 1면.
    ▲ 트루먼 독트린을 보도한 뉴욕 타임즈 1면.
    이승만의 선수 외교—NYT에 ’폭탄 성명‘ 발표

    이제 그만 돌아가자. 하지만 4개월간 외교-홍보 등 혼신을 다해 노력했건만 백악관도 국무성
    도 공식적인 견해발표를 듣지 못했다. 국무성의 소련 간첩 등에 당하던 때가 떠오른다. 지금
    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다. 
    3월22일 [뉴욕 타임즈]에 깜짝 놀랄만한 성명서가 보도된다. 이승만이 발표한 것이다.
    요점은 “미국 정부가 남한에 과도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한미양곡
    이 정부수립에 협력하기고 하였다”는 주장이다. 
    「남한의 독립은 곧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 4천년동안이나 지켜온 독립을 회복하려는 한국인의 
    기나 긴 투쟁은 이제 결정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 같다. 그 새로운 프로그램의 기
    본요소들(basic elements)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상 합의를 이루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소련이 북한에서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게 하고, 한반도 전체의 
    통일과 완전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기에 한-미 양국간 협력기반을 튼튼히 마련하는 것이
    다. 기본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향후 30~60일 이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2) 과도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엔에 가입하며, 워싱턴DC와 각국 수도에 대표부를 설치
       한다.
    3) 미국은 남한에 대사급 고등판무관을 파견한다.
    4) 북한에서 소련군을 철퇴시킨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안정적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은 안보군으로서 남한에 주둔한다.
    5) 한국의 부흥을 돕고 파멸적인 남북분단으로 야기된 경제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미국은 
       대규모의 차관을 남한에 제공한다. 
    6) 남한 과도독립정부는 각 부처에 미국인들을 고문관으로 기용할 수 있다.

    이들 요소들은 이승만이 마셜이나 힐드링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와 자신의 구상을 버무려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방미외교에서 협의-합의하고 싶었던 항목들을 미당국과 못했던 대신
    에 일방적 성명서로 공개한 것, 이는 미국정부가 한국독립을 위해 수행해야할 최소한 의무와 
    희망사항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애치슨 국무차관은 재빨리 나서 “이승만 개인의 가정(suppositions)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과연 그런가? 이승만의 ’가정‘중 정부수립은 불과 1년후 거짓말처럼 현실로 재현된다. 간절히
    소원하면 이루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미리 보는 눈은 다르다.

    애치슨은 득달같이 이승만이 예약한 일본행 미군용기 탑승권을 최소시켰다.
    이승만은 웃었다. 행방직후 귀국 때도 당한 일, 사흘 뒤 힐드링이 따로 주선해준 민간여객기
    편으로 도쿄 맥아더를 만나러 떠난다.

    4월6일 이승만은 이번에도 도쿄에서 맥아더와 두시간 넘게 회담하였다. 미국으로 떠날 때와 
    한국으로 돌아올 때 두 차례 비밀회담, 그 결과는 5개월 뒤 9월16일 마셜의 “한국문제 유엔
    이관”으로 나타난다. 
  • ▲ 방미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  오른쪽부터 프란체스카, 이승만, 중국서 동행한 이청천, 김구, 김규식.
    ▲ 방미외교에서 돌아온 이승만. 오른쪽부터 프란체스카, 이승만, 중국서 동행한 이청천, 김구, 김규식.
    ★이승만 귀국 성명 “북한을 하루바삐 해방시키자”

    맥아더가 마련해준 비행기를 탄 이승만은 곧장 귀국하지 않고 중국 남경으로 장제스를 찾아갔
    다. 최초의 만남이다. 상호협력을 다짐한 뒤 6일간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승만이 4월21일 귀
    국할때 장제스는 20만 달러를 기증하고 전용기 자강호(自强號)까지 제공한다. 
    이승만의 방미외교 성공을 축하하는 국내 분위기는 환송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
    다. 당시 미 정보당국 근무자 로빈슨(Richard D. Robinson)은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의 계량
    기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고 써놓았다. (리차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1988)

    이승만이 귀국 기자회견과 도착 성명, 4월27일 대대적 환영식에서 말한 요지는 더욱 단호하
    다. 미국이 반공으로 선회하며 미-소 대결의 냉전 국면이 ’자유한국‘ 건국의 길을 밝혀주지 않
    는가. 평생 불굴의 신념이 개척한 글로벌 리더십의 카리스마가 한층 빛을 뿜는다.

    ◉과도정부를 하루 바삐 세워 연합국들과 협력, 38이북을 하루 바삐 해방시키자.
    ◉좌우합작이란 구실로 통일을 방해하는 행동이나 언론을 일절 하지 말라.
    ◉입법의원은 하루 바삐 총선거 법안을 만들라.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하지 말라.

    이승만이 불지른 ’건국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건국‘까지는 ’시련의 1년‘을 더 견뎌내야 할 운명이 가로막고 있음에랴. 
    미국의 전략부재 우유부단과 스탈린의 무서운 ’공작‘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