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법 위반 정모 씨, 스스로 "퀴어 페미니스트" 주장… '양심의 기준' 모호해, 악용 우려도
  • ▲ 법원. ⓒ정상윤 기자
    ▲ 법원. ⓒ정상윤 기자
    종교적 신념이 아닌 비폭력·반전주의 등 개인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해 재판에 넘겨진 남성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24일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모 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비종교적 신념' 병역거부, 첫 무죄

    정씨는 현역병 입영 대상자로 2017년 11월14일까지 입대하라는 병무청의 입영 통지서를 전달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로부터 3일이 경과한 11월17일까지 입영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정씨는 성소수자이자 대한성공회 교인이다. 자신을 '퀴어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 정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로 고등학교 때부터 획일적인 입시교육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집단문화에 반감을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또 대학 입학 후에도 각종 반전시위 등에 참여하며 기독교 신앙에 따라 비폭력주의·반전주의 신념을 갖게 됐다고도 밝혔다. 

    이런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다양성을 파괴하고 타인을 향한 폭력을 전제로 하는 군대에 입영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1심은 정씨의 병역 거부 이유가 병역법 제88조 1항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도 보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2심은 "정씨는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페미니즘의 연장선 상에서 비폭력주의와 반전주의를 옹호하게 됐고, 그에 따라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정씨의 신앙과 신념이 내면 깊이 자리 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도 2심 판결에 수긍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양심 판단 기준' 여전히 모호

    비종교적 신념에 따른 현역병 병역 거부에 무죄가 확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병역법이 정하는 정당한 사유에 종교적 신념이 포함된다며 '여호와의 증인' 등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2019년 2월에는 수원지법에서 비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비군훈련을 거부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종교적·비종교적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 사건에서 당사자가 종교활동이나 비폭력주의 활동에 얼마나 참여하고 교리를 지켜왔는지 과거 행적을 중점적으로 판단한다. 

    대법원은 양심의 기준으로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영향 아래 있으며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양심이나 신념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아무리 과거 행적을 살펴보더라도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또 비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를 법원이 인정함으로써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법조인은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종교활동이나 반전시위 등에 참여하며 준비했다면 이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현역 장병들의 사기 저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