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국제연맹에 일본 침략 규탄 독립운동 성공..일본 탈퇴호텔 식당서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와 결혼부부 일심동체 독립운동, 대한민국 건국에 눈부신 외교활동대한민국 초대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는 독립유공자
  • ▲ 1933년 2월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 선 이승만 박사. 일본의 만주침략과 우리동포에 벌인 만행을 고발하여 일본을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 1933년 2월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 선 이승만 박사. 일본의 만주침략과 우리동포에 벌인 만행을 고발하여 일본을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날 저녁 호텔 식당은 만석이었다. 
    관광도시에 국제연맹 회의까지 열리고 있으니까.
    두리번거리는 이승만을 지배인이 이끌었다.
    “동양의 귀빈이신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식탁엔 관광객 오스트리아 백인 모녀가 앉아있었다, 
    이승만은 프랑스어로 고맙다며 앉았다.

    33세 비엔나 미녀 프란체스카는 놀랐다. 
    기품 있는 중년 신사가 주문한 메뉴는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 시큼한 배추절임)과 작은 소시지 한 개, 감자 2개. 
    "봉 아뻬띠(맛있게 드세요)" 한마디뿐, 유럽남자들처럼 말도 걸지 않고 점잖은 풍모와 달리 값싼 음식을 맛있게 먹는 동양신사에게 프란체스카는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을 느끼며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열렸다.

    “동양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코리아요” 나이보다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프란체스카는 비엔나 독서클럽에서 본 책 중에  ‘금강산’과 ‘양반’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코리아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놀랍고 반가운 이승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시작하는데 지배인이 다가왔다.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신문기자가 찾아왔다고, 이승만은 서둘러 일어나며 인사하였다.
    “덕택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실례합니다.” 

    1933년 2월21일 저녁, 제네바 국제연맹에 혼자 달려와 일본의 만주침략과 한국동포들에 대한 만행을 고발하는 독립운동을 하던 중, 분주한 이승만이 숙소 호텔(Hotel de Russie)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백인 여성이 평생배필이 될 줄을 하나님은 아셨을까.
  • ▲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프란체스카. 제네바 여행중 이승만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프란체스카. 제네바 여행중 이승만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사진과 한면 전부 차지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코리아가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는 내용을 보자 독립운동가임을 알았다. 프란체스카는 그 페이지를 오려서 봉투에 담아 이승만에게 전해달라고 안내데스크에 맡긴다. 프란체스카가 먼저 이승만에게 호감의 신호를 던진 것. 
    고맙다는 메모가 오고 이름이 ‘리승만’이란 것도 알았다.
    다음날 다른 신문에 난 기사를 또 오려서 보냈더니 이승만은 차를 대접하겠노라 했다. 처음엔 사양하다가 호숫가로 나갔다. 
    아름다운 레만 호수를 바라보며 마음을 여는 소통이 시작된다.

    58세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뿜어내는 독립투사의 대화에서, 조금씩 설레는 프란체스카는 저절로 끌려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알았지만 그녀는 외로운 독립운동가의 일손을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어려서 꿈이 의사였던 프란체스카는 3녀중 막내,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막내딸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남자처럼 강하게 훈련시키고 상업학교에 보내고 영어를 배우도록 스코틀랜드로 유학까지 보냈다. 그렇게 영어 통역관 국제자격증을 따고 속기와 타자도 특기로 갖추었다. 프란체스카는 이 모든 것을 돈도 없고 일손이 필요한 동양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하기로 혼자 작정한 것이다.

    어머니는 듣도보도 못한 나라 한국인에게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다. 가업을 이어야하는 아들같은 딸인데, 식사대신 날달걀에 식초를 타서 마신다는 중년의 가난한 동양남자와 가까워지는 게 좋을 턱이 없다.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자며 서두르는 어머니, 작별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프란체스카는 사우어크라우트 한병을 그분에게 전해달라며 종업원 손에 맡기고 떠나야 했다.
  • ▲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행을 국제연뱅에 고발한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게제한 제네바 신문(1933.2.22)
    ▲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행을 국제연뱅에 고발한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게제한 제네바 신문(1933.2.22)
    ★몇 달후 7월초 이승만이 비엔나에 나타났다. 
    모스크바 가는 길에 소련 비자를 얻기 위해서다.
    이승만은 만날 사람이 많아 바빴고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자주 만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일주일동안 비엔나의 명소와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닐며 대화는 깊어져 갔다.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없이 성실한 성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의 뜻을 알게 되었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고 프란체스카는 고백한다.

    “나이 지긋한 동양신사라 별일 없을 줄 알고 합석 했다가 귀한 막내딸을 멀리 시집보내게 될 줄이야...” 탄식하는 어머니와 언니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과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였다.  (이상 [프란체스카 여사의 살아온 이야기] 2007)

    우연이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되는 인생사, 프란체스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내와 유능한 비서가 필요한 독립운동가 '하나님의 종' 이승만에게 3개국어나 잘하는 지성적 교양과 통역 면허에 타이핑 능력까지 갖춘 미녀가 나타나 접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 ▲ 호놀루루에 도착, 교민들의 환영 꽃목걸이를 걸고 행복한 신혼부부.
    ▲ 호놀루루에 도착, 교민들의 환영 꽃목걸이를 걸고 행복한 신혼부부.
    ★사랑에 눈이 먼다는 것, 사랑 앞엔 신분도 나이도 국경도 인종도 없다는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경우가 딱 그랬다. 25세 나이 차이도 아랑곳없이 다음해 10월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른다. 이승만이 무국적자였으므로 프란체스카는 이민 비자로 대서양을 건너야했다. 
    또 한가지 걱정은 이승만 때문이다. 그동안 독립운동 강연에서 “한국인은 한국인과 혼인하라”고 강조했던 지도자가 뜻밖에도 백인여자와 결혼하다니...하와이 교민들은 뿔이 났다.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동포들이 다 돌아설 테니 이 박사님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 번이나 받자 프란체스카는 울고 말았다. 
    그러나 호놀루루 항에 도착하였을 때 몰려나온 수천명 하와이 교민들이 레이(꽃목걸이)를 걸어주며 뜨거운 환영잔치를 베풀어주자 프란체스카는 또 한번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 ▲ 한복 차림의 이승만 대통령 부부.
    ▲ 한복 차림의 이승만 대통령 부부.
    ★진짜 사랑은 독립운동의 고난과 대한민국 초대 퍼스트레이디로서 한국 현대사를 만드는 부부 일심동체의 삶이 토해낸 프란체스카의 말…“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란 한 줄에 담겨있다. 
    6.25때 쓴 [난중일기]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두 책에서 극진한 부부애를 넘은 동지애와 불철주야 외교와 애국심 깊은 국민사랑, 그리고 흥미로운 현대사의 뒷이야기와, 근검절약의 표본같은 생활상을 읽을 수 있다. 
    프란체스카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가장 한국적인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프란체스카를 독립유공자로 모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