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칼럼] "좌파 광풍도 바람일 뿐… 독점된 정의-분칠된 공정 극복하고 일어서자"
  • ▲ 김기현 전 울산광역시장.ⓒ뉴데일리DB
    ▲ 김기현 전 울산광역시장.ⓒ뉴데일리DB
    가을이다. 하늘은 높아졌고, 대지는 추수를 향해 간다. 이 가을, 우리는 작은 희망을 추수했다. 국민의 분노가 두려워 임시방편으로 눈가림을 한 것인지,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국’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우상이 무너졌다. 아니, 쫓아냈다.

    민생과 나라 경제·안보·정치가 말라비틀어져 가는 이 답답한 상황에서도, 이 작은 추수를 보면서 나는 가을을 느낀다.

    사람마다 가을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의 가을에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 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이다. 명동신사 박인환의 시는 박인희 씨의 맑은 음색에 실려 가을을 더 멋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세월은 가고 온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이성과 상식 앞에서 소멸했다

    감수성 넘치던 학창시절, 이 구절이 라디오에서 나올 때면 괜히 가을남자, 아니 가을소년이 되곤 했다. 술도 몰랐고, 버지니아 울프도 몰랐고 박인환은 더더욱 몰랐던 시절이었지만, <목마와 숙녀>는 나를 가을로 내몰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하다.

    올해도 나는 <목마와 숙녀>로 가을의 문을 열었다. 애초에 시를 모르는 시맹(詩盲)인 탓으로 해석하고 분석해 낼 재간은 없지만, 40여 년 전의 연애편지 다시 읽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읽었다.

    이 가을에 만난 <목마와 숙녀>에서 유난히 가슴에 다가오는 구절은 이렇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그렇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다. 좌파의 광풍이 제 아무리 거센들 기껏 바람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이 이성과 상식 앞에서 소멸했듯이 지금 우리 주변에 맴도는 광풍도 그럴 것이다.

    경제가 흔들리고 외교가 비틀대고 안보가 무너지고 있지만, 우리가 이성과 상식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키워 가면 광풍은 사라지고 따뜻한 훈풍이 다시 불어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제, 우리는 위선과 탐욕으로 대표되는 ‘조국스러움’과의 작별을 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 출범이후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조국’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통령·종북외교·소주성·탈원전·언론탄압… 이 모든 게 '조국'이다

    이웃나라에게는 입만 열면 사과를 요구하면서, 정작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자에게 법무부 장관 감투를 씌워주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대통령부터 조국이다.

    김정은이 기름진 얼굴을 한 채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기어 올라가는 장면을 안방에서 봐야 하는 현실 역시 조국이다. 3년여 동안 해바라기처럼 북한만 바라봤으면서도 우리 축구대표팀이 관중 한명 없는 평양경기장에서 온갖 욕설을 들어가면서 부상당하지 않고 돌아온 것을 큰 수확으로 여겨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 조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난데없는 공수표도 조국이며, 동맹을 흔들어 외교를 파탄 내는 종북외교도 조국이다. 속된 말로 ‘깜’도 안 되는 작자들에게 묘사 떡 갈라주듯 한자리씩 꿰차게 하는 짓거리도 영락없는 조국이다.

    나라경제와 국민살림에 효자 노릇하는 멀쩡한 원전에 탈핵이라는 저주의 마법을 걸고, 온 산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태양광도 조국이다. 박근혜가 이재용을 만나면 적폐이고, 문재인이 이재용을 만나면 ‘우리 삼성’이 되는 현실도 조국의 분칠한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뿐 아니다. 동네 자영업자들을 절망을 내몬 최저임금 폭주인상, 대비책도 없이 기업의 경쟁력을 좀먹게 하는 근로시간규제, 재갈 문 신문과 방송, 돌아보면 온통 ‘조국’투성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어느새 정의는 독점됐고, 공정은 분칠됐다. 그들만을 위한 정의, 그들만을 위한 공정이 판을 치면서 종북은 평화로 둔갑했고, 자유시장경제는 통제사회주의경제로 대체되고 있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 고야는 연작 판화 작품 속에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고 썼다. 기괴한 이 작품을 보면서 실로 서늘했던 기억이 있다. 고야의 금언처럼 우리는 이제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 잠에서 깨어나 내년 봄 꽃을 피우자

    보수의 올가미가 된 전직 대통령 탄핵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고, 권력자들이 떠드는 공정, 평등과 정의가 떠돌이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채야 한다. ‘조국’은 음습한 어느 밀실에서 괴이한 미소를 짓고 있을 국가전체주의 독재의 유령이 보낸 트로이 목마였음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조국이 사퇴한 지금, 우리는 우리 곁에 스멀스멀 스며들어 있는 모든 ‘조국스러움’과 작별해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내년 봄에 제대로 된 꽃을 피울 수 있다.

    당대의 댄디보이 박인환은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눈을 뜨자. 눈을 뜨고 힘을 모으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이번 가을은 <목마와 숙녀>가 더 유난하다.